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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6.28 움오름 주일 설교 -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요 19:14-18)

최종 수정일: 2020년 6월 29일









요한복음 19:14~18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17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18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설교문


1. 제 육시 -요한복음의 시간


나사렛 예수에 대한 무죄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민란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도저히 무죄를 선고할 수 없었습니다. 재판은 공의롭게 법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걸고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에 그는 군중이 요구하는 대로 로마형벌의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그 시간을 요 19:14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형을 명한 때는 유월절의 준비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유대력으로 정월 15일이니, 이 날은 1월 14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날 우리들의 날짜로 보면, 1월 15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날짜개념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루를 해질녁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해지기 전까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서의 시간은 오늘날 우리들의 시간과 같은 로마식 시간을 따르고 있습니다. 오전 12시간, 오후 12시간 해서 하루 총 24시간제입니다. 이와 달리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에서 사용하는 유대식 시간은 표기된 시간에 ‘+ 6시간’하면 오늘날 시간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요한복음도 공관복음서와 동일하게 유대식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요 6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으러 우물로 온 시간인 제 육시에 ‘+ 6시간’을 적용해서 ‘정오’(해가 뜨거워 아무도 없는 시간)에 왔다고 합니다.


나아가 오늘 본문의 시작인 요 19:14의 제육시도 6 시간을 더해서 정오에 빌라도가 십자가 판결을 언도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봐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막 15:25은 십자가 처형 시간이 유대 시간으로 제 3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보면, 오전 9시경입니다. 그리고 공관복음(마 27:45-50, 막 15:33-41, 눅 23:44-49)에서 공히 밝히고 있는게 예수님의 운명시간입니다. 이들 복음서에 의하면, 오늘날 시간으로 12시 -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덮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신 후 운명하셨다(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시간을 유대식으로 ‘+ 6시간’을 해서 정오에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선고했다고 보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요한복음의 시간을 봐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요한복음이 기록된 AD 85 - 90년 즈음에 헬라 로마세계의 모든 이들을 위해 복음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이 굳이 유대식 시간을 쓸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요한복음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런 표현들입니다.


요 2:6에서 돌로 만든 항아리의 용도를 설명하면서 ‘유대인의 정결예식’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요 11:5518:28에서는 유월절 성결예식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독자가 유대인이라면 굳이 그렇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않는다’는 해설을 덧붙였습니다(요 4:9). 유대인의 명절들에 굳이 ‘유대인의 유월절’(요 2:13, 6:4, 11:55)이나 ‘유대인의 초막절’(요 7:2)과 같이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수전절에 대해서는 아예 자세히 설명한 것(요 10:22)을 덧붙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유대인의 종교, 사회문화적 관습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독자가 유대인이 아니라, 비유대인이다 보니, 이런 독자들은 하루의 시간을 로마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시간 개념보다는 로마식 시간법을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2.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다


위와 같은 시간개념을 갖고 요 19:4을 보면, 십자가형을 선고한 시간이 새벽 6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오전 9시가 되기 까지 3시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예수님을 비롯해 다른 2명의 강도에 대한 십자가형 준비와 집행장까지의 이동 등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눅 23:6-12을 보면, 그 전에 헤롯 안티파스(헤롯 대왕의 아들)에게 예수님을 보내 심문케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던 헤롯 안티파스가 나사렛 예수의 출신지인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B.C 4년 - A.D 39년)이었기 때문입니다. 헤롯 안티파스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십니까? 이 사람이 바로 이복형제의 아내(헬로디아)와 결혼한 것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비판을 받았다가 후에 세례 요한을 참수했던 사람입니다.


그 후에 보면,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줄 알고 매우 근심하며 궁금해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확인하고 싶어 이것저것 물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일절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헤롯 안티파스를 예수님은 이전에 여우라고 부르셨는데, 그만큼 사람이 영악했고, 자기이익에 밝았다는 뜻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헤롯 안티파스에게 심문토록 보냈던 이 사건을 기록하며, 누가복음은 한 문장을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눅 23:12입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헤롯과 빌라도는 그들이 처한 위치가 좋은 관계일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은 비로마인으로서 로마가 임명한 식민지의 분봉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옥상 옥인 로마총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이해관계가 상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총독과 현지 출신의 갈릴리 분봉왕이 나사렛 예수를 죽이기 위해 손을 잡았다고 누가복음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실은 이런 일들이 성경 속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의 세태에서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일례로 우리나라 국회를 보십시오. 21대 국회가 개원했는데, 1달이 다가도록 원구성도 못한 채 서로 극대치를 하고 있습니다. 20대 국회 때는 더 했지요! 근데, 자기들 연금 올리고, 월급 올리는데는 여야 구분없이 모두들 찬성하며 일사천리로 통과시킨 전력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서로 죽느니, 사느니 하다가도 카메라가 없는 사각지대에서는 “형님, 동생”하면서 시민들을 기만하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그래도 그 중에 정말 나라와 시민들을 위해 자기 삶을 던지는 몇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정치의 자리에서만 일어나겠습니까? 종교의 자리에는 없을까요? 이는 따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인지하는 바입니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의 자리, 일상은 어떻습니까? 이익을 위해 불의와 손잡는 일이 없습니까?


