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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3.15 움오름 주일 설교 -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요 18:19-27)







요한복음 18:19~27

19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1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22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24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25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26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설교문

1. 아비와 어미


안나스는 은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사위를 통해 줄곧 수렴청정했습니다. 그는 전직 대제사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1인자였습니다. 그렇기에 막강한 금권력과 인맥을 동원하여 총독 빌라도도 모르게 로마군대 천부장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체포된 예수님을 그의 뜰에서 가장 먼저 심문했습니다.


오늘 본문 요 18:19-23에는 예수님을 향한 안나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 가르친 내용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해선 일절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양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랑 반지하방에서 같이 살며 신대원 입시를 준비했던 동기형이 있습니다. 이름 끝에 ‘학’자가 들어가서 ‘학형’이라고 부르다가도, 제가 심술이 나면, ‘닭형’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제가 봐도 정말 목회를 잘 합니다. 그는 제가 장난스레 부르는 이름 ‘닭형’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마 23:37) 교우들을 섬기고 보호하는 ‘아비요, 어미’로 교우들 속에, 교우들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모든 목회자가 이랬으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4:15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기독교 신앙 안에 스승은 많되,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런 면에서 늘 선생의 영으로 충만했던 저는 얼마나 죄송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절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2. 오만한 자의 손


제자들과 그 가르침에 대해 묻는 안나스의 질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제외한 채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답이라기 보다는 되묻는 물음이었습니다. 요 18:20-21입니다.


2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절: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예수님은 안나스가 당신의 진술을 듣고 진위를 가리기 위해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꼬투리를 잡기 위해 물었습니다. 심문과정은 일종의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율법이 규정하던 바와 같이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22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님의 답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나스의 아랫 사람 중의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후려쳤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같은 경우는 아니지만, 저도 이와 비슷한 경험한 한 적이 있습니다.


2009년 여름, 후임목사 선정과 관련한 행정적 협조를 위해 스위스에서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제네바를 방문했을 때 제가 2번이나 모시고 운전을 해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게 고마웠는지 한국에 오면 꼭 들리라고 그분이 제게 당부하셨기도 했지만, 당시 그분이 제가 속한 교단에 책임적인 위치에 있었기에 행정처리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인사를 드리고 가려는데, 그분이 저를 잡아 같이 식사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 제 손을 잡고 담임목사실 앞의 부속실로 갔습니다. 순간 누군지도 모를 30여명의 사람들이 그분과 제 뒤를 따라 왔습니다. 그분이 비서에게 그냥 그것 가져오라고 했는데, 비서가 두툼한 봉투를 금고에서 꺼내 왔습니다.


그분은 제게 그 봉투를 건넸습니다. 열어보지 않고서도 그게 돈이라는 것을 직감했던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사양했습니다. 이러시면 다음에 인사드리러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으니 그냥 마음만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주먹으로 제 오른쪽 옆구리를 세게 가격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어디 감히 우리 당회장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고 거절하느냐?’는 이유였습니다.


순간 ‘억’하며 뒤를 돌아보았더니, 저보다 십수년 연배인 것 같은 분이 눈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근무하는 제 선배목사 중의 한 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교회 안수집사이며, 그 담임목사님의 측근 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시간이 벌써 십년도 훌쩍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제 옆구리를 뒤에서 가격했던 그분의 주먹과 눈빛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안나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발언과 동시에 예수님을 손으로 후려쳤던 그 아랫사람도 그리 생각했을 겁니다. ‘어디 감히…’라고. 하지만, 그것은 되려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오만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블레즈 파스칼이 그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의 오만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오만은 모든 비참을 상쇄하여 이를 제거해 버린다. 이것은 실로 이상한 괴물로서, 매우 명백한 망상이다. 인간은 자기의 지위에서 떨어져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그 지위를 찾아 헤메고 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참 모습이다. 누가 그 지위를 칮을는지 지켜보자. 사악은 자기 편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되면 그 이치를 온갖 광채로써 장식하려고 한다.


안나스의 아랫사람은 오만했습니다. 오만하다 못해 사악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선 안나스의 편이 이치에 맞고, 옳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이치를 온갖 광채로 꾸미려 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그의 손바닥으로 후려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무례하다며 손바닥으로 후려쳤던 그는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표상이었습니다. 오만함을 넘어 사악함에 이른 인간의 표본이었습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한국적인 배경 속에선 이런 오만이 잘 자라는 토양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군대에 3대 깡패가 있다구요. 이름하여 ‘나이, 보직, 짠밥’. 특히 우리 사회엔 장유유서 문화가 있다보니, 나이와 관련하여 ‘어린 놈이… 감히!’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제 스스로 다짐하며 적었던 글이 있습니다.


나이로 젊은이들을 훈계하지 않고,

경험으로 다른 이들을 제압하지 않으리.

권위의 힘을 빌어 ‘감히’라는 부사가

말의 문장 속에 출현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섭섭한 일 앞에서도 내 감정의 노예가 되어

상대방을 지워버리는

너무 의로운 사람은 되지 않으리.


