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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6.14 움오름 주일 설교 - "너는 어디로부터냐?"(요 19:6-9)

최종 수정일: 2020년 6월 23일










요한복음 19:6~9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9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설교문


1. 광장의 포악성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명했던 빌라도는 승냥이때 마냥 울부짖는 무리 앞에 예수님을 다시 세웠습니다. 자신이 보기에 분명 나사렛 예수는 사형죄에 해당치 않았으나,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쇼였습니다. 이것이 요 19:5까지의 상황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마가복음은 요 19장 5절과 6절 사이에 빌라도가 다음과 같은 말을 군중에게 전했다고 전합니다. 막 15:12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앞서 유월절을 맞이하여 죄수 한명을 총독의 권한으로 풀어줄 때에도 그러하였지만, 이 부분에서도 빌라도는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되려 군중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으며 그들에게 결정권을 넘겼습니다. 정치꾼들의 전형적인 책임회피적 수사법(rhetoric)이었습니다.


물론 통치자나 정치인들이 여론을 조사하고, 민의를 존중하는 것은 바람직하며, 매우 고무적입니다. 고무(鼓舞)라는 말 그대로 북을 치고 춤을 추며 흥겨워 할 일입니다. 하지만, 조작된 여론과 선동된 무리가 점유한 총독의 관정 앞 공간은 이미 오염된 광장이었습니다. 그 오염된 광장 앞에서 왜곡된 여론과 소리치는 군중에 의해 빌라도는 이미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과거와 달리 우리 시대는 시민들의 참여형 정치가 활발해 졌습니다.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현상임에 분명합니다. 그만큼 소통하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또 양보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넓어졌기 때문입니다. 한때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한 암울한 시대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지금 우리 사회는 평화적으로 시위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이 사이버 공간이든, 현실적 공간이든 간에 표현의 자유를 가지고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가는 참여형 광장 정치를 구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에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맹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격한 열성당원의 목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마치 전체의 의제(agenda)를 대표한다고 착각한 채 그것에 끌려갈 수 있습니다. 민심이라는 것은 목소리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되려 말없이 지켜보는 이들의 숨은 목소리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동서양을 무론하고 무릇 좋은 정치를 펼쳤던 사람들의 면모를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추종자만을 데리고 가열차게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것과 더불어 끊임없이 반대편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참여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일명 외연의 확장입니다. 그것이 개혁이든, 발전이든 간에 외연의 확장성을 담부하지 못한 것은 순간의 불꽃으로 끝났지 결코 지속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빌라도는 세차게 외치는 광장의 목소리에 압도되어 자신의 본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눈치 챈 노회한 정치꾼 가야바와 아랫 사람들은 일제히 복음서에 기록된 말 중에서 가장 포악하고도 잔혹한 말로 소리쳤습니다. 요 19:6 상반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분명 로마의 실정법상으로 사형에 해당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유대의 관습법과 종교법을 적용해서까지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말이 청유형처럼 해석되어 마치 군중이 빌라도에게 부탁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은 단수 2인칭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단호하고도 단도직입적으로 총독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반영해 번역하자면, “네가 십자가에 못박아라!”라는 반복된 외침이 됩니다. 이에 이미 군중에 압도되었던 빌라도는 다음의 말로 그들의 요구를 수락한 듯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6절 하반절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2. 장미와 포도나무


집요하고도 단호한 군중의 명령에 가까운 협박에 굴복한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유대인, 바로 그들에 의해 십자가형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듯 책임을 양도하며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라는 말로 마무리 했습니다.


