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8.09 움오름 주일 설교 -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25-27)

8월 22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9:25~27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26예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설교문


1. 샤갈의 <이삭의 희생>, 그리고 사라


환상적이고 신비로울 뿐 아니라, 독특한 색채의 초현실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림의 시인’으로 불린 화가는 러시아 태생으로서 모이세 세갈(Moishe Zakharovich Shagal)이라는 본명을 가진 마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입니다. 그는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샤갈이 노년을 보낸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의 휴양지인 니스(Nice)엔 그가 생전에 기증한 창세기 이야기 그림 연작(12점)이 전시된 샤갈 박물관(Musée National Marc Chagall)이 있습니다. 오늘 잠시 나누고자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이삭의 희생, Le sacrifice d’Isaac>이라고 불리는 유화입니다.






이 그림은 몇주 전에 나누었던 창 22장의 ‘묶임, 결박’이라는 뜻의 아케다(עֲקֵידַת) 에 기반한 작품입니다. 이 그림이 여타의 화가들이 그린 동일주제 작품과 가장 다른 것은 관점과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관점을 보면, 작년 사순절 때 나눈 렘브란트의 아케다를 비롯해 수많은 화가들의 초점은 대부분 아브라함에게 두었습니다. 창 22장의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시험이었고, 아브라함의 순종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샤갈의 작품은 제목에서도 암시하듯이, 아들 이삭에게 초점이 맞춰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 사라에 맞춰 있습니다.


창 22장 이삭의 이야기에는 어머니 사라는 등장하지 않기에, 화가들이 그린 아케다에도 당연 사라는 부재했습니다. 그런데, 샤갈이 처음으로 사라를 등장시켰습니다. 샤갈이 그린 그림을 보면, 그 핵심에 사라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의 위기에 처한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절박한 마음과 간절한 사랑으로 화폭을 울리고 있습니다.


둘째, 구도를 보면, 샤갈의 그림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림 아랫부분에는 아케다 이야기를, 왼편에는 소리없이 울부짖는 사라와 어린양, 그리고 오른쪽 상단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아기 예수를 안은 ‘피에타(Pieta)’가 그려져 있습니다.


샤갈이 그린 아브라함은 여타의 화가들이 그린 아브라함과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삭과 천사의 모습은 매우 이상합니다. 이삭의 묶이지 않은 오른손은 정면으로 그림을 보는 이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이삭이 한쪽 눈은 감고 한쪽 눈은 뜨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그의 몸 절반이 벌써 죽음의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관객을 향해 윙크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삭은 한쪽 눈을 감고, 다른 한쪽 눈은 뜬 채 그림 속의 자신을 보는 이들과 교감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을 볼 것을 요청하는 눈짓 같습니다. 마치 죽음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대속자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신이 죽어야만 부활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며, 되려 보는 이로 안심하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눈을 들어 그림의 오른쪽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샤갈의 작품 <이삭의 희생, Le sacrifice d’Isaac>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어머니 사라의 존재입니다. 이 말은 <이삭의 희생>이라는 전체 이야기를 푸는 열쇠가 ‘어머니 사라’라는 의미입니다.


샤갈의 그림 속에는 어머니와 아들의 모습이 다른 형태로 세 번 등장합니다. 사라와 이삭, 마라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마리아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처럼 아케다 이야기는 사라의 눈으로 재해석됩니다. 사라의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이삭을 사랑하는 아들이자 희생된 아들로 인식하게 합니다. 그것을 통해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동시에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희생자들의 눈물과 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합니다. 나아가 그 아들이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통로가 된 어머니와 여자로서의 삶을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어서 살아가도록 촉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샤갈의 작품 <이삭의 희생, Le sacrifice d’Isaac>으로 풀어본 지난주일 설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아들이니이다


지난시간의 기억을 회상해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라고 부리지 않고,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주일 살펴보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집중할 것은 그 이어지는 말씀의 의미들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여”라고 부르시며,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Γύναι, ἴδε ὁ υἱός σου(귀나이, 이데 호 휘오스 수), 원문을 직역하자면, “여자여, 보라. 당신의 그 아들”입니다.


이 부분을 해석하는데, 있어 대략 2가지로 사람들의 견해가 나뉩니다. 하나는 여기서 말하는 아들을 ‘예수님’으로 보는 쪽과 다른 하나는 ‘제자 요한’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왜 같은 말을 보면서 이렇게 다르게 볼까요? 그리고 그 각각은 또 어떤 의미를 두고 있을까요?


