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3.01 움오름 주일 설교 - "함께 서서 쬐더라"(요 18:15-18)

3월 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5~18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설교문

1. 슬기로운 신앙생활


2017년 11월 22일 시작하여 2018년 1월 18일에 종방된 인기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있습니다. 한국 야구에서 괴물 투수로 유명한 한 선수가 메이저리그 계약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여동생을 성폭행 하려던 남자를 때려 감빵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슈퍼스타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이 사람을 중심으로 6m 담장 안에서 수감생활이 전개됩니다.


주인공은 외모상으로 봐도 감정 표현에 서툴며 마냥 착하고 순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은근히 잔뇌도 굴릴 줄 알고 격할 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을 던짐으로써 나름 슬기롭게 감빵생활을 해 갑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도소를 인생의 종착역이라 여깁니다. 한마디로 막장입니다. 자기들 말로는 별 달았다고 하지만, 그게 어디 군인의 어깨 위에 달린 별이나, 저 하늘의 별처럼 위엄과 희망의 별이겠습니까? 그곳은 소망보다는 원망과 후회가 자리한 좌절의 배출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슬기로운 감빵생활>이 그려낸 교도소의 감빵에선 희망이 자라고 사랑이 싹뜹니다. 삶에 대한 아름다움, 사람에 대한 희망, 그리고 사랑이 다름아닌 교도소에서 비춰집니다.


종방된지 2년이 지난 드라마를 생각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와 너무나도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없다고 낙인 찍힌 감빵 안에서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그리고 사랑이 보여지는데, 세상의 소망이라고 자부하던 교회는 존재 자체가 천덕꾸러기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실패자들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는 감빵 안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얻고, 사람을 신뢰해 감으로써 6m 담장 밖의 시청자들까지 감동시켜 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수십 m 십자가 첨탑아래 신앙인들은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더하고, 혐오감을 자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이는 ‘슬기로운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신뢰를 받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현재 우리의 신앙이, 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신뢰를 얻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까?


물론 현 상황을 보며, “이게 보통의 교회 잘못이냐? 사이비 신천지 잘못이지!”라고 할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그들의 잘못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를 거짓으로 위장한 사이비가 나름 열심 신앙생활(주일 이외에도 주중에 월, 화, 목, 금 성경공부, 전도)을 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한국교회의 주일 공동예배 중단입니다. 이제는 주일에 교회에서 모인다는 자체가 죄라고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두고 코로나19 사태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서 목회하는 고향교회 선배가 했던 말이 먹먹하게 울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예배를 더이상 보시기에 지치고 힘드셔서 금지하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땅의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으로부터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보다 못한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해 왔다고 평가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언제쯤이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신뢰를 회복하고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2. 베드로의 신앙생활 -‘이것 쯤이야’


예수님의 수제자, 예수님이 직접 ‘시몬’이라는 이름대신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주신 제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8-19)며 약속받았던 제자…


본인은 나름 주님으로부터도 인정받고, 다른 제자들로부터도 신망이 두텁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쯤하면 됐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자신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그의 자만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체포되신 예수님을 베드로는 멀찌감치 떨어져 따랐습니다. 차마 더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한 무리’라고 들키는 날에는 그의 생명마저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이 심문받는 대제사장 관저로 들어가지 못한 채 그 문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잘 아는 제자 요한이 그 집의 여종을 시켜 베드로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여종’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좀 더 세밀하게 번역하면, ‘여자 아이 종’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보기에 제일 만만해 보이고,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아이를 나름 선택하여 문 밖의 베드로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린 여종이 순간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17절입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이 말 속엔 부정적 답변을 기대할 때 사용하는 부정 불변사인 μή(메)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원문에 보다 충실하게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너도 이 녀석의 제자 중 하나는 아니지?”


어린 여종이었지만, 그녀는 심문받고 있던 예수님을 가리켜 당돌하게 하찮은 대상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이 녀석’(τοῦ ἀνθρώπου τούτου 투 안드로푸 투투)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어린 여종의 입이 아주 걸걸했나 봅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데 있어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소 차이가 납니다. 공관복음은 모두 “너도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 26:69, 막 14:67, 눅 22:56)라는 식의 단정적 표현으로 어린 여종이 베드로를 다그쳤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유일한 목격자 요한은 다르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여종이 베드로를 보며 예수님의 제자라는 심증을 갖고 반신반의하면서 “아니다!”라는 베드로의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다고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여종이 단정적이었든지, 아니면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질문했든지 간에 베드로는 그렇게 반응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자신의 스승에 대해 “이 녀석”이라고 경멸하는 말 앞에서 그는 완전 주눅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분노하기 보다는 되려 “나는 아니라”며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넘어질 때 대단한 것에 걸려 쓰러지는게 아닌가 봅니다. “사람은 큰 바위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人咸跌于垤 인함질우질, 莫垤于山 막질우산)”는 중국 한나라 때의 문장가 ‘양웅’(楊雄)의 “양주목잠”(楊州牧箴)에 나오는 말처럼 아주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진다는 것을 베드로를 통해 재차 확인합니다

