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7.26 움오름 주일 설교 -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요 19:23-25)









요한복음 19:23~25

23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설교문


1. 졸졸졸졸?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기록하는 방식은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골고다까지 가는 길에서 주님이 쓰러져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졌던 일을 생략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편에 강도들이 행악자였다는 것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도들의 설전과 한 강도의 회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더 집중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주동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제적 주체자는 예수님 본인이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신 인간 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서의 십자가형 선고와 집행 간의 간격이 너무 짧고, 다소 건조해 보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의도된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다 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인 23절 이하를 보면 다소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군인들이 죄수인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제비뽑는 부수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24절 하반절의 이 부분에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그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는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육화시키며 사셨던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주기도)’ 가운데 우리가 매번 기도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의 이 기도 속엔 이런 결단과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제가 통로가 되고, 도구가 되겠습니다.” … 주님께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기 위해 십자가를 수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우리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통로요, 도구가 되고 있습니까?


군인들이 옷을 나누고, 제비 뽑았다는 것을 기록하며, 성경에 예언된 것을 응하게 하려함이다는 이 부분은 또 다른 한 가지로 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당시에 겪을 때는 왜 그런지 이유도 모르고 겪었고, 영문도 모른 채 아파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안에 있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가장 지근거리에서 지켜봤던 제자는 요한이 유일했습니다. 이제 뒷부분에서 나올 십자가 아래 여인들과 더불어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또 십자가 위의 주님과 마지막 대화까지 나눴던 인물입니다. 그런 요한이 당시에 십자가 아래에서 군인들이 벌리던 그런 일들의 의미를 알았겠습니까? 아닙니다. 당연히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시엔 고통스러웠고, 몸서리쳤을 겁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 그랬었구나’라고 깨달은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성경에 …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는 부분은 요한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유년시절 많이 부른 이런 동요가 있습니다.


시냇물은 졸졸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

버들가지 한들한들

꾀꼬리는 꾀꼴꾀꼴


수많은 동요(*송이송이 눈꽃송이, *높고 높은 하늘이라, *산골짝의 다람쥐…)와 찬송가(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서 돌아오오…)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박재훈 작곡과 황금녀 작사의 <여름시내>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시냇물은 ‘졸졸졸졸’ 흐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 내리는 날 스위스 베르수아(Versoix Genève) 숲 속에서 눈 감고 듣던 시냇물 소리는 4부 합창을 넘어선 오케스트라의 향연이었습니다.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삶은 층이 다양하고, 결이 무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이리저리 겹치며 얼마나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때로 왜 그런지, 무슨 이유인지 모르고 걸어가야 할 때가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빛 삼고, 등불 삼아 지나다 보면, 종내에 ‘아…’라고 어렴풋하게 깨달을 때가 온다는 거지요. 물론 끝까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계획 아래 있다는 것을 신뢰한다면, 우리 또한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2. 제비뽑기와 감꽃


23절을 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동안 4명의 군인들이 그 아래에서 예수님의 물품을 자기들끼리 나누고 있었습니다. 4명의 군인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당시 백부장의 통솔 하에 Quaternion(콰테르니온)이라고 했던 4인 1조의 군인이 형 집행을 했을 뿐 아니라, 옷의 네 깃을 나누었다(4등분)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당시의 관습대로 사형수의 물품을 나눠가졌습니다. 천으로 둘둘 말았던 겉옷 같은 경우엔 인원수만큼 찢어 나누었습니다. 통으로 짜서 나눌 수 없던 속옷 같은 것은 제비뽑아 한 사람이 가지도록 했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뭐하러 죽은 사람 옷을, 불결하게 그것도 속옷까지 챙기냐고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일반 사람들(군인을 포함한)의 생활이 사형수의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챙길 정도로 빈곤하였다고 보시면 이내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자행된 이 탈취놀이 속에서 인간사회의 몰인정함과 인간성 상실의 모습을 목격합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도 고귀하지만, 한 인간이 이 땅에서 존재로서의 마지막을 다하는 순간 역시 숭고합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흉악범 사형수라 하더라도 마지막 사형집행을 함부로 하지 않고, 규정과 법에 따라 예식을 거쳐 집행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아래 군인들은 이러한 인간적 배려는 무시한 채 좀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갑부였습니까? 아닙니다. 갈릴리 촌동네 가난한 목수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니 뭐가 그리 값지고 귀한 것을 지니고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더 가지려 다투었습니다.


유년시절에 5월 중순이 되면 이른 아침 동네 골목골목을 지푸라기를 들고 돌았습니다. 끝을 묶은 지푸라기에 감꽃을 주렁주렁 꽃매달처럼 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이 맘때가 되면 또 다시 새벽같이 동네 골목을 돌았습니다. 성큼 자라 밤알 보다 더 커진 이런 감(실물을 보여드리며)이 비바람에 떨어진 것을 주워서 소금물에 삭혀 먹기 위해서 였습니다. 혹이나 다른 친구들이 먼저 주워갈새라 눈꼽 붙인 채로 이른새벽 대문을 나서던 그 시절이 사뭇 우습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김준태 시인이 <감꽃>이라는 시에서 어찌 이리 잘 표현했는지 가끔씩 이 시를 떠올릴 때마다 놀래곤 합니다.



감꽃 /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


4명의 군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그 숭고한 현장에서, 그것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익에 눈이 가려지니 봐야 할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들이 느껴지고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침 발라 돈 세기에 바빴던 그들은 인류구원의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과는 별개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같은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군인들을 감독했던 로마 백부장은 전혀 다른 체험과 고백을 했습니다.


