• 움오름교회

2020.08.30 움오름 주일 설교 -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8-42)








요한복음 19:38~42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42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설교문


1. 죽음, 사랑하는 이를 보낸다는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습니다. 장마와 폭우로 낙동강이 범람했습니다. 학교 운동장의 축구 골대가 잠길 정도로 강물은 하천을 역류해 인근마을을 덮었습니다. 하루 학교가 휴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여전히 운동장을 덮고 있던 물을 피해 교실로 갔더니 웅성웅성 모두가 난리였습니다. 그 전날 물구경 한다고 나갔던 같은 반 친구가 강둑을 넘어 온 물에 빠져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위험하다며 만류하던 동네친구들을 향해 “나 죽으면 우리 집에 떡 먹으러 와~”라고 장난스레 말하며 물로 들어갔던 친구가 실종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그 집을 찾아 방문했을 때 고였던 논 웅덩이에서 친구의 시신이 떠올랐습니다. 그 모습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던 담임선생님은 평소 죽은 친구를 괴롭혔던 두 사람에게 죽은 이의 메시지(“00와 00에게 곧 보자고 전해주세요~”)라며 전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괴롭혔던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제게도 그들 못지않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건 방학숙제를 대신해 주고 돈(500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과 미안함, 그리고 그즈음 여름이면 인기리에 방영되던 ‘전설의 고향’ 등의 영향으로 한동안 저의 밤길은 공포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제가 가장 죽음을 가까이에서 직면했던 것은 대학 3학년 때 가장 아끼고 친하게 지내던 교회후배의 죽음이었습니다. 영안실에서 잠 자듯이 누워있던 후배를 보며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후배의 얼굴을 만지며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릅니다. 속으로 수없이 “달리다쿰”을 외치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죽음이 왜 ‘죽음’인지를 가장 절감했습니다.


이후 전도사와 목사로 살아오면서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죽음을 마주했습니다. 저의 경험상 장례기간 중 대다수의 유가족들이 많이 오열하고, 힘들어 하는 두 시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입관 때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 때입니다. 알코올로 시신을 닦고, 머리를 곱게 빗고 살짝 화장한 고인의 얼굴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기에 가슴 밑에서부터 그리움과 슬픔이 저미어 옵니다. 가족들은 이것이 힘들고 아팠던 겁니다.


고인의 육신이 관 속에 모습을 감추인 채 1,000도씨의 화로 속으로 들어갈 때면 유가족들은 또 한번 오열합니다.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을 그 모습에 한없이 눈물 짓습니다. 1시간 10분 동안 태워지고, 갈아져 한 줌의 재로 유골함에 담겨 전해질 때면 뜨거워 맨 손으로 유골함을 잡기 힘들 정도의 열기만큼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죽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낸다는 것은 이리도 아프고, 저미는 사건입니다.



2. 시름하는 동조자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십자가에서 못박히고, 채찍과 창으로 찢긴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떠나보낸다는 것도 여간 슬프지 않았지만, 그분의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과 걱정을 거치고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비록 로마총독 빌라도의 승인 하에 이뤄진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결정은 자신들이 속한 유대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에 의해 고발되고 정죄될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전까지 이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준비해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공감하며, 그것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1932년 - 1996년) 신부는 이런 이들을 '시름하는 동조자(the anxious sympathizer)’라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숨겼습니다. ‘시름하던 동조자’였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지지하고 따르던 나사렛 예수가 죽은 마당에 굳이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곤란한 일에 휘말릴 수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멤버로 살아왔던 사회적 지위를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냥 넘어가고 회피해도 될 충분한 이유와 핑계꺼리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선 시신과의 접촉을 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안해도 될 이유가 열가지 중 아홉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가진 것을 잃을 두려움 보다도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사랑과 선한 양심에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속삭임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소리에 그들은 반응했으며, 그 길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들은 한 때의 평안을 위해 평생 자책에 시달리며 살기보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신앙 양심에 따라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다함없는 영원한 생명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영혼 속에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때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각오하며 선택한 길이 영혼의 해방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불굴의 용기로 끝없이 나아갔던 사람에 의해 변했다기 보다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온당 해야 할 일을 위해 용기를 낸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나아져 왔습니다.