-<분해, 아버지와의 마지막 여행> 중에서



3. 오만과 혐오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인 자존감(自尊感, self-esteem)과 스스로의 품위와 가치를 높이려는 자존심(自尊心, self-respect, ego)은 비슷한듯 하면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자존심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ego의 성격이 강한 부정적 느낌인 반면,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둔 긍정적 존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집중하는 ego가 강한 사람일 수록 신념이 강한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오만과 편견에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오만과 편견에 접어들면, 그 다음 단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혐오와 배제입니다. 테두리 안의 사람과 그 밖 사람을 구분하고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이런 류의 사람을 일컬어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이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기만 알고 살아가는 것은 또 아닙니다. 성경 속 인물 가운데 자기만 알고 살아가던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고 하면 아마도 열의 아홉은 야곱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워낙 어머니 태중에서의 삶부터 시작해서 그의 이름인 야곱(יַעֲקֹב)부터가 자기에게 집중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의 삶은 밧담아람에서 돌아오던 얍복강 나루터에서의 경험이후 조금씩 상쇄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의 삶은 아버지와 달리 역주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형제 속에서도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혐오와 배제가 상시해 있었습니다. 일면 이해도 갑니다. 4명의 다른 어머니들, 그것도 어머니들이 언니와 동생으로 나누고, 또 언니의 여종과, 동생의 여종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그 안에도 위계와 서열이 엄격했지 않겠습니까? 어떤 때는 한편인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떤 때는 남인 것도 같은 관계 속에서 자라는 그들도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서로를 향한 이들의 응집되었던 혐오와 배제는 여동생 디나와 관련한 사건을 계기로 타인을 향한 극단적이고도 폭력적인 양상을 보였습니다. 창 34:1-31에는 가나안 히위족속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성폭행한 뒤에 일어난 참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동생이 당한 일을 듣고 가장 격정적으로 분노한 사람은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친 여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나가 당한 일은 당연히 분노할 일입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는 거짓과 폭력과 살인으로까지 확대되어 갔습니다. 그 두 사람은 거짓으로 세겜 성의 남성들을 속인 뒤 모든 남자를 도륙했습니다. 이때 다른 형제들은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들을 전리품으로 사로 잡았습니다.


혹시나 이들의 이런 행위들이 고대시대의 일이고, 신앙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한 성전이었다고 옹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대시대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넘어서도 한참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종교적 열정을 빙자한 인간의 탐욕과 혐오의 결과였습니다. 창 34:28-29은 당시 야곱 아들들의 집단학살에 이은 행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8절: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절: 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말 그대로 노략이었고, 약탈이었습니다.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거룩한 전쟁도 아닌 인간의 광기에 의한 폭력이었습니다. 물론 시므온과 레위를 비롯한 야곱의 아들들은 비록 그들의 신앙과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법을 알지 못했고,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세겜성의 사람들을 미워하는 감정을 넘어서 죽여야 한다는 배제와 혐오로 치닿고 말았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야곱의 아들들은 어린시절부터 다른 어머니들, 다른 형제들 속에서 함께 공존하고, 사랑해 가고, 조율해 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경쟁하고, 배제하고, 혐오하는 고도의 기술을 습득한 생존기술자들이 되었습니다. 선악을 자신이 판별하려 했던 아담의 후손답게 스스로 신이 되어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는 판결자가 되었습니다.



4. 경계를 넘은 만남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그 심문과정과 폭행 당하는 장면을 요한복음은 한 차례 구타가 있었던 것처럼 간략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가복음은 수차례(막 14:56, 65)에 걸쳐 폭행이 자행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단순히 손으로 후려치는 정도가 아니라, 조롱과 더불어 구타가 계속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막 14:65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


그 자리, 그 현장에 마가는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실을 생생하게 기술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영적 아버지이자 동역자였던 베드로가 그의 부끄러웠던 배신의 행위와 그 현장의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외면하고 부인하던 그 주님이 제자들을 어떻게 보호하셨는지, 어떻게 수모와 폭행을 당하셨는지 그날 그때의 현장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알려 하지도 않고, 거짓으로 주님을 엮으려던 인간의 사악함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편협한 신념의 옷을 입을 때 얼마나 쉽게 혐오와 배제를 할 수 있는지도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만남은 왜 꼭 베드로였는가가 좀 더 세밀히 보입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때도 사회적 경계와 통념을 넘어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 병자, 세리, 창기를 비롯해 사마리아인들까지 가까이 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사회가 그어놓은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 가셨습니다. 배제되고 혐오된 사람들을 품으셨고, 그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그들도 구원의 대상임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 후 승천의 자리에서 믿음과 구원의 대상이 유대인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명하셨습니다. 마 28:18-20입니다.