먼저, ‘아들’을 예수님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 이렇게 보는 성서학자들은 대개 ‘여자 γυνή(귀네)’를 어머니에 대한 극존칭의 의미로 본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NIV 영어성경만 하더라도 ‘여자 γυνή(귀네)’를 ‘Dear woman’으로 번역함으로써 다음 이어지는 “보소서, 아들이니이다(here is your son)”를 지금까지 양육해 주신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말이라고 봅니다.


부연 설명드리자면, 어머니 마리아 덕분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한 아들의 자기선언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인사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해석 뒤에는 이런 적용이 자연스레 따르기 마련입니다.


“위대한 자식은 위대한 부모로부터 비롯됩니다. 위대한 부모란? 아브라함처럼,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자만 자식에게 참된 지혜와 참된 생명과 영원한 진리를 전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함인지는 알겠으나, 이런 해석과 적용은 희망과 기대보다는 ‘위대한 부모’를 두지 못한 자식들의 절망과 책임전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해석과 적용으로 수용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나아가 동의가 선뜻 되지 않는 또 다른 것은 당신이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머니도 알고, 자신도 아는데, 십자가 위에서 굳이 말씀하실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아들’을 제자요한으로 봐야 하는 근거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 부분을 반영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분명 예수님이 아닌, 십자가 아래 여인들 속의 유일한 남자였던 요한을 지칭하는 지시대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여 보십시오 그가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번역한다면, 주님이 지금 마리아에게 “보라”고 말하는 마리아의 아들은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 요한이 됩니다.


이렇게 봐야 하는 중요한 근거는 그 다음 이어지는 27절에서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6절과 27절을 연결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26절에서 주님은 어머니에게 요한을 “당신의 아들입니다” 라고 말씀하신 후 27절에서 요한에게 마리아를 “너의 어머니이시다”로 위탁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6절)라는 말씀의 문장의 형태입니다. 우리말 해석의 형태와 달리 원문의 문장은 긴급한 명령형(imperative)입니다. 고로 이 문장 속엔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감사나 연민적인 메시지가 아닌 단호함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호한 해석’을 하라고 어법을 명령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이 말씀을 아람어로 직접 들었던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속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반영해서 헬라어 명령의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반영해 전체적인 의미를 보자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난주일에 설명드린 바와 같이 주님은 여인 마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되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한 인간이요, 아들로서가 아닌, 예언의 성취자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에게 명령하신 겁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의 고통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구원에 초점을 맞추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보십시오”라는 청유형 대신에, “보라”라는 단호한 명령형을 26절과 27절에 연이어 사용하신 겁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12살 때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의 사건(눅 2:41-52)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월절 제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 나사렛을 향했습니다. 하룻길을 걸은 뒤 아들을 찾았으나 없었습니다. 놀란 가슴에 친척들에게 묻고, 주위 사람들에게 알아보았으나 모두가 모른다는 말에 그 부모는 오던 길을 뒤돌아 예루살렘을 향하며 아들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아들을 못본지 3일째 되던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난 어머니 마리아가 반갑고도 놀란 맘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여기서 3일이 지났다는 것은 자연스레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28)


이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눅 2:49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누가복음은 요셉이나 마리아 모두 그 말이 무슨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연이은 눅 2:51을 보면,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으나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면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그때의 일을 회상케 하며 어머니와 자신만이 아는 비밀한 코드로 말씀하고 있었던 겁니다.



3. 왜 요한을?


그런데, 여기서 드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의탁하셨을까요? 마 13:55-56을 보면, 마리아에겐 예수님 이외에도 4명의 아들(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과 딸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신 걸까요?


성서학자들은 막 3:31-35의 사건을 들며 예수님에게 있어 가족이란 혈육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고 설명하기도 하고, 또 그때는 아직 동생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전이어서 그러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앞서 설명드린 부분과 연결하여 다른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여자의 자손’으로서 사명을 다하셨듯이, 마리아와 더불어 요한으로 이루실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기록 뿐아니라, 요한 1, 2, 3서를 거쳐 신약의 마지막 성경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소명이었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것의 결론적인 부분과 초기 기독교 역사의 전언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요한은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친형제 야고보가 먼저 순교함으로써 어머니 살로메와 함께 마리아라는 두 어머니를 책임지는 아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합니다.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옆집이나 한 동네에는 살아도 한 집에 같이 살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도 아니고, 두 어머니를 독신 아들이 모시고 산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해진 기간이 있는 것도 아닌, 마리아가 별세할 때까지 모시는 일은 그에게도 무척 버거운 일이었을 겁니다. 특별히 요한의 타고난 성격을 볼 때, 그는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보아너게, 우레의 아들’(막 3:17)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언어로 대체하자면, ‘토르의 아들’입니다. 한 마디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그는 예수님의 이모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살로메를 통해 은근히 인사청탁을 할(마 20:21) 정도로 성공지향적이고, 권력추구형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밖에서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받는 이름 날리는 일이 아니라, 나이든 여인을 평생 봉양하는 일은 애초부터 그와 어울리는 일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요한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바로 그 일을 요한에게 명하셨습니다. 청유형의 부탁이 아니라, ‘긴급한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요한이었어야 했던 걸까요? 왜 주님은 쉬운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일을 하기에 난해한 요한을 선택하신 걸까요?


