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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8.23 움오름 주일 설교 - "그것을 숨기더니"(요 19:31-42)









요한복음 19:31~42

31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32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33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34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5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아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36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37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9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41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42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설교문


1. 종교적 형식주의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기고 예수님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영혼이 떠나가시니라(παραδίδωμι, 파라디도미)’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과는 다르게 막 15:37눅 23:46은 ‘숨지시니라(ἐξέπνευσεν, 엑세프뉴센)’고 했고, 마 27:50은 우리말 성경번역에는 요한복음과 동일하지만, ἀφῆκεν(아피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영혼이 떠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다양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할수는 있으나, 이 부분은 죽음을 표현하는 우리말의 여러 용례들(‘죽었다, 돌아가셨다, 별세하셨다, 잠드셨다, 떠나가셨다 등등’)처럼 생각하심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사형을 집행하던 유대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의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그 이유를 요 19:31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유대력으로 1월 14일 해질무렵부터 시작되는 1월 15일 안식일은 여느 안식일과는 달리 ‘큰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던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이기 때문입니다.(이 유월절은 오늘날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 하루 전 토요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명절 중에서도 최고의 명절이다보니 유대인들이 지킬 규례와 법도가 더 엄했습니다. 그런 날에 부정한 시체를 십자가에 매달아 둔다는 것이 그들로서는 탐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총독 빌라도에게 아직 살아있는 죄수들의 다리를 꺾어서라도 죽인 후 시체를 얼른 치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요구한 이유는 신 21:22-23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2절: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절: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한편으로는 죄가 없으신 분에게 죄를 만들어 십자가형을 밀어붙였던 유대인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유월절 규례를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강제로 숨을 끊어서라도 해지기 전에 장사하고자 했습니다. 종교적 형식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의 민낯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남이야 죽든 말든간에 내가 경건하고, 내가 거룩하면 그만이다는 종교적 이기주의의 표본입니다.


지난 15일 광화문에서 행한 광복절 집회로 인해 4개월만에 매일 300명 이상의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라는 곳에서 이런 내용의 문자를 소속 교회들에 발송했습니다.


“한교연에 소속된 교단과 단체는 현 정부가 발표한 수도권 지역 교회의 예배 금지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생명과 같은 예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이에 따른 모든 책임은 한교연이 함께 지겠다”


방역을 위한 정부의 행정명령에 불복종을 사주하는 그들의 문구 속엔 이웃의 생명과 안전보다도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간에 나만 거룩하게 예배드리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예배드리지 말라고 금했습니까? 현장예배 대신 온라인으로 예배해 달라는 정부의 권고 아닙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우선으로 한다는 교회에 대한 간곡한 부탁 아닙니까?


물론 온라인 예배나 각 가정에서 개별로 드리는 예배보다는 실제 예배당에 모여 드리는 예배가 당연히 더 집중될 수 있고, 은혜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때가 때이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영화 한번 보지 못하고 편하게 식당에도 가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인데, 왜 교회만 유일하게 고집스레 현장예배를 강행해야 합니까? 그들의 말처럼 ‘생명같은 예배’를 각자의 처소에서 가장 귀하게, 가장 정성을 다해 드리면 왜 안된다는 말입니까?


무엇이 우리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거룩하게 되는 길인가? 무엇이 우리 믿음의 중요한 가치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하는 길인지를 잘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양심있는 신앙인이라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못하더라도 병을 옮기지는 않겠다는 최소한의 사랑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 그 찌른 자를 보리라


원래 십자가형의 목적은 나무 위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을 뭇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로마 반역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기 위해 몇날 몇일이건 간에 한동안 십자가 위에 죄수를 매달아 두어야 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 죄인을 효수해서 그 머리를 한동안 매달아 전시하던 것과 유사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규례의 준수를 이유로 로마 형집행의 예외를 요구했고, 총독 빌라도는 허가했습니다.


이에 군사들은 아직도 숨이 붙어있던 예수님의 좌우 강도들의 다리를 꺾음으로써 강제로 숨을 멈추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숨이 멈춘 상태이므로 굳이 다리를 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대신 정말 죽은 상태인줄 확인하기 위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름으로써 확인사살했습니다.


