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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움오름교회

2020.03.08 움오름 주일 설교 - "곧 닭이 울더라"(요 18:19-27)

최종 수정일: 2020년 3월 9일









요한복음 18:19~27

19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21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22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24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25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26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설교문

1. 거리두기


7번 유전자의 변이로 인해 생기는 ‘낭포성 섬유증’(Cystic Fibrosis)이라는 희귀병이 있습니다. 기관지 안에 있는 점액 분비선에 영향을 주어 비정상적으로 진하고 끈적끈적한 점액이 만들어집니다. 이로 인해 기도 폐쇄와 기관지의 만성적 폐쇄가 야기되고, 세균 번식을 촉진시켜 염증을 유발해 폐렴성 사망에 이르는 난치병입니다.


이런 낭포성 섬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종질병 환자들과의 접촉입니다. 그 이유는 면역력이 약한 점막 때문에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입니다.


2019년 4월에 개봉했던 영화 <Five Feet Apart>는 이런 낭포성 섬유증 환자의 이야기를 매개로 하고 있습니다.


낭포성 섬유증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한 남녀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점점 다가갑니다. 하지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감염 방지를 위해 6피트(182.88cm)의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더 다가갈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서로를 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저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봐야 할 뿐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상대를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희귀성 질환을 앓는 이들처럼 요즘 우리사회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사스 때는 3피트(약 90㎝) 정도 떨어져야 한다고 했는데, 코로나19는 2m에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기를 권고합니다. 그만큼 서로간의 접촉을 피하라는 뜻입니다.


요즘 우리는 기침하거나 말을 할 때 비말이 튈 수 있는 간격 밖의 거리를 유지하고, 될 수만 있으면 만나지 않고 살아갑니다. 교회도 공동예배를 멈추고 가정별 예배나 인터넷 생중계 등으로 대체함으로써 대면모임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생경한 모습은 서로를 만나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손을 잡고 마주보며 위로하던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어 홀로의 시간, 따로의 시간을 더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람사이의 거리라는 것은 참 오묘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거리를 넘어 너무 가까우면 서로에게 화상을 입힙니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서 맴돌며 겉돌다 보면, 떠나게 되고, 소원해 지게 됩니다. 적당한 거리, 상대를 배려한 안전하고도 건강한 거리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인간이란 존재는 소유욕이든 성취욕이든 무언가를 끊임없이 모으고 채워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물론 소유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소유로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와 편중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점 잃어가게 됩니다. 일에 편중되어 사랑과 사람을 잃게 되기도 하고, 사랑에 빠져 일을 망치기도 합니다.그렇다면,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며, 적당한 거리를 지켜가야 할까요?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간에 사회적 거리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요즘, 어떻게 하면, 근원적인 존재의 균형을 유지할지에 마음을 둡니다. 나아가 홀로됨의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할지를 새겨봅니다.



2. 베드로의 거리두기


산과 산이 겹쳐지는 부분을 일컬어 ‘계곡’이라고 합니다. 산이 높을 수록 덩달아 계곡의 깊이도 더해 갑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높은 산이라고 여겼습니다. 자신의 전 인생을 그분께 다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가까이에 밀착했습니다. 조금의 거리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 산이 더이상 산이 아니라는 현실 앞에 섰을 때, 높다고 여겼던 산 만큼이나 절망의 골짜기는 더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아팠고, 절망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밀접한 거리를 지녔다고 자부했던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던 것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보다 3년 전, 어느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헛그물질만 했던 허무하고 지친 아침, 빈 배 위에서 였습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물고기 잡는 일에 문외한 나사렛 출신 목수의 말과 곧 이어진 결과 앞에서 베드로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날 아침 그는 나사렛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그저 이렇게 빌 따름이었습니다.


“주님,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이어서 이 거룩함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눅 5:8 the message)


갈릴리 호수는 베드로의 생의 터전이요, 일상의 자리였습니다. 그 물 비린내 나는 호숫가에서 그는 거룩을 보았습니다. 그 거룩과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의 죄인됨도 목도했습니다. “인간이 빛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더 잘 발견할 수 있다”는 블레즈 파스칼의 주장(Pensées)처럼 베드로는 거룩한 빛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의 깊은 어두움을 보았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극단적인 개념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떠나달라는 것, 내버려 두라는 간청 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요청은 무지와 무능과 더불어 자신의 작음을 발견한 자의 슬픔이었습니다. 치명적인 위해성을 지닌 ‘죄’라는 바이러스를 보균한 존재임을 자각한 이의 눈물이었습니다. B.C 745-695년까지 50년간 활동했던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도 처음에는 이러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현현과 거룩을 목도하며 그도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이에 하나님은 성전 제단 불타는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면서 그의 죄를 제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주님도 베드로의 진솔한 자기인식과 고백 앞에서 그를 붙드셨습니다. 그의 두려움의 근원으로 더 다가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게 될 것이다”(눅 5:10 the message)


