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5.03 움오름 주일 설교 -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1"(요 18:38-40)








요한복음 18:38~40

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9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40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설교문


1. 앵무새 죽이기


흑인 차별이 팽배했던 193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의 메이콤이라는 한 마을에서 흑인 청년이 백인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섰습니다. 흑인들은 지저분하고 무지하고 도덕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잠재적인 범죄자라고 인식하던 시절이었기에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 남성은 틀림없는 범인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드러난 많은 정황과 증거로 볼 때, 그는 명백한 무죄였습니다. 백인 변호사 애티커스도 로빈슨의 무죄를 의심치 않았기에 백인들의 온갖 협박과 위협을 무릅쓰고 로빈슨을 변호했습니다. 고무적인 것은 계속되는 재판과정을 통해 배심원들조차 톰 로빈슨의 무죄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사람들과 그 시절 미국 남부의 사람들은 흑인의 피를 원했습니다. 누명을 썼건 어쨌건 간에 로빈슨은 벌을 받아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왜냐하면, 톰 로빈슨은 백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상식이었고, 윤리였습니다. 그 결과 인종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배심원의 만장일치로 톰 로빈슨은 유죄 평결을 받고 감옥으로 갑니다. 변호사는 재심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톰 로빈슨은 백인사회 속에 만연한 바뀌어질 것 같지 않은 잔인성과 백인 우월주의를 본 뒤 재심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한 죽음을 거부한 채 탈옥을 하다 17발의 총알을 맞고 죽음에 이릅니다.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인종적 우월주의이든, 지식의 우월주의이든, 또는 재산이나 종교적 우월주의이든 간에 내가 상대방보다 뭔가 조금 낫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대개 상대를 향한 차별로 이어집니다. 인종에 대한 백인들의 이러한 우월주의는 수천명의 사람이 하루에 죽어가는 바이러스의 시대에도 작동했습니다. 서구인들은 ‘바이러스는 혈통상 열등한 아시아인이나 걸리는 질병’이라 자만했습니다.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것을 막고 사람을 살리기 위해 감염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을 인권침해라며 오만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젊고, 건강한 자신들만의 인권을 내세우며, 집단면역을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그 사회에서 보다 약하고 무력하고 연로한 분들과 기저질병이 있는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게 방치했습니다. 건강한 자들과 가진 자, 그리고 나름 배웠다고 하는 자들의 오만과 자만이 빚어낸 참사요, 잔인한 야만성의 결과였습니다. 연극 <앵무새 죽이기>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한 사람은 현명하지만 사람들은 멍청하고, 군중은 감정적으로 행동한다”(A Person is smart, people are dumb, a mob acts out of emotion). 집단에 숨어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바이러스의 시대가 또 다른 앵무새 죽이기의 계절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속에 관용과 양심의 먼지를 털어내고, 무디어진 그 감각들을 예민하게 만들어 가야 할 때입니다.



