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5.10 움오름 주일 설교 -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2"(요 18:38-40)

5월 11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38~40

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9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40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설교문


1. 學(학)과 習(습)


1) 배움의 기쁨과 설교 논어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고 할 때의 사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중의 하나로서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해 놓은 문답집, 또는 어록집입니다. 500여개의 문장으로 기록된 논어가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해 둔 책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공자가 아닙니다. 성경의 사복음서처럼 그 기록자는 공자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논어의 각 문구는 줄곧 이렇게 시작합니다. “子曰” … “공자께서 가라사대…”라는 뜻입니다. 마치 성경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구절과 유사합니다. 논어의 첫 시작은 이렇습니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말씀 說은 悅(기쁠 열)과 통자(通字)이며, 기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설’이 아닌 ‘열’자로 발음> 논어의 첫 구절은 다름아닌 學習(학습)에 관한 내용입니다. 보통 ‘공부한다’, 또는 무언가를 ‘배운다’고 할 때의 한자어는 學(배울 학)자를 씁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익히는 것, 연습하는 것을 일컬어 습(習)이라고 합니다. 습(習) 자의 자획(字劃)을 파자(破字)해 보면, 그 의미는 더더욱 분명해 집니다. 羽(깃털 우)와 白(흰 백)으로 구성된 습(習) 자는 둥지 안의 어린 새가 어미새의 나는 모습을 보며 날개짓을 익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미새를 따라 끊임없이 날개짓을 반복하고 연습해서 마침내 둥지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습(習)입니다. B.C 450년경 공자는 인간이 사람됨을 배울 뿐 아니라, 군자로 살아가기 위한 그 출발이요, 기본이 학습에 있음을 밝힌 겁니다. 또한 공자의 제자들이 논어라는 책에 스승의 말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는 것은 그 가르침을 한 번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다시보고 또 보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배우고 익히는 문화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후세까지 인간의 세상이 동물의 본능을 넘어 사람 냄새와 온기가 서린 세상을 여는데 일조해 왔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언가를 배운 후 그것을 익히는 일에 얼마나 시간을 쓰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배우고, 익힌대로 사는 것에 얼마나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작년 8월부터 올해 1월까지 포천중리교회 송영윤 목사와 둘이서 매주일 설교를 나누며 서로 칭찬과 비평과 조언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 2월부터는 저를 포함한 9명이 각자의 설교를 단체톡방에 올려 비평대 위에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다소 신성불가침(?)처럼 여겨 교회 내에서 “아멘”으로만 받들던 설교를 동기들의 눈으로 분석하고, 조심스레 비평을 주고 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내가 속해 있는 움오름교회에서는 지금까지 이걸 하지 않았지?’,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에서도 이것을 해 볼 수 있을까?’ 때로 설교 듣는 것이 힘드시지요? 그런데, 때로 ‘아…’하고 가슴에 새겨지기도 하시지요?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주일에 나누는 이 설교 한편을 위해 일주일 내내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설교와의 연관성을 생각합니다. 순간 지나가는 말 한마디, 영화나 뉴스, 심지어 광고 하나에서도 무언가 번쩍이며 스쳐가면 잊지 않기 위해 바로 메모장에 남겨둡니다. 그리고 금요일 밤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내내 두문불출하며 원고를 작성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면 늘 맘 한켠이 허합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잘 전하지 못한 제 자신을 향한 자책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나눈 그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학과 습(學習)에 좀 더 마음을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합니다. … 그래서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매주일 예배를 마치고 그날 나눈 설교에 대한 생각을 단체톡방에서라도 나누었으면 합니다. 질문도 해 주시고, 다른 관점이나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나아가 한 주간이 지나고 그 다음 주일에 만났을 때는 배우고 깨달았던 그 말씀을 어떻게 각자의 삶에서 적용하고 익혀갔는지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말씀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 2천년 전 이와같은 모습으로 신앙을 살아갔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을 성경은 증언해 줍니다. 행 17:11입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는 오늘날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베리아(Βέροια)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100km 떨어진 페르미온 산맥(Vermion mountains) 동부의 조그마한 변방에 속한 도시였지만, 그곳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 보다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개역성경에선 이를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해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은 그 좋은 성격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을 자세히 상고했습니다. ‘상고하다’는 것은 ‘조사하다, 묻다’라는 의미입니다. 그곳 사람들은 성경말씀이니 아무 의심도 없이, 아무런 질문도 없이 무조건 “아멘”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자적인 뜻을 조사해 볼뿐 아니라, 그 문자 속에 감추인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저자의 의도를 알려고 애썼습니다. 말씀을 사모한다, 또는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살아간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학습’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무조건 아멘하는 것은 결단코 믿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되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듣기는 듣는데, 듣고 난 후에 그 말씀과 전혀 관계없이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박리된 삶을 살아가는 것 또한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배우는 일(學)에는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열심이었지만, 그것을 익히는 일(習)에는 소홀했던 결과입니다.