숨진 예수님의 옆구리를 깊숙히 파고 든 창이 빠져나옴과 동시에 아래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혹한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했던 제자 요한은 35절을 통해 진술의 신빙성과 그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만큼 기록 목적을 분명히 밝힌 책도 드물 것입니다. 요 20:31에 언급한 것과 같이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연이은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목적 하에서 조금전에 읽은 35절도 자신이 증언하는 이유가 ‘믿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믿는다”는 낱말이 여러 가지 형태로 99번이나 등장합니다. ‘생명’, 또는 ‘살다’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 54번 나타난 것에 비해 ‘믿는다’라는 단어가 엄청난 그 빈도만큼이나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자주 확인하는 것이지만, 사도 요한은 무조건 믿으라는 식으로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나름의 증거들을 제시하고,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믿음을 권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한 구절들을 인용하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의 연관성을 제시함으로써 예언이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증거합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성경을 응하게 함이다”는 문구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 예수님의 옷 제비뽑기, 신포도주, 창에 옆구리 찔리심, 뼈가 꺽이지 않음 등>입니다. 물론 요한복음을 기술한 사도 요한조차 그 일이 일어나고 있던 당시에는 그 이유를 몰랐을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최후의 순간까지 한사코 그 일들을 행하셨는지, 왜 그 말씀들을 하셨는지 몰랐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지나고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모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로 믿게 하시려고, 당신이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셨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 일들을 ‘의도적’으로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 주님이 그토록 의도적으로, 또는 반복적으로 그 일들을 하셨을까요? 그만큼 우리라는 사람은 의심이 많고, 잘 믿지 못하는 존재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믿음의 세계로 이끄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숨이 멈추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우릴 위해 믿음의 증거들을 남겨주셨던 겁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은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렵고, 오죽 쉽지 않았으면 오랜 세월동안 이런 금언들이 만들어지고, 전해 졌겠습니까? 특히 이 중에서도 ‘개’와 관련한 속담들이 많아 놀라왔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입니다.


ㆍ 개도 먹을 때는 안 때린다.

ㆍ 개도 얻어맞은 골목에는 가지 않는다.

ㆍ 개도 제 주인은 알아본다.

ㆍ 개꼬리 3년 두어도 황모(노란털) 못 된다.

ㆍ 개 못된 것은 들에 나가 짖는다.


우리 조상들이 개 이야기하려고 속담에 개를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찮게 여기는 개만도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믿고 신뢰할 만한 사람 찾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고로 고단한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믿을 만한 대상’일 겁니다. 지칠 때 힘과 위로가 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분, 변함없이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분이 필요합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믿을 때에 그 이름을 힘입어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증거했던 나사렛 예수, 마지막 숨을 멈추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증거를 남기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릴 향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믿을 만하다, 나를 믿어라”


우리에게 믿음을 권하시는 주님은 일찌기 요 7:38을 통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주님의 이 말씀과 같이 믿는 우리 속에도 생수의 강이 날마다 흘러나기를, 그 강으로 인해 고침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그 물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풍성해 지고, 더 풍성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3. 숨기던 두 사람


예수님이 운명하신 시간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 오후 3시였습니다. 유월절이 시작되는 해질무렵인 저녁 6시 까지는 불과 3시간 밖에 남지 않은 때였습니다. 빌라도에게 청을 해서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게 했던 대제사장의 무리들도 다급했지만, 또 다르게 마음 급하게 행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두 사람이 행한 일들을 요 19:38-42을 통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두 사람 모두 70인 장로들의 모임격이요, 유대 최고종교의결기구였던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습니다. 일찌기 니고데모는 한밤 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에 대해 묻던 랍비였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접촉점을 알 수 없으나 이들 두 사람이 함께 의기투합해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면, 두 사람은 분명 서로 마음을 나누던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총독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을 소개하며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겼더니’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의 번역을 보면, 그가 매우 비겁하고 겁이 많았던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 27:57을 보면, 그는 부자였을 뿐 아니라, 막 15:43눅 23:50에 의하면 그는 ‘선하고 의로웠으며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경건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고 오늘 38절에 ‘숨겼다’는 단어를 보면, 다른 해석의 여지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숨겼다’로 번역된 단어 κρύπτω(크륍토)가 ‘숨기다’는 뜻 이외에도 ‘비밀스럽게 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반영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을 보자면, 그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몸을 숨기고 피했던 사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은밀히 준비하던 주님의 제자였던 겁니다. 비록 산헤드린이라는 신분의 특성상 드러내 놓고 나사렛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비밀스레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던 숨겨진 제자였던 겁니다.


물론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왜 그러면 산헤드린이 예수님의 처형을 결정짓던 때에 반대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허나, 우리 모두가 인지하다시피 대제사장의 뜰에서 새벽에 갑작스레 열렸던 그 불법재판은 그로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자발적 타살의 길을 선택하신 예수님에게서도 전혀 살고자 하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겁니다.