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이같이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는 기껏 헬라파 유대인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이룰 뿐 더 나아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는 경계선 밖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전통과 통념 속에 학습화 되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때 그들조차 갈릴리 출신이라고 배제와 차별을 받던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를 과감히 개혁해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사도행전 10장의 사건 속으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기도 중 환상과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굳어 있던 베드로를 깨치셨습니다. 수년 전 안나스의 뜨락에서 종교가 편협한 신념의 옷을 입을 때 얼마나 쉽게 혐오와 배제를 저지를 수 있는지를 목격했던 베드로를 깨우셨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 선교로 나아가는 걸음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5. 경계선 밖으로 걷다


어떤 이가 물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차별할까요?”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이러스가 사람을 차별합니까?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배우 톰 행크스 부부도 코로나19에 걸렸고, 케나다 총리 트뤼도(Justin Trudeau) 부인도 양성판정을 받아 총리부부 모두가 격리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특별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피해를 갈랐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더 많은 돈을 일시에 벌기 위해 마스크를 사재기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웃돈을 더 주고서라도 물량확보를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번 코로나19 발병이래 마스크를 한번도 사지 않았습니다. 마스크 착용하지 않고 지내다 2월 23일(주일) 예배 후 꽃집을 들렸는데, 종업원이 저를 보고 “당신은 뭐가 용감해서 마스크를 착용하지도 않느냐?”라는 질문을 들은 이후로 타인을 위해 마스크를 착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3주째 같은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사용 후 말렸다가 다시 다음 날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위생상 좋지 않다. 건강을 위해 매일 다른 것을 착용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매번 바꾸어 착용하면 좋은 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사재기 하는 사람들과 웃돈을 주고서라도 더 확보하려는 사람들의 행위 속에서 정작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조금이라도 개선되었으면 하기에 3주째 같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게 비위생적이라고 굳이 바꿔야 한다면, 저는 면마스크를 삶아서 사용하고자 합니다. 어차피 마스크를 착용하는 첫번 째 제 목적이 저의 비말이 튀어 상대에게 위협이 되도록 하지 않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2번째가 상대방의 비말로 부터 막기 위함).


바이러스가 몸속에 들어와도 사람마다 피해정도가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나이, 건강 상태 등이 중요한 영향을 줍니다.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건강 상태가 좋을 가능성이 큽니다. 평소 좋은 먹거리와 운동과 의료혜택을 통해 건강관리를 잘 해 온 사람들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더라도 중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몸도 약해서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바이러스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차별은 굳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경제적 여유가 없고 약한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바이러스 전파 가능성으로 인해 3월 서울의 경우 민간지원단체(교회, 비영리단체)가 운영하던 무료 급식소 총 25개소 중 13개(52%)가 급식중단을 했습니다. 무료급식소에서 하루 한두 끼를 해결하며 생을 연명하던 분들의 삶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서울 구로구 보험사 콜센터 확진자수가 14일(토) 14시 기준으로 116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어서 기침을 하면서도 마스크도 없이 근무했다는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그들의 무지함과 무모함을 탓합니다. 네, 그럴 수 있고, 그런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다니는 정규직은 바이러스가 유행하면 재택근무하면 되고, 며칠 회사가 쉬어도 제때 월급이 나옵니다. 하지만 콜센터의 계약직 직원이나 영세 중소기업의 직원은 몸살, 또는 감기기가 있어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출근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잘 못알아 듣는다고 하니 쓰던 마스크까지 벗고 통화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바이러스의 차별적 공격을 받게 됩니다.


역사의 기록을 보거나, 현재의 상황을 보더라도 바이러스는 그 사회의 가장 어둡고 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2가지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공포와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고, 그것을 이용해 본인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삶을 삽니다. 다른 하나는 약한 이들, 소외된 이들을 보호하고, 서로 연대하여 도우며 이겨가는 삶입니다.


찰스 디킨즈는 빅토리아 시대(1800년대) 영국의 소설가였습니다. 그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얽힌 두 도시(런던, 파리)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책의 유명한 서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었다.


It was the best of times, it was the worst of times, it was the age of wisdom, it was the age of foolishness, it was the epoch of belief, it was the epoch of incredulity, it was the season of light, it was the season of darkness, it was the spring of hope, it was the winter of despair. we had everything before us, we had nothing before us, we were all going direct to Heaven, we were all going direct the other way.


오늘날 우리 역시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에서도 두 도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창궐(pandemic)한 상황 속에서 어둠을 배경 삼아 배제와 혐오의 삶을 살아갈지, 아니면 빛을 끌어 안고 경계선을 넘어갈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교회공동예배를 멈추고 각 처소에서 드리는 선택을 넘어 소외된 이웃 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차별과 배제가 난무하는 바이러스의 시절 속에서도 가장 지혜의 시대이자 최고의 시절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 땅 가운데서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이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바이러스로 인해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이러스로 인해 더더욱 사지 밖으로 내몰리는 경계선 밖의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분들을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분들에게 지혜와 힘을 더 해 주십시오.


정치가들과 우리 사회가 차별적 바이러스 앞에서 비차별적 선택을 하게 하시고, 되려 더 선별적 사랑으로 경계선 밖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과 힘을 더 해 주십시오. 우리 또한 한 때 경계선 밖의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유한하고 흠많고 부족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우리를 품으신 사랑 앞에서 우리도 경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신앙이 편협한 신념의 옷을 입음으로써 혐오와 배제를 낳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경계 밖의 사람들의 벗이요, 이웃으로 존재해 가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사순절 셋째 주일 경계와 담을 허물고 우리 곁으로 나아오신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 삶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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