진실을 밝혀야 할 사건에 대해 책임있는 사람들과 기관들은 빌라도같이 책임을 회피하며 손을 씻지 않습니까? 동시에 비록 악인이고 원수라도 서로 뜻만 통하고, 이해관계가 맞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가 되지 않습니까? 만약 혹이라도 우리 삶이 이런 류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있다면,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친구가 되었던 헤롯과 빌라도의 끝을 생각하며 우리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하겠습니다.



3. 도그마의 노예


본문 16절을 보시면,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에’로 번역된 원문의 단어 Τότε οὖν(토테 운)은 직역하면, ‘그때 그러므로’입니다. 이를 NIV성경은 ‘finally’(결국)로 번역했습니다. 의와 원칙이 없으면 이처럼 어떤 것에 떠밀려서 ‘결국’이 되어버립니다. 나의 삶이고, 나의 길인데도 불구하고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못한 채 떠밀려서 합니다. 내 삶인데도 남이 시켜서 하게 되고, 결국 남이 내 삶을 결정짓게 됩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주어가 생략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가 누구인줄 압니다. 당연히 빌라도입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권한을 자랑하면서도 그 권한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그들’(대제사장의 무리)에게 떠밀려 권한을 양도했습니다. 당신들의 뜻대로 하라고 예수님을 넘겨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17절과 18절의 주어가 모두 ‘그들’로 바뀌었습니다.


17절은 사형집행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맡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맡았다’고 번역된 단어 παραλαμβάνω(파라람바노)입니다. 이 단어가 이전에 요 1:11에서 이렇게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위 문장에서 어떤 단어가 παραλαμβάνω(파라람바노)일까요? ‘영접하다’라는 단어입니다. 2천년 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의 아들이 ‘자기 땅’에 오셨지만, παραλαμβάνω(파라람바노),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그 아들을 παραλαμβάνω(파라람바노)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영접, παραλαμβάνω(파라람바노)했습니까? 15절에 그들이 소리치며 말했던 바와 같이 ‘없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존재를 십자가에서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들여다 보면, 사도요한이 의도적으로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그들이 “없이 하소서! 없어 하소서!”라며 반복해서 외친 단어가 ‘제거하다, 없애다’의 뜻을 지닌 αἴρω(아이로)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교리와 신념에 맞지 않은 존재와 더불어 함께 존재해 가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존재는 오로지 제거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도그마(dogma)화된 신앙의 폐해였습니다.


원래 도그마(dogma)라는 말은 기독교의 교리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점차 그 의미가 변질되어 ‘독단’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교의, 또는 교리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굳어진 도그마 속에 어떠한 이성의 비판이 허용되지 않으며 무조건적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정된 원리에 사로잡히면 원리주의자가 되고, 이데올로기 신봉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남이 만들어 놓은 이념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며 상대방을 적으로만 간주해 버립니다. 불교국가인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운 조선이 억불숭유 정책을 쓰며 유교 이외에 그 어떤 이념도 허락하지 않은 것을 보십시오. 극단적인 도그마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도 사실과 이치에 대한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채 특정 이념이나 사회집단에 구속된 도그마화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따르고 있는 교리를 위해 신앙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조차도 버린 채 죽자고 싸웁니다. 인애와 공의가 내팽개쳐진 그 속 어디에 주님이 머무실 자리가 있겠습니까?



4.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받드는 교리와 가치를 위해 나사렛 예수를 제거, αἴρω(아이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αἴρω(아이로), 제거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αἴρω(아이로)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다는 의미입니다. 참 상반된 모습입니다.


