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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6.21 움오름 주일 설교 -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요 19:10-16)









요한복음 19:10~16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설교문


1. 이기적 선민주의


유대인에게 있어 최대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설명절을 합친 것과 같이 매우 의미있고도 중요한 날입니다. 이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시작되기 전 나사렛 예수와 관련된 모든 일을 끝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새벽을 마다하고 빌라도의 관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의 집에 발을 딛으면 그들의 정결법에 의거해 부정케 되기에 그 안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부정케 되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에 무례하게 관정 밖에서 총독 빌라도를 불러 냈습니다.


종교가 이처럼 테두리 밖의 사람을 향한 배려와 사랑을 잃을 때 보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인이 나만 거룩해 지면 된다는 종교적 이기주의와,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선민적 나르시시즘(자기도취)에 빠져들 때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행태였습니다.


지난주중 한 교회에서 46년을 목회하고 은퇴하신 목사님(동교동교회 음동성 목사)과 2번째 만남을 가졌습니다. 대화 중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노아 때와 같이 8명만 구원받는다면 나는 그 8명 속에 들어갈 자신 없습니다. 또한 8명만 천국가고 나머지는 모두 지옥불구덩이에 간다는 신앙을 나는 믿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노아때 불순종했던 영혼들에게까지 미쳤는데도, 현재 기독교 신앙은 자꾸 자기들만을 위한 독선적 구원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 네, 받습니다. 그런데, 믿고 구원받아 바로 천국가면 되는데, 왜 그 후에 많은 시간을 이 땅에서 살다가 갑니까? … 우리가 믿는다는 예수님, 바로 그분의 인격과 품성에 물들어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물듦을 통해 테두리 밖의 사람들에게도 구원이 흘러가고 전해지기 위함입니다. 그 결과 선민이라는 자의식과 특권의식을 넘어 보편적 사랑과 섬김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새벽부터 자신을 깨웠음에도 불구하고 관정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는 대제사장 무리로 인해 빌라도는 분주히 관정 안과 밖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원고와 피고의 주장을 모두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시에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원고측의 환심을 사기 위해 피고를 본보기로 고문하며 심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군중이 소리치는 나사렛 예수의 죄목,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달리 고대 로마인들은 신들의 현현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혹시나 진짜 신의 아들이면 어떻게 하나라는 강한 두려움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빌라도의 질문에 어떠한 말로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정무적 판단에 의해 빌라도의 마음이 기울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예수님 본인이 십자가의 길인 ‘자발적 타살’의 길을 결심하셨기 때문입니다.



2. 권한의 출처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한편 이해되지 않았던 빌라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답변을 재촉했습니다. 요 19:10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권한(ἐξουσία, 에크수시아)’이라는 말을 축으로 대구를 이루는 두 문장을 나란히 사용하여 자신의 권세를 과시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생사여탈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일면 협박조로 들리기도 하지만, 로마의 제5대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는 그만한 권한이 실제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빌라도는 결코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면서 나사렛 예수를 두둔하거나 살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권한의 크기와 정도를 과시하는 그의 말은 무죄한 시골청년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권세 앞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는데 따른 분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권한을 강조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확연히 떨어집니다. 특권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식 속엔 당연히 공감능력이 결여될 수 밖에 없기에 타인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착취하려 합니다. 나아가 심할 경우엔 자신에 대한 과도한 추종과 숭배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권한을 내세우며 자신의 말에 따르기를 바라는 빌라도의 말에 예수님이 침묵을 깨고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빌라도가 힘주어 2번이나 ‘권한(ἐξουσία, 에크수시아)’이 자신에게 있다고 강조했지만, 예수님은 그 권한의 출처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권한이라는 것이 너의 것, 너의 소유가 아니다고 하십니다. 권한은 위에서 주시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빌라도와 예수님의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빌라도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권한이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면, 결코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겁니다. 그 권세와 능력으로 충분히 누리며 군림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고통과 치욕의 그 길을 걸어 가셨겠습니까? 그것은 당신께 주어진 것들이 위로부터 왔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맡겨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권한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으신 겁니다. 그러고 보면, 공생애 시작시 겪었던 3가지 시험(마 4, 막 1, 눅 4)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어진 권한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것”