사랑과 헌신의 진정성은 그 대상이 죽은 이후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했던가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모습 속에서 그들이 얼마나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했는지를 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땅의 '시름하는 동조자’들을 통해 당신의 일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목도합니다. 이와같은 이들을 두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 10:32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어떤 면에서 코로나시대를 보내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도 ‘시름하는 동조자’일 수 있습니다. 드러내 놓고 그리스도인이다고,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기가 부끄럽고 미안한 시절입니다. 병원 응급실의 한 의사(이대목동병원 남궁인)가 말하길 요즘 문진 속에 “교회 다니십니까?”가 있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앙의 정신을 잃고 이웃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행위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이러할 수록 우리 내면에 믿음의 불을 밝히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용기를 내어 신앙을 삶으로 표현하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삶이 요구됩니다. 교회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넘치는 사회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다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야 합니다. 자본과 권력에 길들여진 교회가 아니라, 복음과 신앙에 따라 어두움을 뚫고 일어서는 믿음의 공동체를 재건해 가야 합니다.



3.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폭력과 증오가 만연했던 2천년 전 예루살렘에선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으로 그 에너지를 표출했습니다. 그런 죽음의 에너지가 순식간에 발산되는 때에 다른 소리를 내고,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오롯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결단을 전제로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행위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의 결단과 행위는 절망의 시기에 희망을 파종하는 것이었고, 어둠에 잠식당한 곳에 빛을 끌어들이는 일이었습니다. 급히 총독 빌라도의 승인을 얻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수습했습니다.


카톨릭 신부만큼은 아니지만, 개신교 목사들도 성례와 예식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세례와 성찬식, 결혼식과 장례식입니다. 이중 세례, 성찬, 결혼식은 미리 날짜를 정해놓고 준비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하지만, 장례식은 당하는 가족들이나 목회자나 모두 갑작스레 맞이하는 일이기에 준비시간이 거의 없고, 촉박합니다. 그래서 다른 예식들에 비해 훨씬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시간이 없기는 매한가지 였습니다. 더군다나 오후 6시 해가 지기 전까지 모든 장례를 마쳐야 했기에 더더욱 마음이 급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모든 과정들을 엄숙히 준행했습니다. 먼저 찢기고 피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시신을 몰약과 침향으로 만든 향품을 사용하여 닦았습니다. 그리고 세마포((linen)로 예수님의 상처난 육신을 감쌌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대제사장 무리에 의해 국사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돌아가셨지만,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그 어떤 존귀한 사람에 못지 않은 예를 다해 예수님의 마지막을 장례했습니다.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자신의 묘지를 내어드려 주님의 부활을 준비했습니다.




4. 렘브란트가 그린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이런 수고와 헌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렘브란트의 1651년 작품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Deposition from the Cross’, 1651, Oil on panel>입니다. 이 작품은 마치 사진 촬영 후 편집과정에서 원하는 앵글을 만들기 위해 1634년의 작품을 자른 후 확대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중요한 인물들의 크기를 확대하여 보다 집중하고자 하는 부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1651년 작품엔 어머니 마리아도 전신보다는 얼굴 표정이 더 잘 드러나게 그렸고, 좌측에 세마포를 준비하던 여인들도 과감하게 생략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전 작품들보다 훨씬 침울하고 가라앉아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만큼 촛불을 든 사람도 소년에서 나이든 장년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내리는 니고데모도 시신을 받아 안는 아리마대 요셉도 거의 탈진한 노인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축 늘어져 더 여위어 보이는 예수님의 몸조차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힘들어 보입니다. 곧 쓰러질 듯 탈진한 그는 초점없는 시선으로 슬픔과 고통을 온 몸안에 새겨넣고 있습니다. 그의 입은 벌어져 얼이 빠진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그는 슬픔으로 몸의 균형을 온통 잃어버린 상태로 십자가에 서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왜 이렇게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바꾸어 표현했을까요? 많은 렘브란트 전문가들이 그 이유를 렘브란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자녀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충격에다 가정부(헤르트헤)와의 불화로 법정에 서기까지 하는 등 그는 심적이든 육체적이든 어느 것 하나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지칠대로 지쳐 예수님을 끌어안을 기력조차 없는 상태로 서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쓰러지는 이가 자신 뿐 아니라, 한 분이 더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시신이 된 아들이 내려질 때 오열하고 통곡하다 정신을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사랑하는 이를 황망하게 떠나보낸 렘브란트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삶이 자신만의 어려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진정 사랑하는 이라면 겪게 되는 숙명적인 몫임을 그는 깨달았을 겁니다.