2. 바라바와 예수 바라바


1) 그 이름 ‘바라바’ 지난시간 빌라도의 유월절 죄수사면 제안과 무리들의 선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무리’라고 불렸던 대중이 악을 써서 소리 지르며 선택한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 바라바였습니다. 이때의 강도라는 말 λῃστής(레스테스)는 단순 강도보다는 주로 범죄조직을 만들어 폭동을 일으킨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라바 그는 눅 23:19이 설명했듯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시 무장 테러를 일으키고, 살인을 자행하며 종교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던 열심당(Zealot)의 주축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경 속 등장하는 사람이 모두 2,197명인데, 바라바는 그중의 하나로서 분량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워낙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 인물이어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보이는 실마리를 갖고서라도 유추해 보고자 합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바라바’라는 이름의 뜻을 해석하여 그의 됨됨이를 파악하려 시도했습니다. 학자들의 연구는 대략 5가지로 축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바나바를 ‘바르 아바’(בר-אבא: 아바의 아들)에서 왔다고 봅니다. : ‘아바’가 우리말의 ‘아빠’입니다. 고로 ‘바르 아바’는 ‘아빠의 아들’ 둘째, 바라바의 아버지 이름이 ‘아바’(אבא)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 위와 같은 ‘아바의 아들’이지만, ‘아바’ 자체가 이름이었다고 보는 견해 셋째, 바라바가 매우 잘 알려진 랍비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 지금도 카톨릭 신부들에게 ‘father’라고 호칭하기도 하지만, 당시 ‘아바’라는 호칭은 존경받는 학자들과 랍비들에게 주어지는 이름이었습니다. 고로 바라바를 ‘아버지’라고 불리며 존경받던 랍비의 아들이라고 봅니다. 넷째, 바라바를 “바르 라바”(선생의 아들)였다고 봅니다. : 셋째와 유사하지만, 아예 ‘아바’를 ‘라바’로 봐서 ‘스승’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이는 일부 사본에서 바라바의 이름에 ‘ㄹ’음이 두 번(בר-ראבא: 바르 라바)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브라함에서 축약된 이름(בר-אברהם: 아브라함의 아들)으로 보기도 합니다. : 어린시절 저를 잠시 맡아 키웠던 제 이모는 아직도 저를 “호야!”라고 부릅니다. 이름을 축약한 겁니다. 그렇듯 ‘아브라함’을 축약해 그의 자손임을 ‘바르 아바’라고 불렀다는 견해입니다.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유대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성(family name)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만으로 지칭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동명이인을 구분하기 위해 2가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그 이름 앞에 지역명을 붙여 ‘000출신 아무개’라고 호칭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름 앞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여서 ‘000의 아들 아무개’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호칭법을 염두에 두고 바라바라는 이름을 본다면, 지역명을 쓰지 않았던 그의 이름은 분명 위의 5가지 중의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바라바는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 아니라, 일명 식자 집안, 또는 유력한 집안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자신의 인생을 던졌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이게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대가 추구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향성에 있습니다. 동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제사장 가문이라는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빈들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한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이끄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며 그 걸음을 따라간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시대의 사조와 흐름에 따라 자신의 혈기를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살인, 반란, 투쟁 등 그 방법은 가리지 않았습니다. 필요하고, 또 이익이 된다 싶으면 사용하고 시행하면 될 뿐이었습니다. 어쨌든 당시의 민중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법 가리지 않고 해방만 되면 그들에겐 더할 나위없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그들 시대의 정신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시대를 만들어 가고, 사회를 형성해 가는 교육이라는 사회화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막다른 길로 치닫도록 선동하고, 치우치도록 하는 폐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바라바는 시대정신에 선동된 무리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동시에 다시 무리를 선동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차분히 하늘의 음성을 기다리며 하나님이 진정 그 시대에 원하시는 길, 그 길을 걷는 방법 등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배우고, 익혀갈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그에게 시범을 보여줄 어른도, 주변의 사람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죄다 추구한 방법이라곤 열심당의 투쟁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2) 신적교환 - 예수 바라바 빌라도의 물음 앞에서 대중이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바라바였습니다. 바나바 그는 비록 잡혔지만, 대중이 잊지 않고, 여전히 희망을 거는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올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악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일하시듯이,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바라바를 대신해 내어 주심으로써 그를 구하셨습니다. 이를 마틴 루터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적 교환’(Divine Exchange),또는 ‘놀라운 교환’(A wonderful exchang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뀜으로써 영원이 바뀝니다. 인생의 저주가 끊어지고 하늘의 복으로 교환됩니다. 그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통과 수난이 담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즐거운 교환’이 일어납니다. 상처가 치유로 바뀌고, 가난이 부유함으로, 죄가 자유로, 염려와 근심이 평안과 평화로 바뀌어 집니다. 즐거운 행복이고, 행복한 교환입니다. 2천년 전 바라바는 생각지도 못한 이 신적교환, 놀라운 교환을 누린 첫 번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이후 바라바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 27:16-17의 몇몇 사본들에서 바라바의 이름을 ‘예수 바라바’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꼭 초대교회 전승이 아니더라도 바라바의 이후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유추가 가능합니다(*본래 이름이 ‘예수 바라바’였는데, 이후 ‘예수’라는 부분을 생략하고 ‘바라바’로만 불렀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그가 신봉하고 추구했던 시대정신을 내려놓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추구하셨던 그 하나님 나라의 길로 접어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심으로써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그도 그 예수님의 길로 자신을 던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라바, 그는 그날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과 맞교환의 은혜를 누렸던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배우고 익혀 예수의 삶을 따라간 예수님의 사람, 예수 바라바이기도 했습니다.