두려움은 머물 곳이 아니라, 넘어설 자리입니다. 자신의 작음과 죄됨을 인식한 근원적인 슬픔과 두려움을 떨치고 베드로는 그렇게 일어섰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곧 주님을 따랐습니다. 슬픔의 계곡, 절망의 골짜기에서 발견한 기쁨이었습니다. 슬픔이 낳은 기쁨이었고, 절망 속에서 건진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거룩에 다가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요원했던 거리가 좁아질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3년, 그 시간이 채워질 무렵 베드로는 그 높디 높은 산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또 다른 절망 앞에 섰습니다. 무력하게 잡혀가시는 주님의 뒤를 멀찌감치 따라가며 절감했던 그 슬픔은 3년 전 그날 아침의 슬픔과는 다른 슬픔었습니다. 근본적인 자신의 작음을 인식한 슬픔이 아니라, 믿고 의지했던 분, 그래서 자신의 생을 걸었던 분이 너무나도 왜소하게 추락한 것으로 인한 슬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슬픔 앞에서 베드로는 더이상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토록 가까왔던 주님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멀리서 주님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한 채 상관없는 사람처럼 서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집의 경비병과 종들 틈에 끼어 모닥불을 쬐며 그들의 행위를 모방하고 있었습니다.



3. 닭 울음소리와 눈빛


노회한 정치가 은퇴 대제사장 안나스가 심문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태도가 무례하다며 아랫사람 하나가 예수님을 손으로 쳤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주일에 보다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으로부터 원하는 답변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정해놓은 계획이 다 있었습니다. 그 계획에 따라 예수님을 결박한 채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25절에 보면 베드로는 가야바의 관저에서도 전과 동일하게 모닥불 주위에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결박당한 채 가야바의 집으로 호송당한 예수님을 뒤따라 안나스의 종들 틈에 섞여 왔던 것 같습니다.


그때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비친 베드로의 얼굴을 보며 여러 사람들이 다같이 물었습니다.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절) 그때 주위에 있던 대제사장의 종 중에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의 칼에 맞아 귀가 잘렸었던 사람의 친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절)


요한복음만 보면, 이렇게 총 2번 베드로에게 대제사장의 종들이 질문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공관복음과 비교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모두 3차례에 걸쳐 질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안나스 집의 어린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그치며 질문했습니다. 둘째, 가야바의 집에서 불을 쬘 때 한 여종이 질문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고의 친척되는 종이 문제를 제기함으로 곁에 섰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그쳤습니다. 그때 요한은 베드로가 ‘또 부인했다’라고 담담히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마 26:74막 14:71은 베드로가 횟수를 더할수록 더 강하게 부정할 뿐 아니라, 마지막 세번째엔 저주하며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때 곧 닭이 울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연속된 부인 이후에 닭이 울었다는 사실을 단백하게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공관복음은 닭 울음 소리를 들은 후 베드로가 우는 장면을 기록함으로써 베드로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 26:74-75입니다.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이 본문만 보면, 베드로의 3번째 부인, 닭 울음소리, 통곡이 모두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2번째 부인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담담했던 베드로가 어떻게 3번째 부인할 때 들려온 닭 울음소리에 갑자기 회개모드로, 통곡모드로 급반전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상황이 그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작심하고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던 사람이 겨우 닭 울음소리에 돌아설 수 있었을까요? 더군다나 예수님의 예언을 보면, 닭이 2번 울기전에 3번 부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전에 닭이 1번 울기까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주님을 부인하던 사람이 닭이 또 다시 한번 더 울었다고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을까요? … 우리는 그 답을 눅 22:59-62 가운데 발견합니다. 함께 교독하시겠습니다. (신약 136쪽)


59절: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절: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절: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절: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3번째 베드로의 부인과 더불어 2번째 닭이 울자 주님께서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와 예수님은 각자 다른 공간에 있지 않았습니다. 안나스의 뜰에 이어 가야바의 마당에 이르기까지 한 공간, 같은 시간에 공존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은 몸을 대제사장을 향하고 계셨지만, 당신의 등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대제사장의 하인들 틈에 끼어 모방행위를 하던 사람이 누구이며, 재판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부인하던 사람이 누구인지, 1시간에 걸쳐 당신을 모른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하던 것에 이어 저주까지 퍼붓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최측근이라고 자부하던 제자가 어떤 말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는지 모두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 주님이 얼굴을 돌려 방금 저주를 퍼붓던 베드로의 눈을 바라보셨습니다. 배신당한 이와 배신하는 이의 시선이 만났습니다. 그 주님의 눈을 마주한 베드로는 비로소 “닭이 2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3번 부인하리라”(막 14:30)는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있어 그때 마주한 주님의 얼굴, 그 눈빛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배신한 제자에 대한 실망의 눈빛이었을까요? 그토록 장담하다 추락한 자에 대한 경멸의 눈빛이었을까요? 아니면 저주를 받은 자가 보내는 더 큰 저주의 눈빛이었을까요?


