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4.19 움오름 주일 설교 - "진리가 무엇이냐 2"(요 18:33-38)







요한복음 18:33~38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설교문


1. 게토화된 민주주의


지난 4월 15일(화) 우리는 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습니다. 대부분 민주시민으로서의 귀중한 한 표를 잘 행사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지한 사람과 정당의 당선여부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겠지만, 저는 분홍색으로 물든 제 고향동네의 모습에 맘이 아팠습니다. 1980년 5월 이후 광주를 중심으로한 전라도는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타의적인 게토화(ghetto: 소수 민족이나 인종이 거주하는 격리지역)’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는 “우리가 남이가?”식의 지역이익주의와 이데올로기로 인해 ‘자의적인 게토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나 경상도 지역이 처음부터 이런 곳은 아니었습니다. 1907년 2월,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시발지였습니다. 1960년 2월 28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곳도 대구였습니다. 이처럼 대구는 민족의식도 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도 높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구와 경상도가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근 20년간 독재를 한 박정희의 고향으로서 그의 지지세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박정희 사후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 사건으로 정권을 잡아 대통령이 된 전두환과 노태우의 고향으로서 지지배경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30년 넘게(1961년 5월 - 1993년 2월)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서 쥐락펴락했던 3명은 모두 대구와 경상도를 고향으로 한 군인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력 찬탈방법은 모두 군사쿠데타였습니다. 그런데도 1979년 10월 유신체제 철폐를 위해 전개되었던 부마항쟁을 제외하고 경상도는 수구권력을 지지하는 본산으로 자리했습니다. 분명 그 지역의 사람들도 배울만치 배운 사람들인데도 시대판단을 다르게 했습니다. 수구보수주의와 이데올로기가 손을 잡고 자칭 민주주의의 수호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번 선거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공산화된다는 말도 안되는 음모론을 주장했습니다. 평생 헌신적인 기독교 신앙을 갖고 성실하게 신앙생활 해오셨다는 분들의 성경과 신앙적용 방식이 너무나 이분법적일 뿐 아니라, 단선적이었습니다. 나고, 자란 고향이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이해도 됩니다. 의식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에 항거하다 소리없이 죽어간 그 30여년의 시간 동안에도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보며 비판하고 항거하기 보다는 지지하고 응원하는 동조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반성적 성찰없이 과거 독재권력의 지지의 댓가로 지역발전과 이익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때의 풍요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날 아침, 저는 어머니와 통화하다 언성을 높이며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아니, 어머니~ 지난번 선거때 어머니께서 분명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내 평생에 다시 ㅇㅇㅇ당을 지지하는 일은 없을 꺼라’고. 그런데, 어머니는 지금 마땅히 찍을 사람이 없어 또 ㅇㅇㅇ당을 찍을 거라고 하십니다. 어머니,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안 변하는 겁니다. 이래도 저래도 맨날 지지해 주니… 어머니처럼 그렇게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망칩니다.” 지금 생각해도 많이 과한 말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미안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드려 문안인사 드렸습니다. 근데 여쭤보지도 않았는데, 제 어머니께서 먼저 다른 당을 찍었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자식들이 살아갈 나라인데, 보다 좋은 나라가 되길 바라는 맘으로 0번 찍었다” 저는 고향동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당에 대한 바램이 있습니다. 집권여당과 정부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긴장시키는 품격있는 보수당으로 거듭났으면 좋겠습니다. 꼼수 부리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엄포놓는 그런 정당이 아니라, 실력으로 여당을 압도하는 야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대안으로 인정되는 비전있는 정당으로 변모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정당이 이렇게 변모하기 위해선 유권자들의 의식이 바뀌고 생각이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이익도 중요하지만, 공공의 이익이라는 공적영역을 늘 생각해야 하는 제도입니다. 혼자도 좋지만,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돌아보고, 챙겨주고, 함께 걸어가는 제도를 만들고 사회를 개선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민주’라는 제도를 이념과 이익의 도구화로 삼지 않고, 삶으로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되게 하는 겁니다.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품던 그 맘으로 민주주의를 살았으면 합니다. 제도와 형식으로서의 민주를 넘어 다같이 살아가기 위해 나의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그런 공공시민 그리스도인들로 거듭났으면 합니다.