2. 야만의 법정


1) 대중의 야만성 흑인 톰 로빈슨의 변호를 맡았던 애티커스가 마지막 변론에서 남긴 말은 1930년대 미국사회 뿐 아니라, 오늘 우리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로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배심원 여러분, 마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토머스 제퍼슨은 언젠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됐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 (중략) …… 하지만 우리는 몇몇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기회가 더 많으며,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더 잘 벌며, 또 어떤 부인들은 다른 사람보다 케이크를 잘 만들며, 또 어떤 사람은 대부분 사람들의 정상적인 범위를 뛰어넘는 재능을 갖고 태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도록 창조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앞에서라면 거지도 록펠러와 동등하고, 어리석은 바보도 아인슈타인과 동등하며, 무식한 사람도 어떤 대학 총장과 동등한 하나의 인간적인 제도가 있지요. 배심원 여러분, 그 제도가 바로 사법 제도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대법원일 수도 있고, 이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말단의 치안 재판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배심원 여러분이 지금 수고하고 계시는 이 법정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법원은 인간의 다른 제도가 그러하듯 나름의 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우리의 법원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위대한 제도입니다. 우리의 법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법원과 사법 제도를 확신하는 그런 이상주의자는 아닙니다. 저에게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현실이지요. 배심원 여러분, 법정은 제 앞 배심원석에 앉아 계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해야만 건전할 수 있습니다. 법정은 오직 배심원단이 건전한 만큼 건전하고, 배심원단은 그 구성원이 건전한 만큼 건전합니다. 배심원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으신 증거를 감정의 동요 없이 검토하여 판단을 내려 이 피고를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내시리라 확신합니다. 배심원 여러분께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해 주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는 바입니다.” 백인과 흑인, 내가 믿는 종교와 타인이 믿는 종교,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고 차별하며 무리짓기와 따돌리기를 하는 야만의 문화 속에서 변호사는 양심과 신앙에 호소했습니다. 그게 그나마 인간 속에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 만나는 2천년 전 빌라도의 법정은 그 빛마저 가려 있습니다. 이방인 빌라도는 형평을 흉내라도 내는데, 고결한 신앙인임을 자부하던 자들은 하나같이 잔인한 야만성을 포효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을 향해 질문만 던지고 뒤돌아 섰던 빌라도는 관정 밖 대제사장 무리를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18:38 하반절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ἐγὼ οὐδεμίαν εὑρίσκω ἐν αὐτῷ αἰτίαν) 빌라도의 이 말을 어감을 살려 다시 표현해 보면 이렇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죄를 그에게서 나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2) 여론의 법정을 넘어 빌라도는 단순한 부정(οὐκ)의 의미를 넘어 강조적 부정(οὐδεμίαν)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파악한 바로는 나사렛 예수에게서 사형을 언도할 만한 죄가 없음을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만큼 그의 법정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바탕 위에 있음을 천명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양심과 정의에 의해 그런 말을 했다기 보다는 고도의 정치적 수사에 가까운 말이었음을 그 이후 그의 말이 설명해 줍니다. 39절입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빌라도는 본인 보기에 죄가 없다고 판단했으면 방면하면 될 것을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나사렛 예수를 방면한다면, 그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세력화하여 민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그렇게 된다면, 연이은 예루살렘 폭동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인 생명은 끝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의로운 개혁가라기 보다는 노련하고 유연하기까지 했던 정치가였기에 로마법에는 없지만, 유대인의 관습법에 있는 특별사면제도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 그는 분명 그 법정의 최고 결정권자요, 최종 판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과 판결을 정치적 판단에 의해 대제사장 무리에게 떠넘겼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그들의 결정을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날 빌라도의 법정은 법과 정의에 기반한 재판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포악한 집단이 왜곡된 민심의 그림자 뒤에 숨고, 재판장은 그것이 두려워 자신의 권한을 무리에게 양도한 여론의 법정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와 함께 시작된 여론의 법정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배하는 법정과 달리 유죄추정의 원칙이 지배하는 초법적이고, 탈법적인 장소였습니다. 이런 빌라도의 법정을 보며, 우리는 과연 여론이라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합니다. 탐사보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왜곡을 일삼고,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받아쓰기를 하는 언론이 과연 건강한 여론을 만들어 내는 언론인지를 묻습니다. 심지어 검사와 기자가 함께 공모하여 만들어 내고자 했던 언론사의 기사가 과연 공정하고 정확한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합작하고 조작하여 누군가를 범죄자를 만들고, 그것으로 정치지형을 바꾸려고 했던 것을 보며 과연 합리적인 여론이란게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속보’라는 이름으로 심각한 오보를 생성하고도 정정보도나 사과없이 슬그머니 넘어가는 사악한 언론은 건강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거해야 할 오염물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중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가는 당연 여론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게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권력을 극도로 자제해서 쓰고, 자신에게 위임된 권한을 책임있게 사용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법과 정의에 반하고, 위배된 Populism(대중주의, 인기영합주의)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돌아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돌아서는 것이 문화로 자리한 곳이 성숙하고도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야만성에 길들여지고, 이기적인 여론에 기대어 대중을 우매한 길로 이끌고 가려는 야비한 정치에서 벗어나 이제는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것이 ‘당연한 사회’를 그려 봅니다.



3. 유대인의 왕을 … 원하느냐?


여론과 인기에 영합한 빌라도는 자신의 결정을 포기하고 판결권한을 대중에게 양도했습니다. 빌라도는 사실보다 여론에 우선시했습니다. 그는 사실보다는 대중의 여론, 극우들의 요구에 따라 판결하는 그런 정치가였습니다. 사실 이런 정치가나 지도자가 집권하는 사회, 이런 사법체계가 작동하는 시대는 소수와 반대진영을 향한 극도의 혐오와 차별을 생산해 냅니다. 대중에게 선택을 권하는 빌라도의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 가 보겠습니다. 39절 하반절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빌라도의 시대는 식민통치체제 속에서 로마황제가 임명한 분봉왕 이외에 다른 자생적 왕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허가되지 않은 ‘유대인의 왕’을 언급하며 그를 사면해 주기를 원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죄가 없으면 그냥 방면하면 되지 왜 물어봅니까? 그것도 ‘유대인의 왕’이라는 민감한 용어를 사용하면서까지… 한편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빌라도의 언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노련한 정치가 빌라도의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수사(rhetoric)였는지도 모릅니다. 언제나 그랬지만, 정치적 수사란? 사안의 옳고 그름보다는 어떻게든 민심을 선동하고 그것에 영합해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합니다. 다의성과 애매함을 내포한 이런 정치적 수사는 때로 감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선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개연성을 지닙니다. 때로는 논리의 비약과 성급한 일반화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자기정당화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사태의 정곡과 본질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도리어 진실과 정의를 애매하게 하거나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날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한 빌라도의 정치적 수사는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그럴듯함과 애매함을 흔적으로 남김으로써 진실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추구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빌라도에게 있어 관정 밖에서 새벽부터 고함을 지르는 대중도 골치거리였지만, 또 다른 대중의 신망을 얻고 그들을 끌고 다니던 나사렛 예수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였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참에 유대인들의 손을 빌려 잠재적 위협요소인 나사렛 예수도 제거하고, 예루살렘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 냄으로써 자신의 정치생명을 위협하던 2가지 요소를 모두 해결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의미에서 빌라도의 판결을 정리해 보면, “죄는 없지만, 죄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있고,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 사람이 정치가로 있는 사회는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타락한 빌라도의 법정을 보며 우리 시대에 책임있는 정치, 법과 양심과 사실에 근거하여 판결하는 공의로운 사회를 희망해 봅니다.



