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7.12 움오름 주일 설교 - "해골이라 하는 곳에 2"(요 19:17-22)

7월 19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9:17~22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설교문


1. 애도(哀悼)


죽음은 육체와 더불어 살아가던 한 인간의 세계를 종결 짓습니다. 지난 주중 이름 난 두 사람의 세계가 이 땅에서 종결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91세로 부르심을 받은 영화음악의 대가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 1928년 -2020년)입니다. 아마도 앞으로 더더욱 그의 음악이 고프고 그리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인권변호사요, 시민운동가 출신이었던 박원순(1956년 - 2020년) 서울시장입니다. 한동안 박시장에 대한 이야기는 각종 매체의 중심에 설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해 이상화 하는 것도 너무 나간 것이겠지만, 반면 악마화하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닐 겁니다. 개인적 오류와 한계를 지닌 인간이기에 빛은 빛대로 평가하고, 그림자는 그림자대로 정당하게 평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보다 앞서 그가 어떤 삶이었든지, 혹은 어떤 죽음이었든지 간에 한 세계의 종말을 맞이한 인간에 대한 예의는 마땅히 표해야 할 겁니다. 그 마땅한 예의라는 것은 바로 애도입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말처럼 한 죽음 앞에서의 애도는 우리의 인간됨을 실천하는 것이요, 인간됨의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2. 메릴 스트립과의 대화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을 아십니까?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와 <철의 여인, The Iron Lady>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을 뿐 아니라, 수차례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입니다. 수많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제게 참 인상 깊게 남았던 것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에 출연했던 모습입니다.


영화 뿐 아니라, 뮤지컬 연기에 있어서 탁월한 그녀를 며칠 전 만났습니다. 꿈에서 말입니다. … 그녀가 제게 질문했습니다.


“설교가 왜 그리 밋밋해요?”


원래 ‘밋밋하다'는 것은 생김새가 튀어나온 곳 없이 미끈하게 곧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질문했던 ‘밋밋하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였습니다. 생긴 모양이 화사하거나 다양하지 않고 두드러진 특징이 없이 평범하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설교가 왜 그리 밋밋하냐?”는 그녀의 물음은 “설교내용에 두드러진 특징이 없이 평범하냐?”라는 질문이었던 겁니다. 현존하는 연기파 배우의 지존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밋밋하냐고 말하니 당황스러웠지만,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매일 먹는 밥상 이야기까지 곁들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는 연기와 달라서 너무 잘 하면 안됩니다. 설교를 잘 하다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게 아니라, 설교자가 돋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이즈음 끝이 났고 잠이 깨었습니다. 근데도 꿈에서 나눈 대화가 생생했습니다. 대배우를 꿈에서 만났다는 생경함을 뒤로 하고, 설교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나눈 설교에 대해 단 한 주라도 만족해 본 적이 없기에 배우의 말이 더 신경 쓰였습니다. 저 자신을 향한 자기검열은 더 혹독하게 다가왔습니다.


우리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말씀하시는 분도, 또 그런 문화도 없었는데, 무슨 말씀이냐 하면, 예배 후에 귀가하시며 설교자에게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인사를 주시는 겁니다. 보통의 교회에선 요즘도 어르신들이 이렇게 인사 많이 하시지요. 이런 인사를 들으면 빈말 같아도 설교자에겐 격려가 될 겁니다.


그런데, 설교자에게 가장 힘이 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위의 경우처럼 “은혜받았습니다” 일까요? 아닙니다. 설교자로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볼 때, 아마도 그 말은 “지난 주일 그 설교가 이번 한 주간 내 삶에 이렇게 영향을 미쳤습니다.”라는 인사 아닐까요?


한 사람의 삶이 지난주일을 기점으로 그 전과 그 후가 달라졌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찬사요, 힘이 되는 말이 아닐까요? Before와 After에 차이와 변화가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설교를 하는 목적이요, 또 설교자의 존재이유 아닐까요? 꿈에서 만난 메릴 스트립을 통해 설교와 삶에 대해 이렇게 여러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해골 같은 우리 삶에 이식된 주님의 생명으로 어떻게 이 땅을 살아가야 할지, 어떻게 하면, 지난 주일과 다른 이번주일, Before와 After에 대해 묻고 또 물었습니다.