2. 진리의 독점


몇일 전 저녁무렵 집으로 들어오는데, 옆집 5살난 아이가 쪼르륵 뛰어옵니다. 울타리 난간에 기대어 큰소리로 저를 부르며 질문했습니다. 순간 ‘이게 뭐지?’ 싶어 확인차 되물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때 울타리 옆 텃밭에서 물을 주던 아이엄마가 당황해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아이가 TV에서 본 것을 말한 거예요.” 제가 “어떤 TV요?”라고 물었더니, 그 엄마는 “‘짱구는 못말려’에요”라고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날 5살난 옆집 아이가 제게 물었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아저씨, 이번 달 대출금 얼마 나왔어요?” ……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실상 안다고 생각했던 그것은 5살 아이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날 아이는 뭔지도 모르는 것을 안다고 질문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의 질문을 듣고 뒤돌아 서며 떠오른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로마총독 빌라도의 물음이었습니다. 그도 분명 자신이 묻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진정 주님이 말씀하시던 진리에 대해 알았더라면, 주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판결은 결단코 내리지 않았을 겁니다. 진리에 가장 근접한 자리에 함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요 18:37절 후반절입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빌라도, 그는 진리를 입에 담고 있었지만, 정작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출세와 권력다툼에 혈안이 된 정치인이었지, 진리에 속해 보려고도, 진리를 살아보려고 몸부림이라도 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가장 근접한 거리에서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물의 존재를 가장 느끼지 못하는 것은 물고기입니다. 또한 공기의 존재를 가장 인지하지 못 하는 것은 공기 속에 숨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가장 근접해 있고,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진리와 가장 먼 사람일 수 있습니다. 194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앙드래 지드(André Gide)는, “진리를 겸손히 추구하는 사람들을 믿고, 진리를 찾았다고 큰 소리치는 사람들을 의심하라.”(“Croyez ceux qui cherchent la vérité, doutez de ceux qui la trouvent.”)고 했습니다. 진리는 정직하고 겸손하게 추구해 갈 대상이지 결코 어느 누군가나 한 단체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모든 진리를 다 안다. 나는 모든 답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분명 사기꾼이나 교주이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지, 진리의 독점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동판거울을 보는 듯한 희미함에 기대어 찾아가는 구도자일 뿐입니다. 그러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얼굴과 얼굴로 마주 볼 때 비로소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들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그때까지 우리는 겸허하게 더듬으며 진리를 찾고, 따르며 갈 뿐입니다.



3. 진리란?


