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4.12 움오름 주일 설교 - "진리가 무엇이냐 1"(요 18:33-38)

4월 12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33~38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설교문


1. 정지된 삶, 그리고 부활절


“나의 삶은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멈춰 선 자신의 삶을 톨스토이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던 한 존재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반평생 그 이유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직전 그 답을 찾았습니다. 톨스토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의문에 대한 답은 그것을 찾기까지의 기나긴 여정과 더불어 그의 책 <고백록>에 담겨있습니다. 이유는 다르지만, 온 세계가 정지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속도에 굶주려 무한경쟁하던 세계가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에 의해 멈춰섰습니다. 자기 혼자서는 움직일 수도, 힘을 쓸 수도 없는 작은 미생물에 의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미약한 존재는 자신이 최고의 영장류이며, 힘의 최상위에 있다고 자만하던 인간이 만든 문명에 의문을 던지고, 그들이 만든 규칙들을 다르게, 새롭게 재배치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 리비아 아래, 나이지리아와 수단 사이에 위치한 차드(TCHAD)의 문인 무스타파 달렙의 글을 빌리자면, 멈춰진 시간 속에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고,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문명을 자랑하던 인간은 멈춰선 시간 앞에서 침묵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약한 존재 앞에서 숨 하나 제대로 쉬지 못하는 존재임을 인식하며 우리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가 시인이 되고자 애써본 적이 없다는 백무산 시인의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라는 시집에 실린 시 ‘정지의 힘’은 멈춰진 시간의 의미와 그 힘을 느끼게 하는 가장 적절한 시인 것 같습니다. <정지의 힘>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도 모르게 그저 달려왔던 그 힘으로 이제 우리는 멈춥니다. 그리고 멈추는 그 힘으로 기차가 다시 달리듯, 멈춤의 힘으로 꽃이 피어나듯 언젠가 우리는 다시 달려가게 되고, 다시 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기에 정지의 시간에 맞이하는 부활절 역시 비록 낯섬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교회와 신앙을 새로운 모습으로 재출발하게 할 것입니다. 새로운 상상력을 갖고 교회를 바라보게 될 것이며, 이제까지와는 다른 더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정지된 순간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새롭게 발견한 톨스토이는 <고백록>을 통해 다시 출발하는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인간도 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에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동물들과 다릅니다. 그리고 인간이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할 때, 나는 그런 인간은 행복하고 그의 삶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느낍니다.” 멈춰진 시간은 인간에게서 동물성을 뛰어넘는 고귀한 무언가가 발현되도록 합니다. 죽음 속에서 멈춰있던 정지된 시간은 주님의 부활로 다시 나타나고, 그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다르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본 회퍼 목사가 그의 책 <십자가 부활의 명상, Meditations on the Cross>에서 고백했듯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있어서 특별한 것’, 십자가에서 달리신 그분의 사랑 안에서 만나게 되는 고난이요, 부활입니다.



2. 진리가 무엇이냐?