한때 최측근이었던 이들의 배신과 폭로를 통해 점점 지지율이 떨어져 가고 있는 트럼프는 재선이 안될 경우 그와 그의 측근들은 사법적 심판을 받게 될 겁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체질개선을 하지 않는 한 지난 세기에 이어 누리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머지않아 상실하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위에서 주신 권한의 크기만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그 권한이 자신들의 것, 자신들의 소유라고 여긴 결과입니다.


사람이 겪는 많은 갈등과 불행의 근원은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데서 비롯됩니다. 저녁에 퇴근해선 낮에 입었던 정장이든, 근무복이든 벗습니다. 한때 내 것처럼 보였지만, 내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생의 저녁이 되면, 낮 동안에 입었던 육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겁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시간이 우리의 영원한 권한이 아니라, 영원하신 분으로부터 잠시 맡겨진 것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사용해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넘겨준 자의 더 큰 죄


빌라도가 과시한 권한은 그의 소유가 아니라, 위로부터 잠시 맡겨진 것이었습니다. 이를 착각하여 한시적으로 맡겨진 권한을 마치 자신의 고유하고도 영원한 권한인 것처럼 오용한 빌라도의 죄는 단연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빌라도에게 그렇게 하도록 조장한 유대 무리들의 죄가 더 크다고 밝히셨습니다.


실행범도 처벌을 받겠지만, 교사범에게 주어질 형벌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눈은 결과에 맞춰 있지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심판의 초점은 결과보다도 원인과 동기에 조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잠 21: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동일한 장면을 기록한 마 27:24-25은 십자가 판결의 원인자가 누구인지를 밝힌 빌라도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23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절: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는 빌라도의 말을 듣고 유대군중들이 이렇게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마 27:26입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라고 외친 그들은 그 결과가 얼마나 혹독하고 참담할지 알기나 하고 소리쳤을까요? …


콜로세움(Colosseum)을 건축한 것으로 유명한 베스파시우스가 서기 69년 로마의 새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 안정을 위해 유대 반란을 확실히 진압할 목적으로 4개 군단(1개 군단 4,200명)을 편성해 아들 티투스를 군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70년 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4개 군단이 예루살렘 성벽 앞에 진을 쳤습니다. 봉쇄작전으로 인해 고립된 예루살렘은 시간이 흐르면서 지옥으로 변해갔습니다.


마침내 로마군의 끈질긴 공격에 성벽 한 귀퉁이가 무너졌고, 군인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시가전이 벌어졌고 예루살렘 성전도 불에 타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화려했던 예루살렘은 유령의 도시로 변했고, 지금처럼 ‘통곡의 벽’이라는 조그마한 잔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어 2천년을 유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손들에게 피의 값을 돌린 저주의 결과였고, 무죄한 주님을 십자가로 내몰았던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엔 수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 현상과 결과를 보며 대책을 구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잘잘못을 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일어나는 일의 근저엔 원인이 있고, 과정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의 내면의 동기에 대해서는 돌아볼 줄 아는 겸허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4.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예수님의 실체에 대한 두려움이 들던 차에 위로부터의 권한과 넘겨준 죄에 대해 듣던 빌라도는 나름 예수님을 풀어주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유대인 무리는 더더욱 악을 쓰며 이렇게 위협했습니다. 13절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어느 나라를 무론하고 왕정치하에서 가장 큰 죄는 반역죄였습니다. 이 죄는 많은 경우 반역을 꾀한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족과 일가친척들까지 죽임으로써 후한을 막을 정도로 대역죄로 간주되었습니다. 유대 무리들은 만약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를 풀어주면 바로 이 반역죄의 가담자가 된다고 협박했습니다. 15절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아무리 목적하는 바가 있고, 이루고 쟁취할 목표가 있더라도 사람이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철학이 있어야 하고, 지켜야 할 의와 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품과 격을 갖추게 됩니다. 만약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되는대로 말하고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자 한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습니까? 더군다나 한 나라의 정신세계를 책임지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대제사장이 원칙도 없고, 신앙적 철학도 없이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게 어디 대제사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제사장이기 보다는 아무런 역사의식도 없이 그저 권력에 눈먼 정치협잡꾼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종교인이 신앙에 기초하지 않고, 위계와 권력에 기생하는 곳엔 어떤 영적 각성도 자유함도 존재할리가 만무합니다. 종교와 신앙이 밥벌이지 이게 어디 교회이고, 신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유대 군중의 협박과 대제사장들의 위협에 정신이 번쩍 든 빌라도는 얼른 최종판결에 이르고자 합니다. 더이상 방치했다가는 자신의 미래도 몰락할 것이라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엄습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요 19:13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 나가 돌을 깐 뜰 앞에 세운 뒤 판결을 내렸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앉다"라는 헬라어 동사 καθίζω(카시조)가 자동사인 동시에 타동사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좀더 풀어 설명드리자면, 1) 빌라도가 재판하기 위해 스스로 재판석에 올랐다고 본다면, 이것은 자동사입니다. 2) 그런데 빌라도 자신이 재판을 받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다고 한다면 이는 타동사입니다.


