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4.05 움오름 주일 설교 - "내 나라는"(요 18:33-38)







요한복음 18:33~38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설교문


1. 제국에서 민국으로, 신민에서 시민으로


한때 헌법은 법학자를 비롯한 법전문가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경찰서를 비롯해 법집행기관에 조사를 받거나 법의 힘을 빌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적이 없었기에 굳이 법을 알기 위해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대통령 탄핵과 법집행기관의 횡포를 목도하며 “이게 나라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관련법을 조사해 보았고, 부당하게 집행되는 것을 되돌리기 위해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청원을 올려 일간신문을 비롯해 지상파 방송국의 뉴스에서 다루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당에선 그 부분을 오는 4월 15일 국회의원대표선거공약으로 내세우기까지 했습니다. 저를 걱정하시는 분들은 “목사가 정치적이 되면 안된다”고 권면합니다. “너무 가슴에 불을 품고 살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고 체 게바라가 말했던 것처럼 혁명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면 몸부림이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요? 비인간적인 제도와 관습을 바꾸기 위해 ‘깨어있는 시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난주중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한 고상만 선생의 책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을 읽으며 가슴 아파했고, 진실을 몰랐음에 미안했고, 그분의 희생에 감사했습니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내가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이 이전보다 좋아졌다면, 그것은 분명 다른 누군가의 애씀과 희생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고,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문구 그대로 우리나라는 국민이 주인인 국가이며, 그 주인으로부터 권력이 나온다는 설명입니다. 지금이야 이 문구가 자연스러워 아무런 감흥도 없이 읽고, 들릴지 모르지만, 1919년 3.1 운동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땅의 사람들은 백성(百姓) 또는 신민(臣民)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사대부(士大夫)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는 서민(庶民) 등으로 불리며 왕에 종속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정치는 과거 500년간 전래 되었고, 앞으로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 정치이다’고 천명한 대한제국의 법 조항 대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조항(대한민국 임시헌장 1919.4.11)을 탄생시켰습니다. ’대한제국 대황제는 무한한 군권(君權)을 지니고 있다’라는 조항 역시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있다’는 조항(대한민국 임시헌법 1919.9.11)으로 대신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이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 결과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8차례(1987년 10월 29일)에 걸쳐 개정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날 우리의 나라는 제국(帝國)에서 민국(民國)으로, 신민(臣民)에서 시민(市民)으로 보다 나은 나라, 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로 변모했습니다. 물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제도와 인식의 변화는 저절로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에야 상식이 된 민주, 공화, 자유, 평등사상이지만, 이것이 이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져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연스럽고도 평범한 제도와 법 속에는 조국을 사랑한 사람들의 희생이 서려있습니다. “앞선 역사를 이해하는 만큼 오늘 내 삶에 대해 알게 된다”는 박노해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앞선 역사를 배우고 알아감으로써 오늘 우리가 어떤 역사를 함께 만들어가고, 또 어떤 나라를 세워갈지를 생각합니다.



2. 내 나라는


예수님의 4번째 재판과정을 다루고 있는 오늘 본문 속에도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관한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이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질문과 답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나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이 아님을 반어적으로 강조하던 빌라도가 왜 같은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에 세웠는지를 물었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 18:36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질문할 때 사용한 ‘네 나라 사람’이라는 개념은 지리적이거나 통치적인 개념의 나라가 아니라, 혈통적 개념의 나라였습니다. 다시 말해 ‘네 민족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는 답변을 통해 지리적이거나 통치적, 또는 혈통적과는 전혀 다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주님은 36절 한 절 속에 무려 3번이나 ‘내 나라’라는 단어를 반복함으로써 빌라도가 의미했던 ‘이 세상 나라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주님의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이길래 이 땅의 나라와는 다르다는 것일까요? 보통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를 ‘국민, 영토, 주권’이라고 합니다. 이 3가지 요소에 의해 각 나라의 특징이 지어지고, 나라와 나라가 분류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으로 구성될까요? 그 요소는 무엇일가요? 성공회 출신 신약학자인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 1953년- )는 그의 책 <하나님 나라의 비밀: Kingdom Conspiracy -새물결플러스>을 통해 다음의 5가지로 그 구성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첫째, 왕이신 예수 둘째, 예수님에 의한 다스림 셋째, 백성으로서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넷째, 예수님의 나라 백성(교회)이 살아가는 모든 땅 다섯째, 통치 법으로서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맥나이트가 제시하는 것을 정리하면,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 함께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육신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육신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명’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저자는 그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자아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p. 252)”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핵심은 사랑입니다.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으로 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p. 361).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성육신의 이유이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어주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핵심입니다. 구원의 가장 기본을 설명하는 요 3:16-17을 보십시오.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으로 시작하는 기독교 구원교리의 핵심인 이 부분의 어디에도 인간을 향한 창조주의 강압이나 착취가 없습니다. 되려 인간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자기희생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운영원리


