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8.02 움오름 주일 설교 - "여자여 보소서"(요 19:25-27)










요한복음 19:25~27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26예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설교문


1. 차별의 문화를 넘어


1) A.O.C의원 vs 테드 요호의원


지난주중 미국에 사는 분이 소개해 줘서 A.O.C(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국 하원의원(민주당, 뉴욕)이 발언하는 영상(10분)을 보았습니다. 잠시 소개해 드리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영상: https://youtu.be/LI4ueUtkRQ0


워싱턴 DC의 의사당에서 A.O.C의원은 ‘테드 요호’라는 중년남성 하원의원(공화당, 플로리다)으로부터 ‘F’로 시작하는 비속어가 섞인 성차별적 말을 들었습니다. 이를 옆에 있던 의회전문지 더힐의 기자가 기사화해서 문제가 되자 테드 요흐는 ‘사과같지 않은 사과(non-apology apology)’를 했습니다. 대략 이런 겁니다.


“언론이 내가 했다고 전한 험한 말은 사실이 아니며, 그렇게 이해했다면 오해를 일으키게 된 데 사과한다.”며 자신에게도 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말을 딸같은 여성에게 했을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The offensive name calling, words attributed to me by the press were never spoken to my colleagues and if they were construed that way, I apologize for their misunderstanding.”


이에 A.O.C의원은 남성들의 뻔한 변명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며 공개 발언을 자청했습니다. 자신의 형편없는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 여성, 아내, 딸을 방패막이 삼는 남성들의 비급한 문화를 비판했습니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폭력적 발언을 용인하는 문화, 그리고 그 권력을 지탱하는 전체 구조의 문제라며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딸이 있다고 해서, 아내가 있다고 해서 좋은 남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존엄과 존중으로 사람을 대할 때 좋은 남성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좋은 남성은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야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사과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A.O.C의원의 연설 중에 특별히 맘 속에 짠하게 다가왔던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서 요호 씨가 당신의 딸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제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통해 요호 씨가 제가 있는 하원의 발언대에서 했던, 무례한 행동을 보셨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제 부모님께 제가 당신들의 딸이고, 당신들은 딸이 남성들로부터 당하는 괴롭힘을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키우시지 않았음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My father, thankfully, is not alive to see how Mr. Yoho treated his daughter. My mother got to see Mr. Yoho’s disrespect on the floor of this house towards me on television, and I am here because I have to show my parents that I am their daughter and that they did not raise me to accept abuse from men.


잔향이 계속 자리하는 말이었습니다.



2) 여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수렵문화를 거쳐 농경문화와 산업사회를 지나 오늘날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중심의 문화 안에서 여성은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노동의 대가를 비롯해 인권에 있어서도 숫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조금전 소개해 드린 미국 의회에서의 사건과 같이 존중의 문화를 표방한다는 서양권에서조차 마초적 남성문화 하에서 열등한 존재로 여김받았습니다.


평등의 대표적인 지표로 인식되던 ‘참정권’의 경우, 미국에서 19세기에 비로소 흑인의 인권과 같이 겨우 논의가 되다가 1920년에 이르러서 허가되었습니다. 이제 겨우 100년이 된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8년 여성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되었는데, 스위스의 경우엔 우리보다 더 늦은 1971년에서야 인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되었다고 차별의 부분이 해결되었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아직도 갈 길이 참 멉니다. 영화 <Doctor Zhivago, 닥터 지바고>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여자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겪는 크고 위험한 모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가장 크고 위대한 모험’이라니, 얼마나 여성들의 삶이 험난한지,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지 가늠이 되는 말입니다. 특히 유교적 문화와 가부장제 속에서 이 땅의 여성들은 무척이나 고달팠습니다. 때론 윗대의 여성들에 의해 아랫 세대의 여성들이 차별문화에 순복하기를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유년시절에 새겨진 교회의 자화상입니다. 연말에 실시하는 전교인 공동의회 때에 여성집사님들이 손을 들어 질문하거나 이견을 말하고자 할 때, “여자가 어디?”, “교회에서 여자는 잠잠하라!”며 호통치던 남성목사 또는 남성중직자들의 목소리는 ‘당연한 문화’였습니다.