3. 한 조각 안개


20여년 전 ‘ㅈ나라’에 가서 가정교회 지도자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좀 더 나은 소통과 전달을 위해 성경구절을 그 나라말로 외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其實明天如何、你們還不知道。你們的生命是甚麼呢.你們原來是一片雲霧、出現少時就不見了


약 4:14의 말씀인데, 윗 문장을 직역하자면 이렇습니다. “실제 내일이 어떠한지 당신들은 아직도 모릅니다. 당신들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원래부터 잠깐 보이다가 곧 사라지는 한 조각 안개일 따름입니다”


야고보서가 왜 우리의 생명을 한 조각 안개에 비유했을까요? 생명의 한시성, 순간성을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왜 그것을 이야기 합니까? 자욱한 아침안개가 햇볕이 나면 금방 사라지듯이 우리 삶 또한 그렇게 사라질 것이니 허탄한 데 뜻을 두거나, 별 것 아닌 것 갖고 자랑질 하지 말고 주어진 오늘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어떤 의미,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안개같이 사라질 인생이기에 육체적인 삶을 위해 시간을 쓰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합니까? 육신 따로 영혼 따로 그렇게 구분짓고, 보다 귀한 영혼을 위해 살라는 뜻일까요? 만약 이렇게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는 또 다른 영지주의 일 뿐입니다. 짧기에, 너무나도 짧은 생명이기에 더더욱 가치있는 일에 쓰라는 의미 아닐까요?


지난주일 우리는 ‘해골이라 하는 곳에’라는 같은 제목으로 이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생명이 다한 자리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인간의 소망이 다한 자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가 되고, 하나님의 꿈이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됩니다. 정리하자면, 짧은 삶이지만,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고, 하나님의 꿈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개같이 짧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태도와 방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까요? 안개같이 짧은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태로 살아야 할까요?



4. 탈육신적 문화


동기(민경찬)목사의 추천에 의해 2주전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의 <성육신적 교회>라는 책을 구입해 읽어 왔습니다. 책은 오늘날의 문화를 탈육신적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탈육신(Excarnation)이란? 예수님의 성육신을 의미하는 Incarnation의 반대개념으로서 몸에서 피부와 장기를 기술적으로 제거하던(defleshing) 고대의 풍습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숭배가 목적이었다고는 하지만, 죽은 이의 몸에서 살과 장기를 모두 분리하듯이, 현대인의 삶도 정육가공장의 해체라인처럼 탈육신적인 문화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대로 행동하지만, 그 영혼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상태로 노숙자처럼 살아갑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상상과 현실이 분리되는 인격 분리의 현상, 인간 해체의 현상을 살아갑니다. 폭력적인 게임이나 자극적인 영상 매체에 대한 오랜 노출 때문에 같은 인간이 죽고, 고통 당하고, 해채되는데도 너무나 무감각해져 버렸습니다. 이른바 탈육신 사회입니다.


조금은 다른 뉘앙스이긴 하지만, 비대면을 권장하는 코로나 팬더믹(pandemic) 속에서는 상대의 피부가 닿은 손잡이에 닿는 것도 꺼림이 됩니다. 옷깃이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이제는 상대에게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타인은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마주보며 음식을 함께 나누는 존재가 아니라, 핸드폰의 작은 화면 속에서 보는 객체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러한 탈육신적 문화는 교회 안에 들어와 또다른 분리의 삶을 형성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분리된 삶이 아니라, 영혼과 육신을 분리하듯이 신앙과 현실을 분리하는 삶을 만들어 내고 말았습니다. 또한 탈육신으로 인해 우리의 신앙은 머리와 몸의 분리현상이 심각하게 일어났습니다. 마치 몸의 뼈 마디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해골만 덩그러니 남은 것처럼 ‘머리’로만 신앙생활을 합니다. 영혼을 중시한 나머지 종교와 인생,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키고, 몸으로 하는 예배, 의례, 실천은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성은 활발하게 작동하는데, 몸으로 그것을 살아내는 예배는 없는 현실을 살게 되었습니다.


5. 성육신적 문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 세워졌다는 것은 해골로 남은 사람의 몸에 새로운 육신을 더하는 은총입니다. 더이상 육과 영이 분리된 삶을 살지 말라는 신앙적 의미입니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머리로만 판단하고, 머리로만 살아가는 이성적 삶이 아니라, 몸으로 예배하고, 몸으로 찬양하며,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주동세력인 대제사장들과 산해드린 구성원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정신적 활동과 율법연구가 구원을 위한 구체적인 요건이라 믿었지, 몸으로 그것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가르침엔 차가운 교리의 칼만 있었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이야기는 논리적이었고, 타당했지만, 사람의 온기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도(道)를 이야기했지만, 그 길에 가기까지 걸어야 할 사람의 길은 부재했습니다.


