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7.19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쓸 것을 썼다"(요 19:17-22)

7월 26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9:17~22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설교문


1. 묶인 양과 ‘ad fontes(아드 폰테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년-1791년)가 열 여덟살이던 1774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라장조(D-Dur)의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 짧은 미사)는 쾨헬번호(Köchel-verzeichnis) 194번 입니다. 이 미사곡의 끝 부분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Agnus Dei, qui tollis peccata mundi, miserere nobis, dona nobis pacem”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평화를 내려 주소서)


모짜르트의 고백적 가사와 같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한계적 우리 인생의 은총이었습니다. 우리가 받을 죄의 댓가와 처벌을 대신하기 위해 미리 준비된 모리아산의 양과 같았습니다. 창 22:13에 보면,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고 했습니다. ‘걸려 있다’는 단어 아하즈(אָחַז)는 ‘붙잡다, 취하다, 연합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게다가 걸려있다는 동사 נֶאֱחַ֥ז의 형태가 수동태(니팔,niphal)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냥 우연히 걸려있던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양이 수풀에 걸릴 수밖에 없도록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양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도록 붙잡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바쳐졌던 그 산 위에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습니다. 모리아의 산의 숫양처럼 예수님을 속죄의 어린 양으로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어린 양은 ‘골고다’ (גלגלת), 수많은 죄인들이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던 바로 그곳에서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몸에 옮겨 대신 죽으셨습니다.


반기독교적 사상을 펼치거나 십자가와 부활에 의문을 제기하던 자유주의의 흐름에 맞서던 시기에 제기되었던 구호는 ‘ad fontes(아드 폰테스)’였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에 빗대보면,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근본, ad fontes(아드 폰테스)는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은총이 발화한 지점인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대신 다른 것을 묵상하고 싶겠지만,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생각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감춰지신 하나님’이라는 그 이미지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근본이 되고,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적인 삶의 출발점을 확립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본질과 목적, 그리고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의 삶에서 임재하시고 활동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형성합니다. 더불어 십자가는 우리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불투명한 창으로 남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흥미로운 사상과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시작되었던 곳,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인 ‘ad fontes(아드 폰테스)’로 돌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 고루해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이 보일지 모르나 십자가는 여전히 우리의 ad fontes(아드 폰테스)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속에서 나 같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붙잡고 계셨던 하나님의 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2.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탈리아의 군사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던 빌라도는 젊은 시절 로마식민지에서 야전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이후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이자 심복이었단 세자누스(Sejanus)의 추천으로 유대의 총독이 되었습니다(요세푸스의 기록에 근거). 총독의 임무가 식민지의 체제 유지와 안정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세금징수였습니다. 황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세금을 효과적으로 징수하느냐가 통치평가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했기에 빌라도는 유대의 지도자 특히 대제사장들 및 산헤드린 멤버들과 긴밀하게 협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한편으론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형을 언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맘 속엔 뭔가 모를 찝찝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의 재임시절 자신이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유대인을 십자가에 처형한 경험이 수차례 있었지만 나사렛 예수는 이전의 메시아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면서 다음과 같은 팻말을 붙이도록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가끔 카톨릭 관련 장소를 방문해 보면, 십자가 위에 ‘INRI’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I이, N엔, R에르, I이’ 로 읽는 라틴어(로마어)입니다. INRI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붙인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글의 라틴어(로마어) 첫글자만을 딴 것입니다. 설명드리자면 이렇습니다.


I: Iesus 예수

N: Nazarenus 나사렛

R: Rex 왕

I: Iudaeorum 유대인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았으나 앞서 설명드린바와 같이 유대지도층과의 긴밀한 협력관계 때문에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맘 속에 일말의 양심을 따라 죄명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적게 했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수는 자신의 죄명을 적은 나무판을 목에 걸고 십자가를 진채 사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명을 적은 나무판은 십자가 위에 못박아 어떤 죄로 인해 처형되었는지를 알렸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죄명을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도록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는 죽을 만한 죄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유대인의 왕을 유대인 스스로가 죽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명을 3개 국어(히브리, 로마, 헬라)로 적게 했습니다. 이 말들을 순서대로 한번 나열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어 - ישוע הנצרי ומלך היהודים

(예슈아 하나체리 베멜렉크 하예후딤)

로마어(라틴어) -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유대오룸)