일반사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땅의 교회의 성장에 여성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잘못 태어난 남성이다. 열등한 여성이 우월한 남성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우주의 순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한계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문화를 바꾸고 극복해 가야 하겠습니다.



2.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어머니


지난주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서 함께 했던 여성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주님의 체포와 동시에 남성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절망했고, 모두 도망쳤고, 몸을 숨겼습니다. 불과 몇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던 그들의 공언(公言)은 실체없는 공언(空言)으로 판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비록 그들은 남성들에 의해 무시되고, 배제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의 마지막 자리인 골고다까지 함께 했습니다. 아픔과 치욕의 십자가 곁에서도 같이 아파하며, 눈물 지으며 주님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강했기 때문이거나, 불굴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녀들의 사랑이 죽음같은 두려움 마저 넘어서게 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새벽에 가장 먼저 부활의 소식을 여인들에게 알리셨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비록 당시 사회에서 여인이 중인으로서 효력이 인정되지 않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당신을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에 의한 증언이 그 무엇보다도 크고 의미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 아래 그 여인들을 보시며, 특별히 어머니를 향해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2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손과 발이 못에 박힌 상태에서 점점 더 몸의 무게로 인해 찢기는 극심한 고통이 짓눌러오던 때에 주님은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쳐다보고 계신 어머니 마리아를 보셨습니다. 그 어떤 이가 어떤 말로 위로하더라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단장(斷腸)이라는 말처럼 창자의 마디마디가 끊어지는듯한 슬픔 속에서도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어떤 사람입니까? 처녀의 몸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임신을 했고,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여인입니다. 어느 순간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그 아들이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30년 동안 양육하고 후원했던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아들이 처참한 죽음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극한의 슬픔 속에서도 여인은 주저앉아 통곡하거나 실신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와 예언의 말씀을 믿으며 아들의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3. 여자여


그런 어머니와 눈을 맞추며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아니, 자기 어머니더러 ‘여자여’라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F’로 시작되는 욕은 아니지만, 이것 여성비하발언 아닙니까? … 다소 무례하게 보이고, 차갑게 보이기도 하는 이 말의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라는 일반적인 호칭 대신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여자여’라는 말 ‘γυνή(귀네)’는,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황제가 왕비를 부를 때 사용한 존경의 명칭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여자 γυνή(귀네)’가 높임말을 뜻하거나, 어머니와 동일시될 정도로 혼용된 적이 없습니다.


‘여자 γυνή(귀네)’는 누가복음에서 2번, 요한복음에서 6번 등장합니다. 먼저,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18년 동안 귀신 들렸던 여인을 “여자여”라고 부르셨고(눅 13:12), 베드로가 대제사장집의 여종에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눅 22:57).


다음으로, 요한복음을 보면,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불렀습니다(요 2:4).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여자여”라고 불렀으며(요 4:21),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여자여”라고 불렀고(요 8:10), 오늘 본문인 요 19:26에서 십자가 아래 어머니를 보시며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향해 천사가 “여자여”라고 불렀고(요 20:13), 이후 예수님께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여자여” 라고 부르셨습니다(요 20:15).


지금까지 살펴본 ‘여자 γυνή(귀네)’의 용례 그 어디에도 “여자여”가 높임말임을 설명하는 곳은 없습니다. “γυνή(귀네), 여자여”라고 호칭된 여인들은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해 당시 제대로 된 사회적 대우를 받지 못하던 불쌍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γυνή(귀네), 여자여’ 라는 말은 '어머니에 대한 높임 말’이 아니라, 그냥 여성을 지칭하는 ‘madame’같은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γυνή(귀네), 여자여’라고 불렀을까요?



