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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3.22 움오름 주일 설교 -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요 18:28-32)

최종 수정일: 2020년 3월 28일








요한복음 18:28~32

28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29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30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31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32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설교문

1. 무례한 권력


2018년 9월 9일, 요 13:3-11의 말씀을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제목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서두에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 1821-1881)의 ‘양파 한 뿌리’라는 이야기를 소개드렸습니다. 죽음 이후에 맞이하게 된 지옥에서의 또 다른 삶을 다룬 소설이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여러 작품들에는 이와같은 인간에 대한 처절한 탐구가 담겨 있습니다. 더불어 죽음을 주제로 한 인간 구원의 메시지를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사형대 위에서 극적으로 구명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1849년 2월 22일, 정부에 반대하는 서적을 유포한 반체제 혐의로 체포된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침내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28세였습니다. 집행관이 소리쳤습니다.

"사형 전 마지막 5분을 주겠다."


남은 시간은 단 5분,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사형수들은 절망했습니다. 5분 뒤면 본인들의 인생이 끝나는데, 남은 그 5분 동안 무얼할지 몰랐습니다. 그 5분은 후회할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왜 그리 헛된 시간을 살았을지 회한이 들었습니다. 찰나의 시간이라도 더 주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행관은 마지막 1分을 알렸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날 처음으로 느끼는 세상의 소중함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 이제 집행을 시작하겠소."


그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저편에서 사격을 위해 대열을 이루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철컥”하는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별안간 그의 심장을 뚫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멈추시오, 형 집행을 멈추시오!”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형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급박한 전갈을 든 전령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사형은 멈췄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문턱에서 그렇게 극적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그날 밤 도스토예프스키는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선물,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 있었던 것을 조금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죽음의 심연을 응시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사형 체험’은 실은 황제 니콜라이 1세에 의해 계획되었던 연극이었습니다. 이미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20명의 죄수에겐 4년간 수감 뒤 4년의 강등된 사병으로 복무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자신이 직접 소품과 사람의 배치까지 지정한 가짜 사형 절차를 치른 뒤에 집행 유예 선고를 발표하라고 극비리에 명령했습니다. 자칭 민중을 사랑한다는 조무래기 지성인들을 한번쯤은 혼쭐내주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한 후 풀어줌으로써 황제의 자비심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빛나는 차르(царь)의 자비 뒤엔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한 권력자의 무례함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간에 사람의 생명을 경시한 나라치고 온전했던 곳은 없습니다.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시와 이런 무례함이 재정 러시아의 몰락을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무례한 종교와 아웃포커싱


도스토예프스키의 글을 하나 더 인용하겠습니다. 1864년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다음과 같이 인간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어리석다, 보기 드물게 어리석다. 그가 결코 어리석지 않다 할지라도,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아무리 당신이 힘써 노력한다 할지라도 인간보다 더 은혜를 모르는 것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인간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다리를 가진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은 아직 아니다. 그의 가장 큰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이다.


‘무례함’이란? 균형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자신에 대한 과도한 권리주장인 동시에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부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힘으로 다른 사람을 강압하며, 상대방의 생명을 해치기에 이릅니다. 폭력이 정당화 되고, 일상화 됩니다. 힘이 정의가 됨으로써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이 이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 속에 인간의 가장 큰 결함이 무례함이 등장합니다. 이빨과 발톱을 감춘 야만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관복음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진행되었던 예수님에 대한 무례한 심문내용을 상세히 전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부인장면만 기록한 채 그 다음 장소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기록자인 사도 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공관복음에서 상세히 다룬 내용이기도 하거니와 본인이 기술한 안나스의 심문내용과 별 차이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겁니다.