이런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아주 가슴아픈 은유(metaphor)를 사용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칠한 무덤’(마 23:27)이었습니다. 안에서는 썩어 물이 나고, 냄새가 나는데도, 밖은 석회로 하얗게 칠을 해서 우아하게 보이도록 한 ‘회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속과 겉이 다르듯,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배제된 신앙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의 책 <성육신적 교회> 12장에 있는 내용이 마음에 찔림이 되었습니다. 탈지역화된 교회를 들며 프로스트는 교회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과 이웃의 삶으로 들어갈 것을 권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실제로 삶을 공유하며 이웃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 목회자는 교회가 있는 마을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 말이 더더욱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강남에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역과 별개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계획하고 준비하는 ‘취약계층 예술지원사업’은 우리교회가 있는 지역과 공존하기 위한 우리의 몸부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gift)을 가지고 우리 지역의 약함을 보듬고, 아픔을 치유해 가는 예수님의 길입니다. 생각으로만 살아가는 이른바 머리형 신앙인이 아니라, 영적인 몸(spirited bodies)으로 살아가는 전인적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6. 옆에 있는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지난 화요일 동두천에 가서 동기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전에 그 동기가 했던 표현에 의하면, “전임 목회자가 이렇게 분탕질 했던 교회가 잘되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는 말처럼 그는 참 힘들고 어려운 교회에 가서 3년째 잘 인내하며 교회를 바로 세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그 교회를 방문했으면 제가 뭘 해야 했겠습니까? 어떻게 목회해 왔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떻게 해가려고 하는지 등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마자부터 떠나오기 전까지 몇시간 동안 같이 방문한 동기목사와 ‘동성애 문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도 제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저도 동의하지 않았기에 계속 각자의 주장과 반론만 되풀이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되돌아 가야 할 시간이 되어 가벼운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실은 내일(월요일) 그 동기교회에서 모임이 있는데, 제가 참석할 수 없으니 먼저라도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와야지 하는 맘에서 갔는데, 전혀 다르게 시간을 보내고 귀가한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온 뒤 그 다음날 동기에게서 다음과 같은 문자를 받았습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는지요? 먼길 와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 잠시 어제 대화들을 생각하다가 문득 맘이 메마르는 것 같아서 이렇게 톡 드려요 … 함께 모여서 조금 서로에 대한 얘기들도 나눌 수 있었을텐데 … 처음부터 끝까지 동성애 이야기만 하고 그저 시간이 되어서 가시는 모습을 생각하다가 참 별로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성적정체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맘 아파하시는 분이 정작 함께 오늘도 대화를 하는 동료와 친구들에 대해서는 한마디 댓구도 없이 지나쳐가시는구나 …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참 존경하는 두분 목사님들이신데 의지하고 함께 바라보아야 할텐데 오히려 그런 맘이 사라질까 속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야기는 했는지 몰라도 하나님 이야기는 하지 않은것같아요. 마치 누가 더 성경을 많이 아는지 보라는 듯한 느낌이 들 뿐이었습니다. 그냥 말하지 않고 있으려다가 목사님에게는 말하고 싶었어요. …(이하 생략) …


이 문자를 읽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못하면서 미상의 불특정인에 대한 불타는 마음을 토로하던 몸없는 머리형 신앙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이야기하며 확고한 이념과 가치를 설파했지만, 정작 저는 육신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사도처럼 사랑을 이야기했고, 이웃을 말했지만, 실은 강도만난 이를 피해가던 도그마화된 종교인에 불과했던 겁니다.


……


지난주일에 이어 오늘도 ‘해골이라 하는 곳에 2’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며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몸과 분리된 탈육신적 그리스도인, 탈육신적 교회가 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성육신적 교회와 영적인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움오름가족님들을 향한 물음이기 이전에 저를 향한 질문이 됩니다.


점점 탈육신이 보편화되어 가는 인터넷 환경과 코로나 상황 하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는 진리를 몸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몸(spirited bodies)으로서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교회에 다니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지는 시절입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교회가 된다는 것은 또한 어떤 의미일까요?


몸과 영혼이 분리되고, 머리와 몸이 따로 따로인 세태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육신적 한계 속에서도 몸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영원한 것이 유한한 속에 이식된 삶을 아름답게 구현해 갈 수 있을까요?


가만히 앉아서 듣고, 앉아서 생각하고, 않아서 판단하는 이성비대증에서 벗어나 영적인 몸으로 잘 기능하는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먼 곳의 이데아를 이야기하기 전에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호흡하며 걸어가는 이웃과 친구로 살게 하옵소서.


그러한 삶을 위해 해골 같은 우릴 위해 ‘몸’으로 십자가를 감내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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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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