막 15:39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숨지심’이 어떤 겁니까? 막 15장을 보시면 아파서 고통하시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시던 모습입니다. 거기엔 어떤 기적도 없고, 대단한 역사도 없었습니다. 단지 고통의 극한 지점에서도 조롱하던 이들을 용서하시던 모습이 있습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옆 강도를 긍휼히 여기시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만 있을 뿐입니다.


그 모습, 바로 그렇게 숨져가시는 모습을 보며 백부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을 향한 배려와 애정을 거두지 않던 그 모습 속에서 백부장은 하나님의 참 아들되심을 보았던 겁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의 삶의 현장엔, 우리 주변엔 어떤 이들이 아파했고, 괴로워했습니까? 또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세고, 무엇을 가지려 애썼습니까? … 그게 아니라면, 그 현장에서 우리는 어떤 인간됨을 보이며 숭고한 현장을 지켰습니까?



3. 십자가 곁의 여인들


조금 전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아래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로마군인들이 탈취물을 더 갖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음을 본문 25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나사렛 예수와 엮이면 모두가 역적이 되고, 제거의 대상이 될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게 두려워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모두 줄행랑쳤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때에도 여전히 주님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매우 의외일 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 그 사람들은 그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어머니’는 당연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이모’로 기록된 여인은 마 27:56이나 막 15:40을 보면 사도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베대의 부인이자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촌수로 보자면, 예수님과 사도요한은 이종사촌지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앞서 언급드린 마 27:56이나 막 15:40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작은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이외)와 요셉의 어머니입니다. 뿐만 아니라, 눅 24:18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글로바의 아내였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글로바’(Κλωπᾶς)라는 이름은 헬라식으로 읽으면 클로파스입니다. 클로파스는 클레오스(영광, 찬양, 명성)와 파테르(아버지)가 합쳐진 클레오파트로스(아버지의 영광)를 줄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성형 이름은 이집트 여왕으로도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입니다.


그러고 보면,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엠마오 에피소드는 신실한 부인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한 채 엠마오로 가던 남편 글로바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번외의 이야기입니다만, 이 땅의 남편들은 자신들보다 아내가 훨씬 영적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부인의 이야기에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십자가 곁에 함께 했던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일곱 귀신에 들렸다가 예수님께 나음을 입었던 여인입니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들은 이적과 표적이 일어나고 열두제자들이 주역이 되어 따를 때도 언제나 그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빛과 영광은 늘 남자들의 몫이었고, 그들은 뒷전이었습니다. 당시의 문화가 남성 우선주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십자에 달리신 그때, 그 자리에서는 달랐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버리고 떠나간 그때에도 그녀들은 당당하게 예수님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같이 주님의 주검을 닦을 향품을 갖고 무덤을 찾기도 했습니다.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녀들은 실패한 것 같이 보이는 주님의 죽음, 그 절망의 자리에서도 ‘두려움’에 맞서며 더더욱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8:6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죽음 같이 강한 사랑’이었습니다.



4.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묻지마 살인'이 늘어나고, 살인자들은 지능적으로 수사를 교란하기 시작하던 1970년대, 미국 FBI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과학부'를 신설했습니다. 범인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기에 연쇄살인범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생각과 심리를 분석해 여러 유형으로 나눴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범인의 특징을 추론해내는 '프로파일링'을 개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1991년의 영화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시종일관 짓누르는 주된 흐름은 두려움입니다. 연쇄살인의 희생자들인 여성들은 하나같이 두려움 속에서 그 어떤 보호도 없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범인을 잡고 보니 그 역시 월남전의 낙오병이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어린시절의 학대에 대한 트라우마와 두려움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영화 속에도 나오지만, 목장에서 기르는 양들은 늑대가 다가오면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지 않습니다. 무리 중 하나가 희생되더라도 침묵합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수천년 동안 가축화 되면서 순한 놈들만 살아 남았기 때문에 위험에 저항하지 못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위기가 다가 오면 쉽게 체념 해버리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서도 종종 ‘양들의 침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들의 침묵은 ‘두려움’을 대하는 양들의 방식이자, 두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정치를 한다는 이들의 많은 수가 실은 국민의 불안과 두려움을 이용해 힘을 가집니다. 그러기에 정치가 존재하는 한 절대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가장 좋은 통치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을 주도한 대제사장들이나 십자가 아래 군인들은 두려움과 공포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도망간 제자들은 그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절망했고, 침묵한 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주님의 십자가 곁에서 같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바라보던 여인들은 침묵을 깨고, 두려움에 맞선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강했기 때문에, 불굴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죽음같은 두려움 마저 넘어서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두려움이 상존한 이 땅, 이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상한 전염병, 이상한 장마, 여태껏 본적이 없는 나방과 벌레들의 창궐 등 이상한 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게 낯설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어떤 것을 잃어버릴지 모르기에 두렵고, 주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릴 위해 죽음까지도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이를 십자가 곁의 여인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했던 사도요한은 요일 4:18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시간 우리 모두의 이런 삶을 응원드립니다.


1)하나님의 말씀이 우릴 통해 이루어지는 삶.

2)두려움 앞에서도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

3)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 곁에서 의지와 힘이 되는 삶.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다양한 층과 무수한 결로 얽혀있는 우리 삶에 주님의 말씀이 등불이 되고, 빛이 되시길 구합니다. 삶이 녹녹치 않다고 해서 인간성 마저 상실한 채 몰인정한 삶을 질주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내일을 맞이하는 삶이지만, 그럴수록 더더욱 주님의 십자가 곁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두려움으로 두려움을 상대하지 않게 하시고, 죽음보다 더 큰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삶의 두려움 앞에 서는 믿음의 사람이게 하옵소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우릴 사랑하신 그 온전한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주님과 호흡하길 원합니다. 더불어 우리 주변 사람들의 아픔과 두려움에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양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함께 즐거워 하고, 함께 우는’(롬 12:15) 십자가 곁의 여인들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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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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