4. 여자의 후손과 골고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원복음’(original godspell)이라고 불리는 ‘창 3:15’과 ‘골고다’와 관련된 2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속에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해 언급된 부분이 창 3:15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원초적인 복음을 예언하는 이 말씀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류 구원과 구원자에 대한 첫번째 선포였습니다. 뱀이 여자의 후손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암호화된 것같은 이 뜻을 푸는 첫번째 열쇠가 ‘여자의 후손’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은 모두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유전자가 모두 관여한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죄성에 의해 영향받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성이 관여되지 않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유일한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창 3:15 예언의 성취자이십니다. 이것을 알리시기 위해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γυνή(귀네), 여자여’라고 부르신 겁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과 ‘골고다’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것이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γυνή(귀네), 여자여’라고 부르신 이유를 푸는 2번째 열쇠입니다.


십자가가 세워진 곳은 ‘해골’이라고 불리는 ‘골고다’였습니다. 몇주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그곳이 해골의 모양처럼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사형수들을 처형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죽음의 자리, 해골이라는 골고다에 예수님이 처형되셨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죽음은 죄의 열매이고, 뱀의 유혹을 받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입니다. 물론 그 죽음은 뱀으로 표시된 사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위에서 예수님은 손과 발이 상함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사탄의 머리 위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이를 히 2:14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는 창 3:15절의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그림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실제적 형상일 뿐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서 이 땅에 오신 구원자이심을 천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내려 보시며 ‘γυνή(귀네), 여자여’라고 하신 것은 잉태시 천사로부터 들은 말씀의 성취임을 일깨워주신 겁니다. 동시에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당신이 바로 그 여자의 후손을 낳은 여자이십니다”라는 찬사를 드리는 선포였습니다.


이를 복음 안에서 발견한 사도 바울은 갈 4:4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예수님은 창 3:15에서 예언된 ’여자의 후손’으로서 뱀의 머리를 십자가로 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γυνή(귀네),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되고, 예수님에 이르러 구원이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선포였습니다.


더 많이, 더 높이를 추구하는 세속의 문화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가장 고귀하신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가장 전능하신 분이 가장 무능하신 모습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구유에서 시작하여 십자가로 완성하신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5. 여자와 교회


이 땅의 교회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간에 성경은 창세기의 첫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γυνή(귀네), 여자’의 이미지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따라 여자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여자의 후손에 의해 무너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구원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에서 묵시하듯이 여자를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γυνή(귀네), 여자’라는 말이 모두 19번 나옵니다. 계시록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어린 양’만큼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여자와 새 예루살렘은 음녀와 대조를 이루며 메시야를 출산합니다. 이때의 여자는 어머니 마리아가 아닌, 메시야적 공동체인 이스라엘이요, 하나님의 백성의 어머니로서의 시온을 상징합니다(갈 4:26). 그리고 이 여자는 궁극적으로 교회를 의미합니다. 죽음에 직면해서도 두려움과 맞서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공동체, 그 말씀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믿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한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듯이, 이 땅의 교회가 메시아를 해산하는 생명의 공동체, 복음의 산실로 존재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해산의 고통에는 2가지의 선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는 다시오실 주님의 산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시오실 메시야의 시대를 해산하는 고통과 고뇌가 이 땅의 교회된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2천년 전, 골고다 위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며 말씀하셨듯이, 다시 나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날을 준비해 가는 그리스도인으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수많은 차별과 불평등 속에서도 묵묵히 생명을 이어오게 한 이전의 어머니들과 현재의 어머니들과 미래의 어머니들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이 땅과 세계 곳곳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픔과 사회적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여성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비록 여자가 되는 것이 아직도 여전히 ‘위대한 모험’이지만, 이것을 바꾸고, 변화시켜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이들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이 여성들로 인해 숱한 세상의 문명이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성취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게 했던 한 여성, 한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던 것처럼, 이 땅의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위한 신부, 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비록 이 역시 위협과 고통을 동반한 일일지라도, 우리가 ‘위대한 모험’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됨을 포기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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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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