또한 삶이 너무 힘겨웠던 주님처럼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처절한 아픔이 가슴을 파고 들 때, 그리스도의 마지막을 힘을 다해 함께 했던 여인들과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니고데모가 힘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처참한 죽음을 체험했지만, 실은 죽은 그리스도로부터 비치는 빛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 그들처럼 렘브란트 자신의 절망과 공포도 언젠가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과 생명으로 바뀌어 갈 것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렘브란트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를 보며, 우리도 언젠가 내려지게 될 우리의 죽음을 봅니다. 그리하여 그 죽음에 이를 때까지 삶을 어떻게 살지를 묻습니다. 증오와 어두움이 짙은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직시하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어둠에 함몰되어 타인을 탓하며 어둠의 한 부분이 되어 더더욱 검게 덧칠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비록 온 세상이 컴컴하여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로부터 비쳐오는 그 빛에 의지해 꿋꿋하게 걸어가야 할까요?


주님이시라면 어떤 사람을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돕는 동역자로 택하실까요? 어떠한 삶이 절망의 땅에 희망을 파종하는 일이고, 어둠이 드리워진 공간에 빛을 끌어들이는 주님의 일, 우리의 일일까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빛이 사라진 그 컴컴한 시기에 되려 빛을 따라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선택과 걸음은 소망이 절망의 옷을 입은 위기의 때에 렘브란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희망의 심지가 잘려나간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 바이러스의 시대에 주님을 따르는 이로서 무엇을 바라보며 걸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생명의 아침을 바라며 무덤의 돌이 옮겨지기를 기다리며, 찢기고 상처난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부활의 빛이 비쳐옵니다. 암흑이 빛을 대신한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으로부터의 빛에 기대고자 가만히 주님을 안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봅니다. 이 재건의 자리, 소망과 부활의 자리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 우리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5. 게임의 세기말 현상과 교회


수십년 전 유행했던 ‘겔러그, 너구리, 보글보글, 슈퍼마리오’ 등과 같은 오프라인 게임과 달리 요즘의 게임은 대부분 온라인을 지향합니다. 온라인 게임이 대세를 넘어 표준이 된 지금, 게임은 이미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기를 끌지 못하면 서비스가 일찍 종료되기도 하고, 성공하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와 업그레이드를 거쳐 후속작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연속성이 넘치는 생태계 속에서 ‘서비스의 종료’라는 현상은 불가피합니다. 그런데, 게임 덕후들이 말하는 ‘세기말’이라는 서비스 종료가 발생될 때 보통 이런 전조현상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ㆍ신규사용자(유저)의 감소

ㆍ기존사용자의 텃세로 인한 신규진입 장벽 가속화

ㆍ현질(게임 아이템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을 통하지 않고는 정상적인 안착불가

ㆍ아이템 업그레이드 시 골드가 과도하게 요구됨으로 인한 내부경제 붕괴

ㆍ사용자들의 급격한 이탈

ㆍ해당 게임이 망한게임이라는 여론이 지배

ㆍ바람직하지 않은 문화의 고착화

ㆍ과거를 동경하며, 변화를 거부

ㆍ서비스 제공자의 무리수 짙은 정책 남발


위와 같은 세기말 현상들은 상호작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게임을 망하게 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게임은 잘 안하시겠지만, 하나의 게임이 서비스를 종료할 때(망할 때)에 나타나는 현상과 한 사회가 망가질 때의 모습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한 시대의 교회가 쇠락해 갈 때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6. 왜 잠만 자는가?


