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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7.05 움오름 주일 설교 - "해골이라 하는 곳에 1"(요 19:17-22)

최종 수정일: 2020년 7월 7일









요한복음 19:17~22

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20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설교문


1.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


빌라도는 사람이 두려워, 잃어버릴 것이 염려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결과 그 자신이 심판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책임있게 사용하지 않고 떠밀려서 내린 판결의 결과였습니다. 어느 자리이건 간에 주어진 권한 만큼의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공정과 공익이라는 틀이 작동하게 됩니다.


‘책임’이란 단어를 영어로 responsibility라고 하지요. 한자를 파자하듯이 이 단어를 나눠보면, re-(다시, 뒤로, ~을 가져오는) + spon(약속하다, 계약하다) + ability(가능성, 능력)입니다. 누군가와 계약하며 서명했던 것을 이행하는 능력이 책임인 셈입니다. 약속된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힘이 책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책임과 관련해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단연 스파이더맨입니다. 우연히 실험실 거미에 물려 초인적 힘을 가진 한 아이가 그 힘을 이용하여 소위 ‘영웅의 길’을 걷습니다. 그렇지만 영웅의 길이라는 것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통제하고 조절하는 법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갖게된 엄청난 힘에 도취된 소년은 그것을 왜곡되게 사용합니다. 그 힘을 이용하여 사적욕망을 채우고, 자기만족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때 그 아이를 아버지처럼 양육해 왔던 삼촌이 이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강한 힘에는 강한 책임이 따른다”


그런데, 강한 책임이라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을 말합니까? 당연히 선하고 올바른 곳에 가진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곳에 쓸 뿐만 아니라, 가진 힘으로 누군가의 결핍을 해결해 주고, 필요를 채워주라는 부르심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자연신교이며 이성종교라고 할 수 있는 이신론(deism)은 이런 면에서 창조주의 책임회피를 이야기합니다. "신은 세계를 창조한 뒤에는 직접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기본사상 속에 이런 정신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마치, 시계 제작자가 시계를 만든 뒤 시계바늘이 멈출 때까지 간섭하지 않고, 보관해두는 것처럼 자연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자연계를 포함한 우주는 자연발생 메커니즘을 따라가는 것이지, 신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겁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의 책임회피요, 책임을 다하지 않는 방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범신론(Pantheists)에서 출발했을 뿐 아니라, 그 연장선에 있는 이신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고 증거합니다. 2천년 전 사람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책임을 다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분명 불의한 무리의 강요에 의해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은 그것을 ‘자기의 십자가’로 여기고 능동적으로 지셨습니다. 인간이 겪는 온갖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임에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책임을 끝까지 다 하셨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의 때와 다르고, 우리의 방법과는 상이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이 땅과 우리에 대한 책임을 다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부름받은 지금의 자리에서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있는 모습으로 존재할지에 대한 부분은 이번주일과 이어 다음 주일에 상세히 나누겠습니다.)



2. 해골이라는 골고다


빌라도로부터 권한을 양도받은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로마군병으로 하여금 사형을 집행케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두 죄수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예루살렘 영문 밖 사형장소로 향하게 했습니다. 주님은 당시 로마의 관행에 따라 양쪽 어깨에 십자가의 상판을 지고 양팔이 그곳에 묶인 채 처형 장소로 걸어가셨습니다. 이 십자가 상판은 대략 34~57Kg에 달하는 무거운 횡목이었습니다.

빌라도 관정에서부터 사형장까지는 대략 800m, 보통 1,300여보를 걸어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심한 채찍질에 만신창이가 된 주님의 상태로서는 버거운 길이었습니다. 그 처형장의 이름은 골고다(Γολγοθᾶ). 본문 요 19:17과 공관복음을 종합해 보면, 헬라어로는 ‘해골’을 의미하는 크라니온(κρανίον)이라고 불렸고, 라틴어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갈보리(Calvaria)로 불렸습니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의미는 모두 ‘해골’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왜 그곳이 해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에 황당한 설(아담의 유골이 있었다는 설)을 제외하면 대략 2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처형장의 지형이 해골형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역을 가든지간에 특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을 때 그 형상과 닮은 이름이 붙인 것을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되실 겁니다.


둘째, 그 장소가 예로부터 사형집행장으로 사용되어 여기저기에 해골들이 뒹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동의가 어려운게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 참형을 당했더라도 동서고금을 무론하고 시신은 수습해 매장해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유골이 나뒹굴고 있어서 해골이라 불렸다기 보다는 사형장으로 사용되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봅니다.