지도자에게 여러가지 덕목이 요구되지만,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책임감’입니다. 그것이 어떤 직장이건, 또는 명령체계가 명확한 군대와 같은 조직이건 간에 상층부로 올라갈 수록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많습니다. 물론 그와 동시에 그에 따른 책임도 요구됩니다. 그런데, 만약 상위 지도자가 결정을 내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본인이 지지 않고 하위 사람들에게 돌린다면 그가 지도자의 자질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단연 아닙니다. 그는 그 자리에 더이상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와 그가 속한 조직을 위해서 그 자리를 놓고 내려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는 그를 지도자로 삼아 함께 할 사람은 결코 남아 있지 않을 겁니다. 남아 있다한들 그 사람들은 생명을 같이 하여 의를 이룰 사람들이 아니라, 이익의 부스러기를 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어찌 지도자만의 전유물이겠습니까? 무릇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책무와 의무를 다해 가는 것, 그 무게를 묵묵히 감내해 가는 것 그것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는 이렇게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모두가 함께, 또는 더불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유럽에 거주할 때에 숱한 포도밭을 거닐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한 이야기를 얼마전 전해 들었습니다. 그것은 뉴질랜드의 포도밭을 다녀왔던 한 사람의 경험담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참고로 뉴질랜드 와인 생산량은 전 세계의 1%도 안되는 매우 적은 양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과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품종을 훌륭하게 잘 다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질랜드를 방문한 한 청년이 운전을 하던 중 포도농장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포도밭 사이사이에 피어있는 장미꽃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여 와인도 한병 살겸 잠시포도농장을 들렸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아름답게 보이던 그 장미꽃들이 가까이서 보니 온갖 벌레가 들끓고 있었습니다. 장미는 워낙 병이 많다지만, 대부분의 꽃잎은 병에 걸려 시들어 가는것이 여간 볼품없는 모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왜 저 아름다운 장미를 잘 돌보지 않고 저렇게 시들게 만드냐고 포도농장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주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포도나무가 해충에 시달리지 않고 열매를 맺으며 잘 자랄수 있도록 포도나무 사이마다 장미를 심습니다. 그러면 포도를 괴롭히는 온갖 해충들이 장미나무로 옮겨갑니다. 당연히 장미는 포도나무를 대신해서 온갖 병충해에 시달리게 되고, 포도나무는 그런 장미 덕분에 알찬 열매를 맺어 맛난 포도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 농장주인의 말을 들으며 청년은 자신의 부모님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포도나무인 자신을 온갖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아름다운 장미가 그렇게 빛을 잃어가듯 부모님께서도 숱한 희생을 감수하신걸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훗날 이 청년은 자신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하객들 앞에 이 이야기를 전하며 자신의 장미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빌라도의 관정, 그리고 그 앞 광장은 이미 법치를 저버렸고, 민의가 왜곡된 오염된 장소였습니다. 토론과 타협이 사라졌고, 정치적 구호만 난무하는 힘의 전시공간이었습니다. 노회한 정치세력이 군중을 총동원해 법치와 정의를 위협하는 파시즘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같은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온갖 저주와 혐오의 질병을 떠 안고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정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3. 법 - 질서유지와 질서파괴의 힘


사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6절 하반절)는 빌라도의 말은 “나는 모르겠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당신들 원하는대로 하라”는 포기와 책임전가적 발언이었습니다. 이 말에 유대인들은 7절을 통해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진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앞선 요 18:30에서는 ‘행악자’라는 표현을 쓰며 로마에 반역을 한 음모자라고 고발했던 그들이 이제 와서는 본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온갖 말로 고소하며 빌라도를 협박하다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그 고소의 본래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 고소의 기준은 로마법도 아니었고, 유대의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적용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말하고 있었지만, 법의 이름으로 법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법 이용자들이었고, 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점하고 목적한 바를 이루려는 법 기술자들이었습니다.