3. 교회를 팔아서라도


1) 교회건물보다 소중한 교회(교인) 코로나19가 해외유입을 제외하고 지역감염 0명을 이어가다 지난 주중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의 집단감염으로 인해 다시 바싹 긴장해야 하는 시점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 1월 19일 첫 환자가 발생한 이래 벌써 3개월 21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의료진들과 담당공무원들께서 곳곳에서 최선을 다해 방역활동과 치료활동을 해 오고 계십니다. 그런 가운데 시민들도 최대한 협조하며 지금껏 잘 해왔습니다. 하지만, 경제생활은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마치 이상 전압이 들어올 때 휴즈가 제일 먼저 나가듯이, 취약한 사회계층에 있는 분들이 더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민감한 부분이어서 교회 내에서도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그렇지 움오름 가족분들 중에도 어려운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전염병의 시기에 교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지금껏 배우고 익혀왔다는 믿음과 신앙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먼저, 2004년도에 불의의 사고로 하나님 곁으로 간 채희동 목사의 설교<교회 건물보다 더 소중한 당신> 中의 일부를 나눕니다. 우리 교회의 건물은 40평이 채 되지 않는 12년 된 낡은 철제 조립식입니다. 그래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습니다. 이제는 교회 건물을 다시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를 해 왔습니다. 실제로 성도들의 건축헌금이 드려졌고, 저 또한 지난 1년 동안 어렵게 제 책 「꽃망울이 터지니 하늘이 열리네」(뉴스앤조이)를 팔아 1,000만 원이나 되는 꽤 큰돈을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꽤 오래 전부터, 아니 우리 교회 김순기 집사님께서 몸이 불편하여 직장을 그만두신 뒤부터, 그렇게 열심히 새벽기도회를 빠트리지 않고 나오다가 나오지 못하시게 되었을 때부터 하느님을 모신 김순기 집사라는 성전이 저렇게 무너져 가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이 성전을 멋지게 다시 지은 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과연 하느님이 기뻐 받으실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종교이든지 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원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교회의 예배당이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을 대체하는 것은 아님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배당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성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위한 사랑과 공의를 더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등록과 더불어 교회 자체 새신자반을 이수하게 합니다. 기본적인 신앙의 개념부터 예배생활, 헌금과 교회봉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이러한 것들이 필요한 것을 압니다. 때로 당위성도 느낍니다. 하지만, 제게는 이런 생각이 앞섭니다. ‘교회는 봉사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부릴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세우고, 키우고, 살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교인들은 헌금을 위한 도구나, 소모제가 아니라, 함께 주님의 몸을 세워가고 일구어 가는 동역자요, 지체여야 합니다.’ 2) PONTI FIX 지난 2달 이상을 주일공동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동안 많은 교회들이 헌금이 없어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어려운 교인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는 소식은 접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라도 교회는 저축하고, 모아두었던 돈을 교회가 되는 교인을 위해 내어놓아야 합니다. 