1) 걸림돌과 용량 예수님이 행하고 말씀하시는 것 속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 특별한 것이 예수님이 생각하는 가치를 다르게 했습니다. 바라보는 것을 다르게 했고, 추구하는 것을 다르게 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곱게 보일리 없는 당시 주류 사람들의 눈에 그 다름들이 가장 큰 걸림돌(scandalous)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나사렛 예수는 능력은 있으되 시대와 사회에 맞지 않는 부적응자였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자신들이 소중히 지켜온 가치와 권위마저 심각하게 훼손할 시대의 전복자가 될 것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악함과 어두움을 통해 더 드러나고, 실현되어 갔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해 불편함을 느낍니다. 다름은 내 속의 부족을 보완하고 채울 수 있는 힘이 됨에도 불구하고 떠밀어 냅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듯이 ‘남자는 나이들며 너그러움을 잃어가고, 여자는 부드러움을 잃어갑니다’. 왜 일까요? … 자기와 동질적인 것만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질적인 부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고를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이질적인 누군가를 믿어주고, 기다려 주고, 아껴줌을 통해 그도 그만큼 자라고, 본인도 품이 넓고 넉넉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관상어 코이와 관련된 ‘코이의 법칙’을 들어보셨는지요? 코이라는 관상어는 작은 어항에다 기르면 5-8cm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cm까지 자랍니다. 그리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합니다. 같은 물고기지만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 정도가 되고, 강물에 풀어두면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코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생각에 크기에 따라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법칙입니다. 이 코이의 법칙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 이질적인 부분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용량과 가능성(capacity)이 달라집니다. 이질적인 나사렛 예수를 견디지 못해 하던 종교권력자들은 결국 자신들이 버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작 본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이질적 존재임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2) 왕이냐?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체포된 상태로 새벽에 피고석에 선 예수님을 향해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네가 왕이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동문서답 같아 보였지만, 주님은 ‘내 나라’라는 말을 3번이나 힘주어 말씀하시며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추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느 나라와는 다르다는 뜻이었습니다. 통치하는 법이 다르고, 바라보는 가치가 다르기에, 그 나라의 백성과 시민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의미였습니다. ‘내 나라는’이라고 힘주어 자신의 나라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빌라도가 앞선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은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 18:37 상) 앞서 34절에서 예수님은 왕인지를 묻는 빌라도의 질문이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에 의한 것인지, 빌라도 스스로의 생각인지를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다는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생각에 의한 질문임을 밝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빌라도를 이해시키기 위해 이 세상의 운영원리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나라가 자신의 아내마저 관심을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임을 모른 채 빌라도는 예수님이 왕이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빌라도의 말과 같이 당신이 왕이다고 밝히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8:37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의 질문에 예수님은 ‘태어나다’와 ‘왔다’라는 2가지 동사로 왕으로 오셨음을 설명하셨습니다. ‘태어나다’, ‘왔다’는 이 동사들은 서로 달랐지만, 같은 의미로서 예수님의 생의 목적에 대해 강조하신 동사입니다. 33년의 짧은 삶이었지만, 예수님의 인생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는 일에 바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진리를 위해 바친 그 삶은 오해받고, 핍박받아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장은 아무리 힘들어도 견디지만, 직원은 힘들면 사표 낸다. 연인은 불쾌하면 헤어지지만, 부부는 불쾌해도 참고 산다’. 같은 환경과 상황인데도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원인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책임감과 그에 따른 압력 때문입니다. 진리를 전하는 왕으로 오신 주님께서 고달픈 삶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인간을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창조주의 책임감이었습니다. 힘들어도, 불쾌해도 인간을 반드시 살려야 하셨기에 견디신 사랑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은 그런 왕이셨습니다. 3)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를 위한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그를 위해 사셨다는 예수님의 말에 빌라도는 오늘 제목 속에 들어있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진리가 무엇인지를 묻는 빌라도의 질문은 외형상 구도자의 질문과 닮아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예수님이 답하지 않으셨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38절 중간에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에게 가서 이르되…’라는 부분을 보면 빌라도가 질문 후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분위기를 살려 표현하자면 이런 말이 됩니다. “진리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 진리라는 게 뭔데?” 이런 분위기를 그림으로 잘 표현한 화가 중의 하나가 러시아의 니콜라이 게 (Nikolai Ge 1831 - 1894)입니다. 그의 그림중에 1890년에 그린 <그리스도와 빌라도, Christ and Pilate>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화면에 뜬 그림을 보시면, 예수님과 로마총독 빌라도가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빌라도는 환한 빛 가운데 서있고, 예수님은 어둠 속에 서있습니다. 밝은 빛을 받아 황금색이 더 빛나는 빌라도와 달리 벽그림자에 감추인 예수님의 자색옷은 더 어두워 보입니다. 빌라도는 이상하기만한 죄수와 독대하며 그를 심문하고 있습니다. 작년 사순절 기간 렘브란트의 그림을 묵상하는 가운데 느끼셨듯이, 격렬한 명암 대조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내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은 그림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니콜라이 게는 이를 역설적이게도 뒤바꿈으로써 그 대비를 더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환한 빛을 등에 업은 빌라도가 진리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거짓 잣대를 들고 진실인양 선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진리에 대해 다 아는 판결자라도 되는냥 오른 손가락을 들어 어둠 속의 예수님을 가리키며 추궁하고 있습니다. 입을 다문 예수님은 묵묵히 서 계실 뿐입니다. 하지만, 어둡고 칙칙한 그늘 속에 버려진듯 서 계시지만, 진리를 밝히는 예수님의 눈초리만큼은 빛나고 있습니다. 혈색이 좋고 피부빛깔이 빛나는 빌라도가 앙상히 야윈 예수님을 향해 한쪽 손을 내민채 거만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를 찾고 구하는 이라면 당연히 물을 질문이었지만, 빌라도의 질문은 외형만 같을 뿐 예수님께 답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신 채 무겁고도 깊은 안쓰러움의 눈빛으로 빌라도에게 응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한 장의 그림 속에서 “과연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해 봅니다. 예수님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빌라도의 거만함을 보며 우리의 부끄러운 수준과 실력을 만납니다. 세상의 안일하고 편한 것을 찾아 쉽게 쉽게 살아가려던 우리를 쳐다보시며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되물으시는 주님의 질문과 만납니다.