<그리스인 조르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1883년 - 1957년)의 소설 <위대한 성자 프란체스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시시의 성자라고 하던 13세기의 성 프란체스코(Francis of Assisi)가 꿈에 눈물을 흘리는 다미아노 성인을 만납니다. 다미아노 성인은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지팡이에 의지해 울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프란체스코는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습니다.


"울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성자여. 어찌 된 일입니까? 당신은 천국에 계시잖아요, 그렇지요? 그럼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다미아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지. 나는 자네가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서 평화롭게 자는 모습을 보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왜 잠만 자는가? 프란체스코! 부끄러운 줄 알게!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다네."


당황한 프란체스코에게 다미아노는 손을 뻗치고, 어깨로 교회를 받쳐서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잠에서 깬 프란체스코는 다미아노 성인의 음성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충격을 받은 프란체스코는 그 꿈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타락한 교회, 본을 버리고 말을 취한 교회, 그래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교회를 일으키기 위해 그의 생을 다 바쳤습니다.


앞서 하나의 게임이 망할 때의 전조현상들과 같이 교회가 무너져 간다는 현상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더이상 유입되지 않고, 청년들은 출애굽하듯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권력과 돈에 맛들인 교회와 지도자들은 과거를 동경하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도무지 현 사회와 더불어 어떻게 함께 하고, 호흡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남유다 왕국이 멸망할 당시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묘사했던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이 득세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추종합니다. 교권주의자들이 종교의 자유 운운하며 대면예배를 고집함으로써 도무지 이웃의 안위와 사회의 질서는 안중에도 없는 종교집단으로 교회를 광고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구조를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목소리를 내는 시대에 그들이 말하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교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성경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 심히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허물어져 가고, 망해가는 때에 무너지는 교회를 누가 자신의 어깨로 떠받칠 수 있을까요? 다 죽어버린 주님의 몸을 향품으로 닦고 세마포로 감싸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누가 그 몸을 닦고 세마포로 감쌀 수 있을까요?


현재 교회는 대면 예배를 드리지 못해 무너져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기에 무너져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에 망해 갑니다. … 이 엄중한 시기에 혹 우리는 누워 편안히 잠만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위기의 시기, 절박한 때에 누가 무너진 벽 앞에서 본질의 벽돌을 쌓으며 신앙을 , 교회를 다시 세워갈 수 있을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무너져 가는 교회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앉아 한탄만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기존의 표준이라고 일컬어지던 것들이 대부분 부정당하는 코로나 시대에 과거만을 고집하는 교회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웃을 외면하고, 시대를 부정하는 천덕꾸러기 교회로 존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의 게임이 사라지고, 하나의 사회가 종말을 고할 때처럼 이 땅의 교회에 세기말의 현상과 전조가 수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짓예언자들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교회가 저속한 광장집단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이 위중한 때에 주님을 위해 장례를 치르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주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원합니다. 무너져 가는 교회를 아파하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약한 어깨마저 내어놓는 믿음의 사람들 되기를 원합니다.


혐오와 미움의 시기에 교회에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함을 부끄러워 하기를 원합니다. 대면예배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함을 슬퍼하는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찢기고 상처난 주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우리 모습 속에서 부활의 빛이 비치게 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보게 하옵소서. 비록 우리 시대에 바이러스로 인해 기존의 교회와 신앙이 허물어져 가는 아픔이 있지만, 주님의 몸을 세마포로 감싸는 우리 행위로 인해 새롭게 교회가 재건되고 부활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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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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