진리가 이렇게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라면, 빌라도가 거만하게 던졌던 질문 속의 ‘진리’가 아닌, 주님이 말씀하신 진리란 무엇일까요? 그 역시 우리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것일까요? …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진리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 요 1:14을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요한은 출 34:6의 ‘인자와 진실(헤세드 웨에메트 חֶ֥סֶד וֶאֱמֶֽת)이 많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가져와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 사용했습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 출애굽시켰던 구약의 그 하나님이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도 요 14:6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말씀을 통해 당신께서 진리이심을 공표하셨습니다. 둘째, 진리는 예배와 관련이 있습니다. : 요 4:23-24입니다. 23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이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기에 ‘성전’이라는 장소개념이나, ‘안식일’이라는 특정일을 넘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배를 외적 형식이나 의식에 한정시켰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에 고정되어 있었고, 율법 준수나 의식 수행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진리’(진실한 마음, 정직한 마음)로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진리는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 요 5:33-34입니다. 33절: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절: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세례요한이 증언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예수님의 목적은 인간구원이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넷째, 진리는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 요 8:32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는 추상적이지 않을 뿐더러 말한다고 해서 그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치른 희생의 대가이며, 그 희생으로 인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나아가 한 존재를 살게 하는 실제(reality)입니다. 이 자유의 근원이 바로 진리입니다. 다섯째, 진리는 성령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 요 16:13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는 우리가 스스로 찾고 취할 수 있는 ‘소유대상’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우리가 거해야 할 ‘귀속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진리는 거룩과 관련이 있습니다. : 요 17:17, 19입니다. 17절: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9절: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기독교신앙의 거룩함은 수련과 고행의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진리에 귀속될 때 주어지는 당연물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로 우리 신앙은 우리의 실력과 내공으로 뭉쳐진 자력종교가 아니라, 철저하게 내어 맡기는 타력신앙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해 봅니다. 진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죄에서 해방케 해 새로운 출애굽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또한 진리는 우리를 진정한 예배자 되게 하며, 구원과 자유를 누리게 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물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 안에서 진리를 누리도록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4. 그것이 알고 싶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렸지만, 우리나라에 있는 기독교 재단에 속한 학교를 방문해 보면, 가장 많이 만나는 문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에 의해 자유케 된다는 조건문으로 치환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면 그 진리를 알게 될 수 있을까요? 그 결과 자유를 누리게 될 수 있을까요? BC 4세기 경 위대한 사상가였던 장자(莊子)는 양생주(養生主) 편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습니다. 吾生也有涯, 而知也无涯(오생야유애, 이지야무애) 우리 인간의 삶은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인간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는 걸까요? 송나라의 학자 주자(朱熹)의 <少年易老學難成(소년이노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 소년은 늙기는 쉽고, 학문은 이루기는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와 같이 살라는 말일까요? 그런데 앞선 ‘莊子’의 양생주(養生主) 첫 머리에 이어지는 몸통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뜻이 드러납니다. 以有涯隨无涯(이유애수무애) 殆已(태이) 已而爲知者(이이위지자) 殆而已矣(태이이의) ‘끝이 있는 삶으로 끝이 없는 앎을 따른다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앎을 추구한다면 더욱 위태로울 따름이다.’ 그러니까 장자는 유한한 삶의 크기를 벗어나 초월적이고도 무한한 앎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던 겁니다. 유한한 자로서 가질 수 없는 무한한 앎을 이미 가졌다고 잘난척하는 이들에 대해 충고했던 겁니다. ‘앎에 대한 충고’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스타벅스의 로고 속에 있는 별 왕관을 쓴 인어 세이렌입니다. 이 세이렌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Ὀδύσσεια, 오뒷세이아>입니다. 고향인 이타케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오뒷세우스는 여신 키르케로부터 자신의 일행이 어떤 위험과 맞닥뜨리게 되는지에 대한 예언을 듣습니다. 그 위험 중 하나가 바로 세이렌 자매의 유혹입니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노래부르던 인어의 전설과 닮은 면이 있습니다. 세이렌 자매는 자기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낭랑한 노랫소리로 유혹해 그들이 집에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오뒷세우스는 그 옆을 지나가야만 했기에 부하들의 귀에 밀랍을 짓이겨서 바르게 해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전우들로 하여금 자신을 돛대에 묶어두도록 한 뒤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때 세이렌 자매의 노래 소리가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자! 이리 오세요, 칭찬이 자자한 오뒷세우스여, 아카이오이족의 위대한 영광이여! 이곳에 배를 세우고 우리 두 자매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세요. 우리 입에서 나오는 감미롭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기 전에 검은 배를 타고 이 옆을 지나간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어요. 그 사람은 즐긴 다음 더 유식해져서 돌아가지요. 우리는 넓은 트로이아에서 아르고스인들과 트로이아인들이 신들의 뜻에 따라 겪었던 모든 고통을 다 알고 있으며 풍요한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다 알고 있으니까요.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숲 출판사, p. 272) 세이렌이 말하는 ‘앎’은 인간에게 엄청난 유혹이었습니다. 신들의 뜻에 따라 겪는 모든 고통을 알 수 있고, 대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 다 알 수 있는 힘.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그 힘을 ‘엄청난 유혹’이자 ‘경계해야 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 앎에서 거리를 두라고 경고했습니다. ‘앎’이라는 유혹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동서양을 무론하고 역사를 거쳐간 현자들은 ‘앎’이 유혹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알고 싶다’는 욕망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너무나 쉽게 앎을 위한 도구화시켜버립니다. 더 알아야 하고 완전히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정보화시대에 다른 누군가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더 많이 알아야 할 것들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삶을 잊고 미래에 저당잡힌 채 오늘을 사는 기쁨을 상실하고 맙니다. 오뒷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을 넘어서기 위해 돛대에 자신을 단단히 묶어두었던 것은 궁극적인 자신의 위치, 인간됨의 삶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알기 위해 사는 삶’을 경계하고, ‘삶을 위한 앎’만큼을 누리고자 했던 이유입니다.