흔히들 선량한 사람을 일컬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선량하게 양심있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법 자체가 없는 사회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문화되고 조문화된 법이 존재치 않을 수는 있으나 관습도 하나의 법이고, 마음의 양심 또한 법의 일종이기에 법 없는 사회는 존재치 않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늘 좋음의 문제와 옳음의 문제의 긴장적 공생 관계를 가집니다. 어쩌면 법은 사회적 통합을 위해 적극적인 의미와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지적 자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법이라는 지적자원은 우리 시대에 법 전문주의라는 명목으로 왜곡되고 빈곤해진 부분이 없잖아 많습니다. 법을 전공한 특정 집단이 사회의 모든 문제를 점유한 채 초법적 존재로 군림하려는 귀족주의 현상이 뚜렸합니다. 그들은 법을 외치고,원칙을 내세우지만, 실은 법을 이용해 이익의 부스러기를 탐하려는 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더욱 참담한 것은 입법의 과정이든, 그 법이 집행되는 사법의 과정이든 간에 판결의 정당성이 제시되어야 하는데, 빌라도의 법정도 그러했고, 우리시대의 법정도 이것이 결여되었습니다. 분명 법관의 자리를 점한 총독이 결정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판결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법정에서의 소통의 질이 높아야 했는데, 이것이 부재했습니다. 사법윤리의 핵심이 경청임에도 빌라도는 힘있는 한쪽의 소리만 들으려 했지, 피고의 자리에 선 약한 이의 목소리를 진정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생때와 거짓과 날조가 민심이라는 이름으로 압력과 협박화 되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법정이었고, 아픈 우리 역사 속의 법정이었습니다.



4. 너는 어디로부터냐?


자신들의 관습법과 종교법을 앞세워 사형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말을 들으며 빌라도는 섬찟 놀랐습니다. 놀랄 뿐만 아니라 ‘더욱 두려웠다’고 8절은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이라는 부사를 보건데, 그는 이미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자신의 문제 때문에 갖는 두려움이 아니라, 주변의 상황의 변화로 인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행여 이 재판으로 인해 민란으로 번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 그 결과 예루살렘 총독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을 겁니다. 그런데, 8절을 보니 빌라도는 그런 두려움보다도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앞선 7절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말 속에 담긴 나사렛 예수의 죄목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다’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접해서 아시겠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와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이야기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사렛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하니, 빌라도는 정신이 번쩍 들고 모골이 더 송연해 질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앞서 사람을 보내어 다급하게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마 27:19)라고 전언했던 아내(Claudia Procula)의 꿈 이야기와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다시 관정으로 들어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9절 중반절입니다.

“너는 어디로부터냐?”


빌라도의 질문에 주목하기에 앞서 우리가 눈 여겨봐야 할 것은 ‘다시’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πάλιν(팔린)이라는 빈도부사입니다. 이 단어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동안에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번은 유대 군중들이 다시 소리를 지른 요 18:40을 제외하고, 나머지 네 번(요 18:38, 40, 요 19:4, 9)은 모두 빌라도의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관정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이를 계속 반복함으로써 그는 분주히 재판했습니다. 매우 성실하게, 그리고 힘을 쏟아 재판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판엔 사법윤리의 핵심이자 판결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경청이 부재했습니다.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 뿐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더 발전하고 더 개선되지 않는 여러 이유 중에 중요한 하나가 바로 이것, 경청의 부재입니다. 가족 간에도 일방적 지시만 난무하고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도 마주하는 시간이 없다 보니, 대화할 시간이 없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때로 홀로 기도의 시간을 가지기도 하지만, 아뢰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듣는 기도(Listening Prayer)를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기독교 서점의 기도책 코너에 가면 책 제목이나 내용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 하는 것이 ‘응답’일 겁니다. ‘3만번 응답…’부터 시작해서 ’응답받는 기도’, ‘응답기도의 비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때 응답받기 위해 매일 밤마다 학교뒷산에 올라가 부르짖기도 하고, 금요일 밤마다 북한산 기도원을 찾아 철야기도를 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듣는 기도’임을 뒤늦게서야 저는 절감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움오름가족님들에게 질문드립니다.

‘다시’ 또 ‘다시’를 연발하며 무얼 위해 분주히 집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계십니까? 그 열심이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묻고 계십니까? 무엇을 묻고 계십니까? … 그런데, 그 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얼마나 기다리고 계십니까? 어떻게 귀 기울이고 계십니까?