어쨌든 주님은 운명하셨고, 아리마대 요셉이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총독을 찾아가 요구했습니다. 이를 보며 용기를 낸 니고데모가 몰약(방부제)과 침향(허브) 섞은 것 30여 kg을 준비하고 같이 나섰습니다. 죽은 이를 위한 예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생명과 사회적인 매장을 불러 올 수 있는 행위였습니다. 당장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에 의해 탄핵 당할 것이고, 더 이상 사회적인 지위는 누리지 못할 행위였습니다.


상식으로 봐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결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도 아니고, 죽으신 마당에 무슨 희망이 있다고 동료들과 유대사회에서 비난받을 있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당시 그들은 대부분 동료들과 사람들에게 어리석다고 평가받을 행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한복음을 통해 이들의 어리석고도 무모했던 그 선택과 결정이 얼마나 신앙적이고 아름다웠는지를 기록케 하셨습니다.



4. 바라봐야 할 것을 바라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탄핵심판 청구에 관해 재판관 8인 전원일치로 인용결정을 내리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되었습니다. 이즈음부터 우리나라는 극명하게 좌와 우가 나뉘어 심각하게 대치중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정치의 자리 뿐 아니라, 교회 신앙의 자리에 까지 깊숙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상식이며, 어떤 것이 참 진리를 따르는 신앙인지를 숙고하지 않습니다. 그저 정치적 논리를 따라 좌파와 우파를 감별하고, 나눔으로써 피아를 식별합니다.


어떤 이가 대놓고 저를 향해 한 말은 아닌데, 저를 향한 말로 다가와 며칠 전 마음 아팠던 적이 있습니다. 나름 유명할 뿐 아니라, 많은 팬덤을 지닌 선배목사가 있습니다. 특정교회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도 해당교회의 편에서 전투를 마다하지 않던 사람인데, 그와 그 교회와의 특수한 관계에 비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 근래 현재의 방역을 책임지는 정부를 향해 실패의 책임을 교회에 돌리지 말라며 비난하는 그의 글을 보고 사뭇 놀랐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담벼락에 놀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찬성을 누르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동시에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비수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현 정부와 옹호자들은 적그리스도다”, “교회를 비판하는 안티들이 교회비난 하니까 덩달아 목사들도 교회 비판하는데, 그넘이 진짜 목사인지 모르겠다”


앞서도 나눴지만, “현 정부가 발표한 수도권 지역 교회의 예배 금지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는 교회와 목사들의 눈에는 방역에 당연히 협조해야 한다는 우리같은 교회는 ‘그넘’이고, ‘종북좌파’입니다. 이게 소수의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주위를 둘러보고 겪어보니 의외로 다수를 차지합니다. 이분들의 눈에는 우리는 어리석고 믿음을 포기한 자요, 배교자에 준합니다.


그들은 마트도 열고, 까페도 영업하는데, 왜 교회는 문 닫으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8월 15일 민노총도 수천명이 모인 집회를 했는데, 왜 광화문 교회집회만 갖고 그러느냐고 합니다. 이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교회가 문을 열고 물건을 팔아야 월세 내고, 종업원 임금을 줄 수 있는 마트나 까페하고 똑같은 영업장입니까? 교회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노동단체같은 이익집단입니까?


코로나19의 창궐(pandemic)이 이른바 선진국이라고 하던 나라들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 자본과 자유경쟁에 바탕해 온 그들이 숭상해 왔던 가치와 체력이 얼마나 허약하고 강자우선주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전격적으로 실행한 전공의와 인턴을 포함한 한국의사협의 파업을 보며 의사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제일로 여기고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길을 따른다던 교회가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이 차에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기독교는 지금 큰 위기, 존재 자체의 위기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이 때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2천년 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고, 무모해 보였지만, 죽은 나사렛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성껏 장례를 치렀습니다. 비록 주님을 제일 사랑한다던 제자들은 줄행랑 쳤고, “호산나!”라고 외치던 군중들도 순식간에 돌아서서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변절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리석고도 위험한 선택을 실행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은 2천년이 지난 우리들에게 와서는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행위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숨겨왔던 그들의 신앙은 진실했으며, 그들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였음이 밝혀졌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지적하고, 요소요소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바이러스의 시대에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중요시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루하루 어떤 믿음의 결정을 내리고 그 길을 걷고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허울좋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젖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길을 잃어버린 교회로 존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거룩하게 되는 길이 진정 무엇인지를 말씀과 양심에 물으며 걷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원합니다. 비록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지 못하더라도 병을 옮기지는 않겠다는 최소한의 사랑으로 전염병의 시대를 보듬는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천성이 의심많고, 잘 믿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믿음의 증거들을 끝까지 남겨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주님으로 인해 참 생명을 누리고 나누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비록 다수의 눈에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주님을 진정 예배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비록 같은 믿음의 사람들에게조차 욕을 먹고 오해를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 이 시대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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