여하튼 어떤 이유에서 그곳이 해골이라고 명명되었든지 간에 주님께서 해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해골이 무엇입니까? 육체를 갖고, 육체로 이 땅에서 살던 인간이 수명을 다하고 남긴 마지막 유물이 해골입니다. 뼈를 둘러싸고 있던 살이 사라지고 뼈대만 남은 유골입니다. 특별히 해골이란? 몸퉁이를 잃어버리고, 몸과 분리된 머리가 모든 것을 소실하고 남은 최후의 잔존물입니다.



3. 골고다는 하나님의 시작점


인간이었지만, 인간됨을 잃어버린 해골, 몸과 함께 살았지만, 몸을 소실한 백골만 남은 죽음의 자리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더이상 미래가 없는 죽음의 자리에 다가오신 주님의 희망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겔 37장에 기록된 마른 뼈 골짜기의 환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강력하게 임하셔 그를 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골짜기는 살이 모두 제거되어 마른 뼈만 가득한 골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겔 37:3입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선지자 에스겔이 보기에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상태였기에 그는 그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에스겔의 대답을 들으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골짜기의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들을 수도 없는 죽은 존재, 그 잔존물들에게 선포한 메시지는 이렇습니다. 겔 37:4-6입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자 골짜기를 가득 채운 마른 뼈들이 연결되었습니다. 힘줄이 둘렸고, 살이 입혀졌고, 피부가 덮혔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생기가 그 속에 들어가자 그들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에스겔의 이 환상은 당시 바벨론의 포로 신세로 전락한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소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겔 37:11)고 탄식하던 그들을 향한 부활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를 선지자 예레미야의 메시지로 표현하자면 이러합니다. 렘 29:11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해골이라는 골고다는 인간의 소망이 끊긴 자리였습니다. 더이상 생명으로서 존재할 수 없는 육신이 다한 인간의 한계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절망의 자리, 한계의 자리에 주님의 십자가가 세워졌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새롭게 일하신다는 겁니다. 절망스런 그곳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미래와 희망이 시작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소망이 끝난 자리에서 일하십니까? …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젊은 날의 아브라함이 아닌, 100세의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이 태어나게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이집트 왕궁의 왕자로서의 모세가 아닌, 미디안 광야의 무명의 양치기로서의 모세에게 찾아오셨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무엇을 이루면 그게 자기가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능력이 다하고, 희망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이루시는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꿈이 끊긴 자리에 서 계십니까? 더이상 소망이 보이지 않는 지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꿈이 다한 해골의 골짜기는 하나님의 꿈이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4. 로마의 두 장소


2010년 유럽을 떠나오기 전 여름휴가를 이용해 부모님을 모시고 이탈리아를 다녀왔습니다. 난생처음 부모님을 모신 여행이었기에 어떻게든 좀 더 많이, 좀 더 좋은 것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한편으론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정말 잘 다녀왔다고 생각하는 두 장소가 있습니다.


첫번째 장소는 로마시내에서 대사관 건물과 고급 호텔이 많은 바르베리니 광장(Piazza Barberini) 근처에 그 거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푸친 수도회의 성당(The Capuchins Ossuary)입니다. 이 성당이 고급스런 거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유럽의 수많은 성당 중에서도 특이하고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당의 별칭인 ‘해골성당’과 관련이 있습니다.


1626-1631년에 Antonio Casoni에 의해 고안되고 만들어진 이 성당에는 총 6개의 방이 있습니다. 그 중에 5개의 방에 1528년에서 1870년 사이에 사망한 4천여명의 수도사의 시체에서 기증된 뼈들로 독특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 뼈의 전시가 아니라, 사람의 뼈로 데코레이션을 했다고 보일 정도입니다. 사람의 두개골과 넓적다리로 만든 아치가 있는가 하면 수도복을 입은 해골들이 십자가를 끌어안고 있고, 천정이나 벽은 크고 작은 사람의 뼈를 교묘하게 맞추고 이어서 장식을 해 놓았습니다. 심지어 샹들리에 조차 뼈로 장식되어 있는 이곳은 마치 호화로운 아라베스크 무늬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 방의 출구 앞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요, 우리의 현재는 당신의 미래다”

(What you are now, we once were; what we are now, you shall be.)