5. 모호함을 견디며


“너는 어디로부터냐?” … 빌라도는 예수님의 출신지가 나사렛이고, 갈릴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어디로부터냐?”, 즉 “너는 어디서 왔느냐?”라는 질문이 출신고향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영적기원을 묻는 질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도대체 네 정체가 뭐냐?”라는 의미였습니다. 아내의 꿈 이야기와 더불어 유대인들의 고소내용이 겹쳐지며 정말 신의 아들이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던 겁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하지만, 예수님은 빌라도의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재판과정 중에 유일한 침묵장면입니다(앞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빌라도가 물었지만, 기다리지 않고 그냥 본인이 뛰쳐 나감). 왜 주님은 침묵하셨을까요? 사도요한은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고 설명을 왜 덧붙여 두었을까요?


신학자들과 성경 연구가들은 몇몇 이유를 달고 있습니다. 사 53:7 말씀(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의 성취라고 보기도 하고, 요 18:36-37에서 이미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기에 더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개연성은 있지만, 완전히 이것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둘 다 일수도 있습니다. 어쨋든 빌라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은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방금 이렇게 하자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래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요.” …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명한 것을 좋아합니다. 명징하고 명확한 것이 깔금하고 확신이 들어 불안한 맘을 물리칩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반면에 우물쭈물하고 애매한 것은 답답합니다. 이런 모호한 태도의 사람은 그래서 열불이 나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나온 우리 삶의 걸음을 되돌아 보면, 명확하고 분명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써치 라이트로 전방이 환하게 다 드러나 보여 장애물이 방해물이 되지 않던 때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 많은 경우 우리 삶은 흐린 안개 같았고,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한 맘으로 주저하던 애매함의 연속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그 애매함을 잘 견디는 것도 삶의 내공이요, 능력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의 첫번째(전학가기 전) 초등학교 시절 학교 육성종목 경기가 씨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매 체육시간마다 반 친구들끼리 씨름판 모래 위에 샅바를 매고 씨름을 배우곤 했습니다. 씨름에 수많은 기술들이 있습니다. 손기술, 다리기술부터 뒤집기 같은 화려한 허리 기술과 혼합 기술 등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켜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아주 재미없지만, 제일 중요한 기술이 있습니다. 그게 ‘버티기’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땀을 비오듯 쏟아 냅니다. 힘의 균형을 이루고 기회를 얻기 위해 견디는 기술입니다. 기다리는 기술입니다.


삶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어서 늘 직진 만을 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습니다. 예외없이 울퉁불퉁한 길을 걸었고, 때로 지도에도 없는 길을 만들며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침반도 지도도 없이 오직 감에만 의지해서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 모호함을 견디며, 버티며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능력입니다.


계획한 대로 안 풀리고 있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상황 앞에서 멈춰 계십니까? 최선인 줄 알고 결정했는데, 그게 차선도 차악도 아니고, 최악으로 가는 것만 같습니까? 이 모호함들 속에서 지쳐있고, 두렵고 불안하십니까? … 때로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왜 그랬는지 그 이유를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버티시고, 모호함을 견뎌 가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능력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증명하고 살아온 믿음의 방식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법의 이름으로 법을 무시하는 군중들의 난폭함 앞에서도 한 마디 자기 변호조차 하지 않으신 채 십자가형을 받으셨던 주님을 생각해 봅니다. 분명 우리가 짊어지고 감당해야 할 온갖 죄의 결과와 형벌 조차 친히 떠 안으신 채 죽음의 길을 걸으시던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주님을 위해 ‘다시’ 또 ‘다시’를 연발하며 분주히 살고 있다고 하지만, 진정 누굴 위해, 또 무얼 위해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지 정직히 자문해 봅니다. 경청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거짓말을 이제는 거두려 합니다. 작지만, 더 늦기 전에 듣고 또 들으려는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생의 모호함과 애매함 앞에서도 포기하거나 주저 앉지 않게 하옵소서. 묵묵히 기다리고, 버팀으로써 끝내 감당해 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소망한 대로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터 위에서 견뎌가는 기다림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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