그것은 불같은 성격의 그가, 출세지향적이고, 권력추구자였던 그가 자신을 꺾으면서 한 사람을 섬겨가는 과정을 통해 배우는 사랑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아프지 않고서는 배울 수 없는 기도가 있듯이, 아파하고 힘들어 하며 마침내 배우는 사랑의 깊이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배웠고,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양육한 어머니의 내밀하고도 생생한 육성증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달아 갔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가장 극명하게 증언하는 ‘에고 에이미’의 책 요한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요한 1, 2, 3서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고,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해 내시는지를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주님의 명령을 묵묵히 준행하며 한 사람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섬긴 결과였습니다. 그 섬김에 대한 주님의 상급이요, 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 요한의 글 안에는 한 사람을 진정 끝까지 사랑해 본 사람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랑의 언어와 온기가 느껴지는 겁니다.



4. 안 괜찮아도 괜찮아!!


오늘 예배순서지 안의 ‘움이 트는 생각’란에 요즘 tvN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와 관련한 한 첼리스트의 에피소드를 실었습니다. 지나던 길에 해당 드라마를 두세번 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이른바 핫한 드라마인 것 같습니다.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중심 무대는 '괜찮은 병원’입니다. '안 괜찮은 사람들'이 괜찮아지려고 찾아오는 곳입니다. 이곳 병원엔 괜찮은 사람들과 안 괜찮은 사람들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괜찮은 사람들은 가운이나 근무유니폼을 입고 있고, 안 괜찮은 사람들은 당연 환자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니 쉽게 구분이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어떤 이가 괜찮은 사람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종영에 이르러서는 안괜찮은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 같고, 괜찮다던 사람들이 안괜찮은 사람같습니다.


​가장 압권은 ‘괜찮은 병원’의 의료간호업무를 총괄하던 수간호사의 정체입니다. 가장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던 그가 알고보니 사이코패스 살인마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심각한 자폐환자에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던 문상태는 누구보다도 맑은 영혼과 정직한 심성을 지닌 괜찮은 사람 같습니다.


드라마는 이렇게 안 괜찮은 사람들이 함께 서로를 향해 옆을 내어주면서 사랑을 배워갑니다. 서로의 안 괜찮음을 다독이며 “괜찮아! 괜찮아!!”라고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남들처럼 ‘척’하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사회에선 사이코로 불리지만, 괜찮다고 다독이는 서로로 인해 따뜻한 사랑의 이야기, 치유의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묵상하며,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를 생각하다 묘한 공통점이 스쳐 갔습니다. 그것은 안 괜찮은 제자에게 어머니를 의탁하심으로 만들어 가신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의 이야기입니다. 성격이 통제가 잘 안되고 과격한 제자, 바로 안 괜찮은 그 사람이 짐처럼 떠안은 어머니 마리아로 인해 성장하며 사랑을 알아갔던 괜찮아진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보라, 네 어머니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마치 이렇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안괜찮아도 괜찮아!!”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괜찮은 병원’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만난 안 괜찮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괜찮아져 가는 곳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옆을 내어주면서 사랑을 배워감으로써 괜찮아져 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보라, 네 어머니다”는 주님의 명령에 순명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곳입니다. 괜찮고, 안 괜찮고를 감별하고, 구분하는 곳이 아니라, 안 괜찮아도 괜찮다며 서로를 다독이는 속에서 경험해 가는 하나님의 괜찮짐의 역사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이삭의 희생 속에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대속함을 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속에서 아파하며 기도하던 어머니들의 눈물과 기도를 듣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눈 먼 사람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던 주님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안 괜찮은 사람들을 ‘괜찮게 하신 치료자’이심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안 괜찮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의탁하셨던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기록되고 묘사되었던 것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나아가 안 괜찮은 우리와 더불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괜찮아짐의 이야기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위탁하시고 명하신 함께함의 지체들과 더불어 만들어 갈 치유와 사랑의 이야기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의 교회는 “괜찮아!”라고 말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 “안괜찮아도 괜찮아!!”라고 말할 줄 아는 교회이게 하옵소서. 우리 속에서 치유해 가시는 주님으로 인해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점차 ‘괜찮은 병원’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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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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