헬라어 - Ἰησοῦς ὁ Ναζωραῖος ὁ βασιλεὺς τῶν Ἰουδαίων

(예수스 호 나조라이오스 호 바실레우스 톤 유대온)


언어는 달라도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빌라도가 히브리어 뿐 아니라, 당시 로마의 정치언어였던 라틴어에다가, 통상언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해서 죄명을 기록했던 것은 유대인들 뿐 아니라,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왜 처형되었는지를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위의 언어 중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죄목을 유심히 보니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ישוע הנצרי ומלך היהודים’(예슈아 하나체리 베멜렉크 하예후딤). 앞서 라틴어의 첫글자만 따서 ‘INRI’로 쓰듯이 히브리어 글자들에서 앞부분만을 발췌해 적어보았습니다. 자음으로 읽으면, ’요드, 해, 바브, 해(יהוה). 모음을 붙여 읽으면, ’여호와’(יְהוָֹה), 또는 아도나이( אדני׃ )가 됩니다. 구약성경에 7,040번 사용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십자가 처형으로 내몰았던 나사렛 예수는 ‘아도나이’(יהו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교리와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처형했다는 겁니다. 물론 빌라도가 이것까지 알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빌라도의 손을 통해 유대인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기록케 하셨던 겁니다.



3.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


분명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그 일을 한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분란의 싹을 없애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여겼을 겁니다. 그들은 이렇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 그 원인을 자신들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칭한 나사렛 예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 손으로 하나님을 처형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누군가를 처단하고, 희생양을 만드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탈무드에 이렇게 전해옵니다.


이스라엘 동쪽 마을 이야기입니다. 하늘이 막힌 것처럼 한 해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가뭄에 땅은 타들어갔고 온갖 채소와 곡식은 말라갔습니다. 마을 우물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다가 해답을 찾기 위해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랍비는 온 동네에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동네 사람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며 금식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랍비가 다시 말했습니다. “우리 힘을 합해서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을 빠짐없이, 철저히 준행합시다. 그러면 하늘이 감동해서 비를 내릴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온 동네 사람들은 성경을 구절구절 샅샅이 정독한 다음, 문자 그대로 죽기 살기로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가 지났습니다. 여전히 하늘에선 비가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말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 이유는 동네에 부정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란 말이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하늘이 노해서 온 동네가 심판받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 부정한 자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헤집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동네에 이혼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난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붙잡아 광장으로 끌고왔습니다. 그 고발 내용은 이혼한 남자가 전처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유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이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고, 관습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혼하면 남남이 되는 것이기에 서로 교제하면 안 되고, 지나다가 우연히 눈빛조차 교환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끌려 나온 남자는 전처에게 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돈을 주고 받는 일은 오직 하나, 돈으로 여자를 사는 행위, 즉 ‘매춘을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사람들이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돈을 준 이유는 매춘의 대가였고, 그것이 하늘을 노하게 해서 비가 오지 않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니 “처벌하라”는 동네 사람들의 광기 섞인 외침을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점점 소리는 커져갔습니다. 광장 한쪽에선 우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그동안 까맣게 속고 지냈다고 분통 터진다며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결박해서 광장으로 끌고나와 광장 중앙에 앉아 있는 랍비 앞에 던졌습니다. 그리곤 랍비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길 기다렸습니다. “랍비여 이 음탕한 자들을 벌하소서!” 소리가 점점 커졌습니다. 그 소리가 하늘에 닿아 하늘 보좌를 움직일 기세였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공정한 재판을 위해 조금 기다리라고 한 다음, 돈을 준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혼한 전처에게 돈을 지불했소?”


그때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랍비여,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는 돈으로 여자를 사지 않았습니다. 저 여인은 제 전 부인이고, 이전에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지금은 이혼해서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그런데 이혼한 후 이 여자는 가난해졌습니다. 직업이 없어서 돈을 벌 수도 없고, 아직 새로운 남자를 만나지 못해서 부양을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루끼니 연명하기도 힘에 부친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그저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었습니다. 그저 불쌍해서… 그저 불쌍해서… 이것이 제가 한 행동의 모든 이유입니다.”