5. 진리에 속한 사람


세이렌(Seiren)의 영어식 표기는 사이렌(Siren)입니다. 경고하기 위해 울리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관련한 빌라도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경고의 사이렌이 될 수 있을까요? 배를 난파시켰고, 사람들을 결국 파멸케 했고, 죽게 만들었던 세이렌의 감미로운 노래의 핵심은 앎(지식)이었습니다. 앎과 정보의 짜릿함이 인간의 생명과 인간됨을 파괴하듯이, 진리를 소유했다고 하는 이들에 의해 진리는 파괴성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진리란 인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속해야 할 소속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주님은 요 18:37 하반절을 통해 “진리에 속한 자”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기 보다는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지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경고를 무시한 채 절대적 앎에 다가간 결과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고 우리를 포함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진리에 속한 사람일까요? 만약 진정 우리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저급한 신뢰도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한때, 그 말은 그리스도와 꼭 닮았다는 호칭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모험적이고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놀라운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경직되고 뻣뻣하고 완고한 생활방식을 가진 개성없고 고집스런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반사회적, 반진리적, 반성경적인 사람, 자기들만의 천국에 취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기도 합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닌,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결과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진리를 소유한 유일한 점유자라는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부활절 후 맞이하는 그 다음 주일, 바로 오늘을 칭하는 특별한 이름이 “Quasi modo geniti infantes”(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나는 날)입니다. 부활절이 예수님 부활하신 큰 부활의 날이라면, 부활절 둘째 주일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나는 ‘작은 부활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듭남으로써 작은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바로 진리를 소유한 자가 아닌, 진리에 귀속된 사람, 진리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는 것은 신(神), 알려는 것은 인간(人間)이다. 알려는 슬픔과 알아 가는 기쁨 사이에서 나는 끝없는 길을 간다. -김현승, ‘인간의 의미’ 중에서 하나님 아버지~ 거짓과 진리가 교묘히 섞여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소유자가 되어 진리를 수호한다고 여겨 왔습니다. 그래서 진리 아닌 것에 대해 분개했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습니다. 그것이 진리를 위한 마땅함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되돌아 보니, 정작 그런 우리에 의해 진리는 오염되었었고, 그런 우리로 인해 사람들은 진리를 외면했습니다. 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했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한다고 착각한 결과요, 오만의 부산물이었습니다. 이제 보니, 진리를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도 모자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의 지평을 안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자가 진리 앞에서 몸부림 치면서도 늘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허세와 위선으로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달아 겸허히 받아주시기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디 비옵나니, 우리로 알려는 슬픔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알아가는 기쁨을 향유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진리 되신 주님 안에 귀속한 존재가 되어, 진리로 한없이 물들어 가는 ‘아이처럼 새롭게 태어난 존재’(벧전 2:2)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주는 완전합니다> 연주되는 찬양곡은 양재웅 형제님이 연주한 <주는 완전합니다>입니다. 가사는 이러합니다. 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 합니다. 주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이 찬양 들으며, 우리의 삶이 주님의 흔적되도록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오늘도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세계 곳곳을 위해 중보했으면 합니다. 아픔 가운데 있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완전하신 주님께서 그날에 우릴 이루실 것을 바라보며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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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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