3. 변곡의 부활절


지난 1월 20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 미국과 우리나라에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날짜도 같고, 감염경로와 인원수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81일이 지난 4월 9일 미국의 신규 확진자 수는 한국의 823배, 누적 확진자수는 41배가 되었습니다. 두 나라의 인구가 다르지만 동시에 감염되기 시작한 두 나라에서 두 달 반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미국은 최초의 환자가 확인되었음에도 이후 중요한 몇 주를 그냥 날려보낸 반면, 우리나라는 조기에 코로나19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대구에서 신천지 집단감염 이후 위기의 상황에서도 24만 명에 달하는 그들을 신속히 검사하고 격리조치했습니다. 이를 위해 신용카드와 휴대전화 위치정보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시민들은 질병관리본부를 비롯한 정부의 대응을 신뢰하며 마스크를 착용했고,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했습니다. 교회 역시 2월 말, 3월초부터 주일공동예배를 멈추고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더 소중한 것을 위해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멈추고, 공공을 위해 개인적인 것을 멈춘 결과입니다. 이 멈춤이 언제 끝날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은 이 멈춤의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으면 합니다. 중요하게 여겼던 속도 대신 시간을 갖고 거리를 두고, 탐색하고 생각했으면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빛으로 우리를 직시하시는 주님을 향해 진지하게 질문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오만한 질문이 아니라, 진솔하게 그 답을 기다리는 구도자로서 묻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의 멈춤은 단순히 정지한 시간이 아니라, 무디어진 우리의 신앙과 영성을 날카로이하는 벼림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교회, 나아가 전세계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게 것입니다. 새로운 지구로 거듭나는 부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부활에 관한 시> -이해인 ​ ​사제가 어둠 속에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밝히는 밤 ​나의 어둠은 ​당신의 빛으로 밝아지고 ​나의 목마름은 ​당신의 생수로 축여지고 ​나의 죽음은 ​당신의 생명으로 부활하리라 ​너와 나의 흰 초에 ​불을 붙이며 ​타지 않는 혼에 불을 놓으며 ​다시 태어나리라 ​나는 어둠이어도 당신이 빛이어서 ​나를 밝히는 빛의 노래 귀하신 하나님~ 유례없는 이상하고도 긴 사순절을 보내고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수많은 죽음들이 휩쓸고 갔고, 또 다른 죽음들이 기다리고 있는 울음과 상실 속에서 맞이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의도하지 않게 멈춰 선 세상 속에서 참 생명의 소망이 아픔의 자리에 함께 하시고, 치유와 회복이 시작되길 기도드립니다. 아파하는 지구촌, 슬픔의 사람들에게도 부활주일이 되기를 빌며 어둠 속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의 빛으로 밝혀주시고, 주님의 생명으로 덧입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주님께 영광 연주되는 찬양곡은 양재웅 형제님이 연주한 헨델의 곡이자 찬송가 165장인 ‘주님께 영광’입니다. 유다 마카비(Judah Maccabee)의 예루살렘 수복을 노래한 이 찬양 들으며 오늘도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세계 곳곳을 위해 중보했으면 합니다. 더 많은 희생과 피해없이 해결될 수 있도록, 하루 속히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수 있기를 기도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멈춤 가운데 있는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이 멈춤의 시간이 새로운 걸음이 되는 부활의 시간, 변곡의 지점이 되도록 중보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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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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