광기 어린 군중에 둘러싸인 남자가 나지막이 자기 이야기를 끝내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율법의 한 글자, 한 글자까지 샅샅이 뒤지며 철저히 지킨다며 죄인을 찾아냈던 마을 사람들 덕분일까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을 행하며, 사람을 사랑으로 대했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온 동네사람들이 죄인이다고 정죄한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다들 죽여야 한다고 했던 그 남자, 율법을 어겼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진정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살았기에 비가 내린 겁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모두가 한꺼번에 재판관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도 옳고 그름을 살펴보기도 전에 양극단으로 나눠 이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아니 저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 하지만, 이제 우리 외부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고요히 우리 내면을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문제와 어려움의 원인이 진정 우리 밖에 있습니까? 진정 죽어야 하는 이는 다른 사람들입니까? 혹이나 의분에 겨워 소리치는 우리가 하나님을 처형하는 유대인은 아닌지요?



4. 내가 쓸 것을 썼다.


자신들이 처형케 한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빌라도가 쓴 죄명을 보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자칭’(self)이라는 말을 넣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2절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빌라도는 비록 유대인들의 시기와 압박에 못이겨 할 수 없이 나사렛 예수에 대한 처형을 명했지만, 일말의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질러대는 유대인들을 향해 냉소적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쓸 것을 썼는데, 니들이 왜 난리야?”


나름 용기를 내었지만, 그것보다 좀 더 냈더라면, 빌라도는 자신 뿐 아니라, 기독교의 초기 역사가 달라졌을텐데라는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아무리 그가 이것만은 고수하겠다고 소리쳐 보았지만, 그것은 결국 이기적 현실주의자였을 뿐입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는 빌라도의 말은 그의 도덕적 용기의 한계치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는 양심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쓸 것을 썼다"는 말은 괴로운 양심에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을지 모르나, 결국 그의 불행한 삶의 전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처럼 우리 모두는 지극히 자기중심적 현실주의자로 살아갑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내면에 걸림이 될 때에도 여전히 그 길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좀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만족한다면, 우리 또한 “내가 쓸 것을 썼다”라고 말한 빌라도와 무슨 변별됨이 있겠습니까?


5. 담을 뛰어 넘나이다


신학교 재학시절 읽었던 헨리 나우웬 (Henri Nouwen, 1932년-1996년)의 저작들이 제 시각을 많이 넓혀 주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라는 책은 군 장교생활을 통해 터득했던 “나를 따르라”는 리더십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3가지 시험을 통해 약함을 지닌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품고 사랑으로 함께 갈지를 보여준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중 첫번째 시험에 관한 내용입니다. 첫번째 시험은 “돌을 떡으로 바꾸라”는 유혹입니다. 나우웬은 이를 “현실에 충실하라”는 유혹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한계와 제한이 있는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현실을 보라”고 합니다. “현실적이 되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현실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들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한 자아 밖에는 줄 것이 없는 모습으로 이 세상에 서 있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연약함과 한계성을 지닌 우리와 더불어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쓸 것을 썼다” … 내 현실에서 볼 때, 할 수 있는 것만큼 했다고 위안 하시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만족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며 꿈꾸며 가시겠습니까? 한계 속에 사는 우리를 향해 다윗은 시 18:29을 통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벽과 같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성벽은 워낙 그런 존재입니다. 애초부터 뛰어 넘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성벽은 적이 뛰어 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현실의 문제와 직면한다는 뜻입니다. 이겨 나가고, 풀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지닌 문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아무리 해도 이것 밖에 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런데, 이것 한 가지는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 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내 앞에 있는 성벽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우리로 그 성벽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고로 우리는 곧 그 벽을 넘어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킨다며 하나님을 십자가에 매달던 잘못의 역사를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어려울 수록, 힘이 들수록 ‘ad fontes(아드 폰테스)’, 하나님의 사랑이 발화한 그 지점인 십자가로 되돌아 가길 원합니다. 십자가 속에 우릴 살리기 위해 아들을 붙잡고 계신 하나님의 그 손길을 보기를 원합니다.


현실에 고착되고, 현실에 함몰되어 “내가 쓸 것을 썼다”며 마무리 하는 적당히 괜찮은 사람, 그런 현실주의자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기에 성벽을 넘어서는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 인해 분노의 성벽을 넘게 하시고, 유혹의 성벽을 넘게 하시고, 자녀로 인해 겪는 아픔의 벽도 넘어서게 하시고, 현재의 상황과 절망의 벽도 넘어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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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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