본문은 가야바와 공의회 산해드린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가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정’으로 번역된 곳은 막 15:16이 ‘브라이도리온’이라고 표기한 곳입니다. 원래 발음대로 하자면, ‘πραιτώριον(프라이토리온)’으로서 ‘군 사령관의 천막’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에 파견된 로마총독의 관저는 예루살렘 북서쪽 90km 떨어진 지중해 연안도시 가이사랴에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의 최대명절인 유월절이 이르면 총독의 집무실을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거처는 헤롯의 궁전을 임시 사용하거나 예루살렘 서북쪽의 안토니오 성을 이용했습니다. 혹이나 있을지 모르는 민란이나 소요를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야바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로마총독이 머무는 위 관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때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새벽으로 번역된 단어 πρωΐ(프로이)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을 의미했습니다. 유대인 시간법으로 할 때 제4경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간으로는 새벽 3시 - 6시 사이의 시간대입니다.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예수님은 금요일 새벽까지 안나스의 집과 가야바의 뜨락을 거치며 심문당하시며 밤을 새우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나가 짐작할 수 있는 이 시간대를 요한이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구전 토라인 미쉬나(מִשְׁנָה) 뿐 아니라, 산해드린 규정상 공의회는 밤에 소집될 수 없었으며, 소집되어 구형이나 선고가 이뤄진다고 해도 반드시 그 다음날 재심을 해야했습니다. 그것이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명백하게 위법을 하면서까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굳이 ‘새벽’이라고 요한이 시간을 밝힌 이유가 바로 그들의 위법함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 로마총독이 머무는 곳에 달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관정에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요 18:28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가야바의 무리들은 금요일 해질무렵부터 시작되는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법에 그 식사는 의식적으로 깨끗한 사람만이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간다면 그때 입은 옷을 세탁하고 만 하루가 지난 후에야 깨끗하게 된다는 규정에 따라야 했습니다. 그 당시 그들에겐 기껏해야 12시간 남짓 밖에 없었기에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종교가 가진 의식과 규례라는 것이 본래의 정신을 상실하면 이렇게 사람을 속박하여 규례의 노예로 만듭니다. 종교가 점점 제도화 될 수록 하나님의 자리는 신의 대행자라는 권위 하에 사제의 자리로 대체됩니다. 스스로의 인간성을 지우고, 신성화시키는 신앙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형편에 대해서는 아웃포커싱(배경 흐림)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들만의 천국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3.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가야바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정결을 위해 로마총독의 관정에도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 어둠이 자리한 새벽미명 횃불을 들고 총독을 찾아가 잠자고 있던 총독을 깨웠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목적달성과 신앙적 정결을 위해 타인의 형편 따위는 전혀 고려치 않는 무뢰한들이었습니다.


이에 총독 빌라도가 관저에서 밖으로 나와서 그들에게 무슨 일로 그 새벽에 예수님을 고발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어투로 보건데, 이른 새벽부터 찾아와서 자신의 잠을 깨운 제사장 무리에 대한 짜증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자 가야바의 무리들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요 18:30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산해드린공회는 법을 어겨가며 새벽에 심문했습니다. 변호인도 두지 않은 채 자신들이 세운 거짓중인들의 증언 만으로 급하게 사형을 구형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사형 집행권한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분노에 따라 사람을 돌로 쳐 길거리사형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7장에 기록된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들은 때에 따라서는 법도 절차도 무시하고 이런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 최대한 법을 준행했다는 시늉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형권한이 있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가 죽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기는 이유가 예수님이 ‘행악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행악자란? 말 그대로 구체적인 범죄사실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한 죄, 일명 신성모독죄였습니다.


문제는 이와같은 죄목은 로마총독 빌라도나 로마법으로 볼 때에 처별범위에 속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실을 가야바의 무리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대로 빌라도에게 말하였다가는 자신들이 원하는 사형집행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죄명을 바꾸어 ‘행악자’, 악을 행하여 사회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이 명분과 목적에 치중하다 보면, 길을 잃기 마련입니다. 옛부터 전해오는 격언 중에 “성경을 읽기 위해서 촛불을 훔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경전을 읽는다는 명분을 갖고 있더라도 지킬 것은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의명분을 갖고 있더라도, 거칠고 서툰 방식으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 생명을 살릴 수 없습니다. 경쟁하고 의도적인 차별과 배제를 통해 서로에게 상처만 주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 2:14을 통해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아무리 거룩한 일이더라도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며 해 나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우리의 행위는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열매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에 우리는 신앙을 독려하는 많은 메시지들 속에 교묘히 감춰있는 ‘등불을 훔쳐라’라는 거짓된 행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목적과 명분을 이루기 위해 거짓으로 죄명을 꾸미고 조작하던 가야바의 무리에 빠지지 않도록 분별의 눈을 날카로이 해야 합니다.