지난 주일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나눈 복효근 시인의 시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을 기억하십니까? 한번 더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저자에게 직접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보기에 이 시에는 2가지 암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붕어빵 5개’라는 시어입니다. : 지금은 붕어빵이 천원에 2마리 정도이지만, 1962년생인 시인이 16살이던 1970년대 말에는 붕어빵이 5원에 2개였습니다. 그때 라면 1개에 20원 할 때입니다. 그때 아마도 붕어빵 장사는 5원에 2개, 10원에 5개 이런 식으로 붕어빵을 팔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친구 선재는 자신이 먹다남은 붕어빵을 시인의 가방에 넣어준 게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10원으로 붕어빵 5개를 사서 모두 친구를 위해 내어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붕어빵 5개’라는 시어 속에는 친구를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내어준 선재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 ‘붕어새끼 두어 마리’와 ‘붕어(빵) 다섯 마리’라는 시어입니다. : 어떻게 이번에는 무언가 느낌이 드십니까? 붕어새끼 두어 마리는 물고기 2마리를 의미하고, 붕어빵 다섯 마리는 보리빵 5개를 연상케 합니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빵 5개, 바로 오병이어입니다. 시인이 16살, 중학교 3학년 그 가난한 시절에 경험했던 것은 친구가 가방에 몰래 넣어준 붕어빵을 통해 경험한 오병이어의 기적이었습니다. 해질 무렵 벳세다 들판, 그 빈들에서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주었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것을 내어준 친구를 통해 춥고 싸늘하고 비어있었던 자신의 저녁이 가장 따뜻한 저녁으로 변해갔던 그 기적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나아가 오병이어의 기적은 2천년 전 예수님 만이 행하신 유일무이한 기적이 아니라, 오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핵심인 사랑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보편적 사건임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보편적 사건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나라를 류형선님은 신현정님의 곡에다 다음과 같은 가사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나라 온 땅에> - 작사/류형선 작곡/신현정 아주 작은 어린양 한마리를 애태우며 찾으시는 하나님 보잘것은 없는 과부의 헌금을 넉넉히 받으시는 하나님 강을 따라 버려진 한 아이를 지도자로 삼으시는 하나님 일꾼들이 쓰다남은 버린 돌로 머릿돌을 삼으시는 하나님 가장 낮은 이들을 하늘 높이 올려서 하늘 아래 모든 권세 부끄럽게 하시네 이토록 놀라운 그의 나라 온 땅에 이토록 아름다운 그의 나라 온 땅에 이 땅에 있는 논리와 가치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바로 이 땅에 있으되,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운영원리입니다. 의와 진리가 다스리면서도 사랑의 원리로 작동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4. 빌라도와 그의 아내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궁금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같은 민족의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고소해서 법정에 세웠는지를 묻는 빌라도의 질문에 왜 예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내 나라는…, 내 나라는…, 내 나라는…”이라고 3번이나 강조하면서 이 땅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을까요? 다음주일에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겠지만, 37절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진리에 대해 증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는 로마총독의 권위와 권한으로 갈릴리 시골청년 예수를 심문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되려 예수님은 그에게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으며, 이 세상과 다른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계셨던 겁니다. 고로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주님께서 영원한 멸망 앞에 서 있던 빌라도를 향한 구원으로의 초대였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사랑은 여기에서 거치지 않고 그의 부인의 꿈을 통해서도 현몽하셨습니다. 마 27:19입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마태복음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수님의 사건을 꿈과 관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신 것, 동방박사들에게 꿈에 헤롯에게로 가지 말라고 하신 것, 요셉에게 애굽으로 내려가 다시 지시할 때까지 거기 머물러 있으라고 하신 것, 헤롯왕이 죽은 뒤 요셉에게 다시 일어나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 모두 꿈을 통해서 였습니다. 꿈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시고, 보여주시기 위한 주요한 통로였습니다. 그렇게 꿈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셨던 하나님께서 재판 석에 앉아 예수님을 심문하는 총독 빌라도 아내의 꿈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내는 급히 사람을 빌라도에게 보내어 꿈을 이야기하며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간청하고 경고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평소 예수님에 대해 듣기도 하고, 혹 군중들 틈에 섞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던 표적을 목격한 사람, 진리를 찾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표하는 초대교회 교부인 오리겐(Ὀριγενες, 185년 - 254년)은 빌라도의 아내를 일컬어 첫 번째 이방인 신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그리스와 이집트 곱틱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에 기도하러 갔던 여자들 중에 한 명으로 빌라도의 아내를 기록할 정도로 그녀를 신앙의 사람으로 평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이 이 땅의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던 빌라도의 아내는 세상의 무질서함과 악과는 전혀 다르게 사셨던 예수님에 대해 ‘옳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남편이 부당하게 선고하지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날 새벽 빌라도가 예수님을 대면했던 것은 남편을 향한 이 부인의 간절함과 진리를 사모함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내의 꿈 속에서의 고통과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빌라도는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고백하는 사도신경 속에 기록되어 매 예배시 마다 그의 악한 판결이 되새겨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위스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빌라도는 사후 그의 시신을 거부한 나라들로 인해 그의 머리는 온 지역을 떠돌다 루체른에 위치한 한 해발 2,132m 높이의 산에 겨우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 산의 이름을 사람들은 빌라도의 라틴식 표기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를 붙여 필라투스 산(Pilatus Mt)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져버린 사람의 말로였습니다.