만약 주님의 눈빛이 그러하였다면 과연 조금 전까지 모른다고 부인하며 저주까지 하던 베드로가 통곡하며 그리 슬피 울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눈빛은 그런 류가 아니었습니다. 그날 베드로가 마주한 주님의 눈빛은 신의를 저버리고 도망갔던 아내를 품던 선지자 호세아의 손이었습니다.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껴안던 사랑에 눈먼 아버지의 품이었습니다. 그 사랑과 직면한 순간 그는 자신의 간악함을 직시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엎드려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 새벽 그는 또 다른 비린내 나는 인간의 터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마주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또 다른 갈릴리의 아침이었습니다. 자신의 한없이 작음을 인식하는 갈릴리, 사악한 죄인임을 일깨우는 닭 울음소리와 눈빛이었습니다.



4. 사순절 둘째 주일, 그리고 창립5주년 아침에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를 두고 있는 요즘, 혹 이 시절의 아픔이 우리를 깨우는 닭 울음소리는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혼돈의 시기 교회가 바라보아야 할 주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앞서 6 피트의 거리를 두고 사랑하던 낭포성 섬유증 환우의 이야기 <<Five Feet Apart>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사랑하기에 용기를 내어 30cm의 간격을 줄여 5피트의 거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이야기의 끝자락 사랑하는 이가 얼음 물에 빠져 숨이 멎자 그를 살려내기 위해 감염을 무릅쓰고 인공호흡을 합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인가 봅니다. 상대를 위해 거리를 지켜 주고, 그를 살리기 위해 일말의 거리없이 다가가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의 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이자 창립5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의미있는 아침에 하나님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웬만큼 괜찮은 신앙인으로 살아왔다던 우리의 오만을 깨우시는 닭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일 뿐 아니라, 수시로 배반의 길을 걷던 우리를 살리시려 자신을 던져 거리없이 다가오신 주님의 시선을 봅니다.


사람들은 전망합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지금처럼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래야 하구요. 왜냐하면, 그것이 이웃을 위한 배려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거리를 지킴과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혹 우리가 30cm 더 다가가야 할 고립된 이웃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5년 동안 이 땅 한 켠에 움오름교회를 존재케 하신 주님의 뜻 아닐까요? 작은 일에, 또는 같은 일에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따뜻한 시선에 대한 마땅한 우리의 반응 아닐까요?


작년 여름부터 6개월 동안 포천중리교회 송영윤 목사와 매주 설교원고를 교환하며 격려와 충고를 주고 받아왔습니다. 그러다 지난 2월부터는 모두 9명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012년 1월, 우리처럼 개척교회를 해서 고생고생하면서도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일구어 온 동기형이 다음과 같은 설교를 나눠주었습니다.


'시작은 우연과 억지로 … 후에는 필연과 자원함으로…’


이 문장이 가슴에 "쿵"하고 울려왔습니다. 늘 맘 한켠에 신학교 다닐 때 ‘죽어도 교회개척은 안해!’라고 생각했다며 제 뜻과는 상관없이 시작했다고 여겼던 교회. 어쩌면 우연이라고 볼 수 있지만(하나님의 뜻을 배제하고), 설혹 그렇게 했더라도 이제는 '필연과 자원함으로 걸으라’는 말씀이 화살처럼 가슴에 와 박혔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모방행위를 하던 저를 깨우는 닭 울음소리였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주님의 측은한 눈빛이었습니다.


움오름가족님들은 이 교회에 왜 오셨습니까? 우연입니까? 억지였습니까? …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시몬은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다 잘못 걸려 우연히,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그도 시작은 우연과 억지로였습니다. 하지만, 그후 그는 필연과 자원함으로 그 십자가를 안았습니다. 거리를 좁혀 그의 등에 온통 짊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안디옥교회 설립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는 등 이방선교의 전초기지가 되는 소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마음으로 주님과 십자가 앞에 서야 할까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주님과 걸어가야 할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누구나가 바이러스 전파자가 될 수 있는 시절입니다. 그러기에 적당한 거리는 타인을 위한 배려요, 사랑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런 때일 수록 소외되어 더 고통받는 이들이 있기에 30cm 더 다가가는 것 역시 또 다른 배려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순절 둘째주일, 우리를 살게 하시려 거리없이 내려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묵상합니다. 배신하고, 배교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던 우리를 긍휼함으로 안으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주합니다.


이제 비옵나니, 아침을 깨우는 평범한 닭 울음소리에서도 주님의 시선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우리의 간악과 사악 앞에서 이제 엎드려 통곡하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작음과 죄됨을 인식한 근원적인 슬픔과 두려움을 떨치고 이 시대, 이 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존재됨에 대해 증명해 가는 움오름되게 하옵소서. 그저 생존하는데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라, 생명을 전하는 살아있는 교회되게 하옵소서.


시작은 우연과 억지로였더라도, 이제는 필연과 자원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의 길 걸어가는 5살 교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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