죽음을 생각하며, 주어진 오늘을 살라는 말입니다. 섬뜩한 해골의 방이었기에 결코 좋은 관광거리가 할 수 없었지만, 해골로 존재하는 분들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라는 그 메시지의 무게와 의미는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부모님께 미안하면서도 의미 있었던 장소 역시 죽음과 관계된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로마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기인 주후 64년에서 67년 사이에 사도바울이 참형당한 곳입니다. 이곳은 로마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렐리아 성(Mura aureliane) 밖으로 나가 에우르(Eur) 방향으로 5km 정도 가면 도달합니다.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참수터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에 길게 솟아있는 유칼립투스 가로수였습니다. 피 비린내를 휘산시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심겨왔던 그 나무들은 아득한 피비린내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사도바울이 참수당한 후 목이 바닥에 세 번 튀었는데 그 자리마다 물이 솟아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세 개의 분수’라는 뜻을 지닌 ‘트레폰타나’(Tre fontana) 수도원을 지었습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사도바울은 그의 잘난 이력들을 모두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그리고 35년 동안 무려 2만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하며 그가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 동력은 한 명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정이었고, 그것은 곧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끝에 그는 목이 잘려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당시엔 누가 보더라도 어리석어 보였고, 허무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역사와 신앙은 그것이 사도바울의 열망이 이루어 지는 자리였으며, 그로 인해 새로운 하나님의 꿈이 펼쳐지는 소망의 시작이었다고 증거합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2년 동안 감금생활을 하던 때(61-63년)인 A.D 62년경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빌립보서 1:20-21은 그의 열렬한 소망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해골성당’이라 불리는 카푸친 수도성당(The Capuchins Ossuary)이나 사도바울의 참수터인 트레폰타나(Tre fontana) 수도원은 모두 인간의 소망이 끝난 죽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들은 여타의 죽음의 자리와는 확연히 다른 아우라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에 우리의 죽음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보여주는 실험실이었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소망이 끝난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미래와 희망이 시작하는지를 보여주는 표본실이었습니다.


5. 남은 시간을 어떻게?


이 사실을 믿고 기억한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자세로 우리 생의 일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매주 설교원고를 나누고 리뷰하는 모임의 멤버가 13명에 이르렀습니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고 리뷰를 통해 깨닫고 얻는 것이 많습니다. 지난주 한 멤버(다운교회 석정일 목사)가 야고보서를 끝내고 베드로전서 1장을 시작하며 베드로전서의 수신자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였다는 것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여관이나 호텔에서 묵을 때 방이 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어도 그것을 고치려고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투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잠깐 머물다 떠날 곳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저와 여러분이 만약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면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세상이 저와 여러분의 목적지가 아니고, 본향이 아니라면, 그저 살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인용하며 다른 한 멤버(포천중리교회 송영윤 목사)가 이렇게 댓글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대로 아멘! 나는 어디에 에너지를 쏟는지 생각해 봅니다.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여럿인데, 하루하루 그냥 시간이 흘러갈 때가 많습니다. 작가 조정래님은 글을 쓰기 위해 문단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절제하셨다는데…”


이 원고와 리뷰를 읽고 또 저의 리뷰를 남기며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장나온 나그네로 회사업무(사명)에 삶을 쏟고 있는지, 아니면, 관광에 시간을 쏟고 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제 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이 맘에 스며들었습니다.


“괜찮다. 나는 내 아버지보다 10년 더 살았다. 여한이 없다.”


제가 만약 제 아버지처럼 아버지보다 10년을 더 산다면, 앞으로 30년 남았습니다. 50년이 지나고 30년이 남은 겁니다.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적습니다. 이게 마음에 다가오다보니 이런 생각들이 계속 머물렀습니다. ‘이 30년을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면 이 30년을 더 압축되게, 더 생산성 있게 살아가지?’


귀하신 움오름가족님들~

이 땅에서의 여러분의 삶은 얼마 남은 것 같습니까? 그 남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다 골고다 위에 서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다하고, 희망이 저문 자리에서도 일하시는 하나님~

골고다는 하나님의 책임이 작동하는 자리요, 해골의 골짜기는 하나님의 꿈이 시작하는 새로운 출발점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단순히 세월을 사는 것을 넘어 우리 생의 골고다 위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증거하는 실험실 되기를 원합니다.


더이상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근근이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메마른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기는 불어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믿음의 표본실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주어진 우리의 삶이 얼마이건 간에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삶을 세워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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