5. 하나님 나라를 살며


20대 청년시기 제게 많은 감명을 주었던 작가는 단연 빙점의 작가로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 1922년 - 1999년)였습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울림을 준 것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 1969년도에 발표한 <길은 여기에>였습니다. 결핵성 척추장애로 무려 13년간 긴 투병생활을 하며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던 중환자가 허무주의의 껍질을 깨고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을 통해 발견한 요 14:6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예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해 발견한 감격의 보고서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기독교 신앙이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것은 어떻게 측정될까요? 수치화 할 수 없고, 계량화 할 수 없는 그 신앙의 영향은 실은 신앙이라는 이름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지고, 나타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까지도 내 놓는 사랑, 자신의 것을 기꺼이 아낌없이 누군가를 위해 내어놓는 바로 그 사랑을 통해 기독교 신앙은 보여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길은 여기에>라는 자신의 경험이 담긴 책을 통해 미우라 아야꼬가 증거하는 바입니다. 코로나 19의 전세계적인 확산 속에서 안타깝게도 기독교와 교회는 이 가치가 희석된 채 몰상식, 몰인정, 몰염치, 몰가치성, 몰지각, 몰인식 등으로 비춰지는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와같은 방향으로 계속 걷는다면, 과연 기독교 신앙은 이 시대 속에서 사람들의 삶에 길잡이가 될 수 있을까요? 빛을 던져 줄 수 있을가요? 얼마 전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에서 조사한 바로는 우리나라 비기독교인 20대의 경우 85%, 30대의 경우 93%가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만약 이 통계대로라면, 현재 한국교회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와 60대가 세상을 떠난 20-30년 후에는 한국교회가 현재의 유럽교회와 비슷한 모습이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교회의 위기는 코로나19로 인해 주일공동예배를 드리느냐 못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주일 ‘움이 트는 생각’에 나눴듯이,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서양귀신’이라며 조롱하며 교회 근처에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은 전염병 이후였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동안 선교사와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그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삶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슬픔과 재앙의 때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불과 1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제국이고, 신민일 뿐 아니라, 제 나라도, 주권도 주장할 수 없던 이 나라는 이제 전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나라, 가장 국민의 생명이 존귀하게 여김받는 ‘참 이상한 나라(Korea, Wonderland?)’로 칭찬받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00여년 전 전염병의 혼란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와 사랑으로 존경받던 교회는 생존조차 고민해야 할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는 생존을 넘어 우리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이 고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시대 속에서, 나아가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줄 수 있을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부터 시작해 이번 한 주간이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더 깊이 묵상하고 따라가는 고난주간입니다. 뭘 위해 주님께서 고난 당하셨으며, 뭘 위해 당신의 생명마저 아낌없이 내어주셨는지를 깊이 새기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는 있으나, 민주주의자는 없다”는 어느 학자의 말과 같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구현해 가는 사람은 희박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있으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은 찾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전염병이 창궐한 이 세태 속에서 세상은 되려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향해 믿고 있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당신들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슨 의미인지를 질문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면서 까지 전하시고, 실현하셨던 그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시대에 우리 삶으로 망치고 훼손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세속적이고도 위선적인 삶으로 인해 무너졌던 그 아름다운 가치를 이제 다시 세워가고 일으켜 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힘과 크기로 대변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와 가치가 지배하는 이 세상 속에서도 주님은 그와는 전혀 다른 가치와 원리가 작동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일구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주님의 뜻을 더 아름답게, 더 의미있게 구현해 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우리를 위해 생명마저 내어주신 주님의 고난을 우리 삶에 참되게 새기는 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찬양: 하늘의 문을 여소서 연주되는 찬양곡은 양재웅 형제님이 연주한 ‘하늘의 문을 여소서’입니다. 이 찬양 들으며 오늘도 우리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서로를 위해 중보하셨으면 합니다. “하나님, 예배하는 이 사람들을 주목하여 주옵소서”. 축복하며 기도하셨으면 합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찬양이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이곳에 임재하소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기도의 향기가 하늘에 닿으니 주여 임재하여 주소서 이곳에 오셔서 이곳에 앉으소서 이곳에서 드리는 예배를 받으소서 주님의 이름이 주님의 이름만이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 하늘의 문을 여소서 이곳을 주목하소서 주를 향한 기도가 꺼지지 않으니 하늘을 열고 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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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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