사두었던 부동산을 정리하고, 심지어 교회건물을 팔아서라도 성전되는 교인들이 살도록 해야 합니다. 많건 적건간에 교회의 지체들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 바로 그것이야 말로 지금껏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을 드린 교인들을 향한 도리이며,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교인들에게 말로 사랑을 가르쳤던 교회는 지금이야말로 그 사랑이 실제 어떤 것인지를 먼저 보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그 사랑을 먼저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마땅한 신앙공동체, 교회의 모습입니다. 요일 4: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그 신적교환의 사랑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 또한 주님의 ‘즐거운 교환’에 참여할 때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그 사랑을 배웠다면(學), 이제 익혀갈(習) 때입니다. 그리하여 ‘나와 우리’라는 보금자리를 넘어 날아 오를 때입니다. 힘의 혁명에 기대어 살아오던 바라바의 길에서 돌아서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이름을 걸고 ‘예수 바라바’로 살아갈 때입니다. 로마교황(pope)을 일컫는 라틴어가 PONTI FIX입니다. 교량, 다리를 의미하는 PONTI와 만들다라는 뜻의 FIX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PONTI FIX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PONTI FIX는 교황 뿐 아니라,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역할이기도 합니다. 위급한 시기, 실전의 때는 이론을 들먹이며 원론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닙니다. 배우고 익혔던 그것들을 어떻게 삶에 녹아내게 할 것인지, 실전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그 실행을 추구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바로 이 시점이야 말로 지금까지 배웠던 그 복음으로 다리를 놓는 사람, PONTI FIX로 이 시대와 사회를 밝혀야 할 때임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으나, 그것을 익히고 삶에 녹아내는데는 의외로 무관심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안다는 것이 곧 진리를 사는 것이라 동일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산다고 하면서도 실은 시대의 논리에 함몰되어 복음의 주체이신 주님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귀한 사랑, 신적교환을 해주셨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감사만 할 뿐, 우리 삶에서 그 사랑을 닮은 ‘복음의 즐거운 교환’을 나누며,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야 할까요? 2천년 전 그 신적교환의 감격을 자신의 이름에 새긴 채 ‘예수의 길, 예수의 삶’을 배우고, 익히며 살다간 예수 바라바가 오늘 아프게 우리 가슴 속으로 들어옵니다. 특별히 코로나19로 인해 가족, 가정의 달마저 의미가 축소된 이때에 우리의 가정이, 믿음의 가정된 우리의 교회가 이 사랑을 배우고, 익히고, 살아내게 하는 연습장이요, 실험실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이제 우리도 주님을 위해, 그리고 믿음의 가족된 지체들을 위해, 나아가 어려움에 노출된 우리 이웃들을 위해 우리를 내어놓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그분들 사이에, 그리고 그분들과 우리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PONTI FIX의 교회로, 예수 바라바라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8)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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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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