4. 죽음 속에 담긴 약속


대제사장 가야바의 무리들이 죄에 죄를 더해서더라도 원했던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로마제국이 허용했던 처형법 중에 가장 혐오스럽고도 고통스러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지금 그 십자가형을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요구했던 겁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도요한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되는 길이라고 각주를 더하고 있습니다. 요 18:32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그림의 어두운 부분이 전체적인 구도에 기여하듯이, 가야바 무리의 정도(正道)와 법을 어긴 억지 요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는 촉진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악한 행위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된다고 해서 악에 거하자는 뜻이 아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가야바의 무리들은 빌라도를 압박해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십자가형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상황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성되어 갈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관여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예언된 죽음에 대해 예수님도 요한복음 12장의 ‘한 알의 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얻게 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2:32-33입니다.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떠한 죽음’이란? 구약 민 21:4-9에 기록된 사건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 3:14을 통해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들었던 것처럼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들리셔야 한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계속되는 광야 길 위에서 마음이 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했습니다.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없다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만나를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평가절하하며 만나가 싫다고, 지긋지긋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광야의 삶이 날마다 기적의 연속이었고,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이 있는 자리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고, 불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복되는 기적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희소성을 잃은 하나님의 은혜, 상시로 주어지는 그 은혜와 인도는 감격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지 당연한 일상의 산물일 따름이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시어 사람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갑각스레 죽어가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죽음 앞에 직면하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도 무엇이 원인이었는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원망이 범죄로 이어졌다는 고백과 더불어 불뱀이 떠나기를 모세에게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처방은 간단하고 쉬웠습니다. 너무 쉬워서 믿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끝내 구리뱀을 쳐다보는 것을 거부한 사람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죄가 용서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같이 쉽고 황당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었습니다. 이 간단하고도 쉬운 구원의 방법을 위해 주님은 어렵고도 힘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주님이 친히 저주받은 자처럼 나무에 매달리심으로써 나무에 매달려야 할 우리를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얻게 하셨습니다.



5. 아버지의 꼬리


왜 그러셨을까요? …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어려운 것은 내가 감당하고, 그 혜택은 사랑하는 이가 누리도록 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지난 주중 읽은 안상학 시인의 시 <아버지의 꼬리>에 이 사랑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 아버지의 꼬리 > -안상학



딸이 이럴 때마다 저럴 때마다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딸에게 장담하다 어쩐지 자주 듣던

소리다 싶어

가슴 한쪽이 싸해진다

먹고 죽을 돈도 없었을 내 아배

아들이 이럴 때마다 저럴 때마다

아부지가 어떻게든 해볼게

장담하던 그 가슴 한쪽은 어땠을까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걱정말고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딸에게 장담을 하면서도 마음속엔

세상에게 수시로 꼬리를 내리는

내가 있다

장담하던 내 아배도 마음속으로

세상에게 무수히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아배의 꼬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배의 꼬리는

떠오르지 않는데

딸은 내 꼬리를 눈치챈 것만 같아서

노심초사하며 오늘도 장담을 하고

돌아서서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꿈틀거리는 꼬리를 누른다



딸을 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학창시절, 육성회비다 등록금이다 뭐다 해서 돈 드는 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큰소리 치곤 하셨습니다.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걱정말고, 너는 네 할 일이나 해!” 그 말을 무턱대고 믿고 자랐던 아들이 아비가 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세상에 나가서 얼마나 꼬리를 내리며 사셨을지를…


이렇게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의 꼬리를 내리고 살아갑니다. 육신의 부모가 이러실진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당연히 그 약속을 지키고 또 지켜가시지 않겠습니까? 이를 민 23:19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코로나19의 창궐(pandemic)로 인해 전세계가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전세계 사망자 수가 1만명을 넘어섰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각 나라가 국경을 닫고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경제적인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유가, 주가, 환율이 춤을 추면서 경제적인 아사 위기에 직면한 개인과 회사가 도처에 아우성입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의 시기가 언제 끝날지, 또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 롬 8:31-32입니다.


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끝이 없이 무례한 인간은 제 욕심을 위해, 제 목적을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착취하고, 왜곡해 왔습니다. 그 결과 함께 살아가야 할 동식물들을 멸종의 길을 내몰았습니다. 터전을 잃은 동물들은 바이러스의 매개체가 되어 사람의 삶 속으로 쳐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탐욕과 무례함이 낳은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애써 그 앞에서 저항해 보지만, 세계는 아직 속수무책일 따름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땅을 고쳐주옵소서. 이 환난의 시기 우리가 인간됨을 상실치 않게 하시고, 36.5도의 온기를 나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죽음에 직면한 이 속에서 제도화 되고, 화석처럼 굳어졌던 우리의 신앙이 본질을 회복케 하옵소서.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가슴으로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을 끌어안고 함께 가는 이 땅의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p.s: 설교 후 양재웅 형제님이 연주하여 녹음해 올린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찬양이 나옵니다. 지치고 힘든 우리를 위한 중보자 되시는 주님으로 인해 힘내시기 바랍니다. 옆에 함께 예배드리는 가족들의 손을 붙잡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힘 내라고, 사랑한다고 격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내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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