요 15:2을 나눌 때 αἴρω(아이로)라는 단어가 제거하다라는 뜻이 있지만, 복음서에서 많은 경우 ‘(십자가를) 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앞서 ‘영접하다’라는 뜻을 지닌 παραλαμβάνω(파라람바노)에서도 그러하였지만, 사도 요한은 같은 단어를 갖고서도 전혀 다른 목적과 방향을 갖고 살아간 대제사장 무리와 예수님의 대조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모습을 통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짙은 그림자입니다. 신앙을 가진 이들 속에 자리한 도그마의 노예된 집단적 폭력성입니다. 반면, 주님 속에 내재한 포기하지 않은 사랑입니다.


요 19:17에 보니 이런 주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더 세밀히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17절을 다시 함께 봉독해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육체적 아픔을 묘사한 공관복음서와 달리 많은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십자가형 집행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 인간 구원을 위한 메시야로서의 길을 강조하는데 더 무게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17절에 표현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라는 표현은 어느 복음서에서 단 한 차례도 사용되지 않은 요한복음만의 유일한 표현입니다.


죄와 관계없는 분께서 로마 형벌 중 가장 치욕스런 십자가와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를 ‘자기의 십자가’로 여기셨다는 겁니다. 비록 대제사장의 무리들의 강요와 총독 빌라도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지만, 주님은 그것이 당신께서 마땅히, 당연히 져야 할 ‘자기의 십자가’로 인식하셨다는 겁니다.


이 장면은 마치 창 22:6에 자신을 불 태울 장작을 맨 채 모리아산을 오르던 이삭을 연상케 합니다. 모리아산의 번제, 그것은 분명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불 태울 장작을 지고 산을 오른 청년 이삭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은 결국 아들 이삭의 체험적 고백이 될 수 있었습니다.


5.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사랑할 수 있는 용기


그런데, 우리 삶에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지속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두번은 힘써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지속적일 때 여간 힘들지 않음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한 두번은 모두 고민해 보셨을 겁니다.


일례로, 안정적인 근무여건과 방학 등으로 인해 교사직이 인기가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 수록 학교환경이 참 힘듭니다. 많은 선생님들이 이 길이 진정 내가 가야할 길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현재의 학교 상황입니다. 오죽했으면 선생님들의 선생님이라고 불려지는 파커J.파머 교수가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고 했겠습니까!


“교사가 가르침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은 가슴 아픈 작업입니다. 가르침의 용기는 마음이 수용하도록 요구당하는 그 순간에도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 용기입니다.”라며 그 용기를 포기하지 말 것을 권했겠습니까!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배움의 시기에 가르침의 용기를 가진 선생님들 덕분에 결정적인 삶의 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가르침의 용기란? 결국 한 존재에 대한 포기하지 않음입니다.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그 용기 덕분에 학생 누군가의 삶 속에 있는 진실된 곳이 발견되고, 탐구되고, 소유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루기 위한 뜻이 있어 힘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없어 오직 나 혼자 만이라도 버텨야하던 때도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내 몫의 십자가만큼은 끝내 지고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그만 되었다고 하늘이 하실 때까지 그렇게 끝내 버텨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양육하고, 가르치기 힘드시지요? 누군가를 끝까지 품고 사랑하기 힘드시지요? 하루에도 수십번 그냥 그만 둘까? 떠나 버릴까? … 별별 생각이 다 드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못난 나무’되어 그 산을 지켜가셨으면 합니다. 비록 천리를 가는 향기는 없다 하더라도, 폼나고 빛나는 삶이 아니다 하더라도 잡은 손 놓지 말고 끝내 함께 걸어가셨으면 합니다. 그 소망이 있는 한 우리 손을 꼭 잡고 계신 주님께서 그 소망을, 그 사랑을 이루어 주실 겁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게 아니어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이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로운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 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 백일홍 > -도종환



화무십일홍 (花無十日紅)이라며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하지만, 백일 동안 변함없이 붉은 꽃이 있다는 것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한 꽃이 백일 동안 붉은 것이 아니라, 지고 떨어지면 또 피우고, 또 피워서 백일 동안 환한 꽃 피운다는 사실에 더 놀라왔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그러셨지요? 말도 안되는 십자가였지만, ‘자기의 십자가’로 생각하시며, 사랑하기를 끝내 내려놓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그 길을 완주하셨지요? 사랑하기도 쉽지 않고, 살아내기도 만만치 않은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사랑하는 용기있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드는 줄 알면서도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거듭나고, 또 거듭나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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