4.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선택을 권하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중은 나사렛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40절입니다.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대중이 악을 써서 소리 지르며 선택한 사람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아니라, 강도 바라바였습니다. ‘강도’로 번역된 λῃστής(레스테스)는 단순 강도보다는 주로 범죄조직을 만들어 폭동을 일으킨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눅 23:19은 바라바를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전에 유다와 드다(행 5:36-37)라는 자칭 메시아가 일어나 민란을 주도했지만, 예수님 당시에도 메시아에 대한 대망과 운동은 여전했습니다.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 바라바였습니다. 그는 한편으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수단으로 폭동과 살인을 서슴치 않던 바로 그 세력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의 법정에서 대중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나사렛 예수를 원한 것이 아니라, 바라바를 원했다는 것은 그들이 꿈꾸고 바랬던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은 현실에 무언가를 짠 하고 보여주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며 검을 내려 놓기를 종용하는 그런 나약한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살인이든, 강도든 가리지 않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무언가를 이룰 수 있고, 가슴 한 켠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메시아였습니다. 그러기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고 딴 소리하는 나사렛 예수는 결코 그들과 그 시대가 요구하는 메시아일 수 없었습니다. 메시아를 비롯한 지도자에 대한 이러한 선택은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의 전통과 문화로 자리해 있습니다. 그들은 강력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더 큰 힘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교회 주변 건물들을 매입하여 주차장을 더 확보하고 여러 명목의 센터들을 건립하여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여기에 ‘힘의 혁명’이라는 함정이 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힘의 논리에 오염되고 타락으로 가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이자, 모본이신 예수님은 더 낮은 곳으로, 더 변두리로, 더 소외된 곳으로 향하셨는데, 그 길을 따른다는 우리가 그와 반대의 길, 바라바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것이 어찌 참된 신앙의 길, 슬기로운 교회생활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서안나 시인의 <곡선의 힘>이라는 시 하나 나눕니다. < 곡선의 힘 > -서안나 남한산성을 내려오다 곡선으로 휘어진 길을 만난다 차가 커브를 도는 동안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지고 풍경도 푸름의 중심을 놓아버린다 내 생의 무게 중심이 삽시간에 흐트러진다 나는 나에게서 한참 멀어져 있다 나는 모서리처럼 몸을 세우고 곡선의 격렬함과 싸운다 내 몸에서 중심을 붙잡으려 손길들이 뛰쳐나온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하던 수많은 내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나에게서 내가 이탈된다 커브길을 돌아 나에게 되돌아오는 몇 초 동안 나의 경계를 넘어서고 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엿보게 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힘 ​ 삶의 구비구비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뒤뚱거리는 곡선의 시절입니다. 최단거리를 목표로 직진의 삶을 살아오다 보니 이 곡선의 삶이 낯설지요? 보통의 삶에서 밀려나는 것 같기도 하고, 먼 곳을 우회하는 것 같아 불안하시지요? 하지만, 이 구불어진 고갯길, 굴골진 길 위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이 계십니다. 신의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 넘어오신 주님께서 이 구불어진 길을 함께 걷고 계십니다. 힘 내십시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코로나19로 인해 2달여 동안 멈췄다 다시 시작하는 주일공동예배요, 성찬예식의 날입니다. 그동안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각자의 처소에서 홀로, 또는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과 예배를 이어왔습니다. 멈춰 선 시간 당연하다고 여겼고, 관성에 따라 해오던 예배의식과 예배모임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마땅하다고 여겼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져봅니다. 혹 우리가 종교의 진영논리에 갇혀 앵무새 죽이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는지요? 나름 투명하고, 순수하다는 것을 내세워 은근 차별을 조장하던 작은 공동체는 아니었는지요? 남보다 좀 더 배웠다는 지식과 자기 의에 함몰된 나머지 보다 약한 이들을 배제로 내몰던 배려를 잊은 야만의 사람은 아니었는지요? 그리하여 더 낮은 곳으로, 더 소외된 곳으로 향하신 주님을 외면하고, 바라바의 방식을 추구해 오지는 않았는지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되,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한 주님께서 철저히 참된 사람으로서의 길을 고수하셨다면, 이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그 주님 안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여야 할까요? 그 믿음 안에서 우리의 선택은 누구를 향해야 할까요? 나사렛 예수여야 할까요? 아니면, 강도 바라바야 할까요? 이와같은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는 새로운 한 주간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당연한 사회’를 일구어감으로써 편견과 혐오에 죽어가는 앵무새 마저 살려내는 참된 그리스도인되게 하옵소서. 나아가 보통의 삶에서 벗어난 구부러진 바이러스의 시절에 원심력에서 밀려나고, 구심력도 없이 버티는 지체와 이웃들이 없도록 함께 손잡고 걷는 따뜻한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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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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