영어에서도 한 동사가 자동사로 쓰이기도 하고, 타동사로 쓰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καθίζω(카시조)도, 상황에 따라 자동사가 될 수 있고, 타동사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재판자리에 앉다’라고 할 때 καθίζω(카시조)에는 섬뜩한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나사렛 예수를 심판하기 위해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재판을 받는 자리였습니다. 만약 빌라도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예수님을 판결하기 위해 재판석에 앉지 않았을 겁니다. 설혹 앉았다 하더라도 그의 판결은 달아졌을 겁니다.


그에게는 그 사회 속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절대 권한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유대총독 그 다음을 바라보는 정치적 야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켜야 하는 것도 많았고, 포기할 수 없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양심과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대중이 원하고, 여론이 지지하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가 그토록 지키기를 원했던 것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가 그토록 되고자 했던 것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AD 37년 - 100년)에 의하면 빌라도는 그 판결을 내린지 몇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당한 뒤 그 어떤 직책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해서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빌라도가 그 재판자리가 자신을 향한 심판의 자리임을 알아 정의롭고 공정하게 예수님의 무죄를 판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의 염려대로 민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그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유대인들의 상소가 빗발쳐 총독자리에서 파면당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역사는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르게 그를 평가할 겁니다. 우리가 예배시간마다 고백하는 신앙고백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문구 대신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고난을 받은 사람으로 고백될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워, 잃어버릴 것이 염려되어 하나님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았던 빌라도는 되려 심판받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리의 가볍고 무거움이나 낮고 높음을 떠나 우리 또한 어떤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가만히 보니 우리의 자리는 재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재판 받는 자리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앉아 있든 실은 그 자리는 내가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앉혀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한시적으로 주어진 그 자리와 권한은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을 묻는 자리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부모로서의 권한을 내세워 자녀들을 심판하지도 말아야 하겠지만, 자녀로서 권한을 내세워 부모를 정죄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우리가 심판하는 순간 우리 자신이 재판석에 앉게 되고 주님의 자리를 탐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어느 자리에 있든지 우리 자신이 재판 받고 있음을 알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맡겨주신 자리에 합당한 책임을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도종환의 <멀리가는 물>


하나님~

매일 우리 마음의 동기를 살피며 처음의 맑은 마음으로 흘러가는 물이기를 원합니다. 때 묻지 않을 수는 없으나, 흐리지 않을 수는 없으나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젖으며, 물들며 언젠가 바다에 다다르는 물이길 원합니다.


본래의 제 심성을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고 주님 앞에 다다르는 그리스도인되길 원합니다. 날마다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것임을 잊지 않음으로 맡겨두신 권한의 책임을 다하는 우리 일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드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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