그렇습니다. 큰 산과 바위는 크다는 이유로 미리 조심하지만, 작은 돌 뿌리는 작다는 이유로 하찮게 여겨 조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것에 걸려 넘어집니다. 어린 여종에게 일을 부탁한 요한이나 그 여종의 안내를 받던 베드로나 모두 ‘어리니까, 여종이니까!’라고 생각하고 안심했는지도 모릅니다. 설마 그토록 어리고 하찮은 여종으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실패, 그의 무너짐은 하찮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도 매한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 딴 것쯤이야'라고 생각했던 문제 때문에 큰 곤란을 당합니다. '이 정도야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용인했던 일이 평생의 족쇄가 되어 나중에 장애물이 되거나,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3. 함께 서서 쬐더라


우리 월력으로는 3월 말 - 4월 초에 있는 유대인의 유월절은 한 해의 첫 시작인 1월이요, 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겨울이 막 끝나고 봄이 시작하려고 하던 그날의 새벽은 기온이 뚝 떨어져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한기를 느낄 정도로 추웠던 그날 새벽,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심문을 지켜보며 대기중이던 경비병들과 종들은 모닥불을 피운 채 그 둘레에 모여 있었습니다.


자신을 안내하던 여종에게 황급히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슬쩍 그 모닥불 주변으로 다가갔습니다. 여종을 피해 무리들 속에 자신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도 추웠기 때문입니다. 18절이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곧 봄이 시작될 것이라고는 하지만, 새벽공기는 여전히 살을 에듯이 파고 들었습니다. 추위에 떨던 베드로는 얼른 대제사장의 종들 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 틈에서 얼어 붙은 몸을 녹였습니다. 하지만, 활활 타오르는 불 가까이 둘러 서 있었음에도 여전히 추웠습니다. 마음이 시렸습니다. 조금 전 어린 여종에게 “나는 아니다”(οὐκ εἰμί 우크 에이미)고 했던 말이 계속 되살아나 그의 귓전을 울렸습니다, 순간 그 자신도 놀라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엎질러진 물은 점점 살얼음이 되어 그의 영혼을 짓누르며 가슴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분명 지난 3년 동안 그토록 주님을 따라다녔는데,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섬기고, 잘 믿는다고 자부했는데, 그런데도 그는 주님을 믿었던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저 주님의 허상을 주님이라 여기며 따랐을 뿐입니다. 그 결과 빈약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어린 여종의 도발적인 질문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문화연구가였던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희생양>이라는 그의 책을 통해 ‘모방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늦겨울 새벽 추위에 떨던 베드로는 대제사장 관저 안뜰에서 대제사장의 종들과 경비병들 틈에 불을 쬐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경비병과 종들 흉내내며 자신을 교묘히 감추려는 또 다른 모방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을 쬐면서 베드로의 얼굴이 어둠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나 그 모방 행위가 발각되기에 이릅니다.


그는 그 행동을 지혜요, 모략이라고 항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방행위는 명백한 이적행위였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존경했던 주님이 취조받는 상황에서 상대편에 속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하는 모방행위는 이미 주님의 공동체가 아닌 세속의 다른 공동체에 발을 담군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니다”로 시작된 배반은 급기야 베드로를 다른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토대가 허약했던 그는 이렇게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날 공포 앞에서 “아니다”로 변형을 추구했습니다. 그리고 모닥불 주위에서 ‘모방행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곧 “모른다”는 배교의 형태로 자기변형을 해 갈 겁니다. 이러한 변형을 통해 베드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가 아닌 별개의 사람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4. 모방행위를 넘어 사랑으로


오늘은 사순절 첫째주일이자, 3.1운동이 일어난지 101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국가적으로나 신앙력으로 볼 때 모두 의미있고, 중요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무겁고 답답한 맘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위기경보가 심각단계로 격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번주일부터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주일공동예배를 드리지 않고, 영상예배 또는 가정예배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이 모이는 여타의 교회들은 바이러스 감염방지를 위해 비대면 예배로 전환하는데 별 망설임이 없었을 겁니다. 여차하면 교회 전체가 바이러스의 온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처럼 20여명 이하 모이는 교회에서는 몇배의 고민이 더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 주일이면 5살을 맞이하는 ‘움오름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믿음의 토대는 어떠한가 걱정이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렵게 어렵게 지키고 키워온 예배의 불씨가 이 모진 바람에 꺼지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왜 들지 않겠습니까? 일반교회들처럼 일주일에 몇번이고 모임을 갖고 매일 새벽기도를 습관처럼 드려온 신앙공동체라면 걱정이 덜했을 겁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주일예배가 그리 중하지 않게 여기는 분들이 다수 포함된 교회이기에 몇 주가 될지도 모르고, 혹이나 달을 넘어갈지도 모르는 주일공동예배 휴지(멈춤)가 더 치명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마음에 밀려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주일공동예배를 각 가정별, 개인이 드리는 예배로 전환하기를 제안드립니다.


첫째, 교회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공동체성’입니다.

: 움오름교회엔 문제가 되는 신천지와 관련된 분이 단 한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각 개인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격리할 줄 아는 양식을 갖고 계십니다. 이를 감안하면, 반드시 주일에 모이지 않는 것이 옳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이 우리로 인해 불안해하고, 우려를 표한다면 주일에 모이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공공의 선(善)에 더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성 아니겠습니까?


‘공동체성’이란? ‘나’라는 개인보다는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을 내포합니다. “예배에 목숨 걸었다”는 순교의 마음으로 끝까지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드린다는 자세는 무척 훌륭하고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에 걸려 자신이 속한 공동체 뿐 아니라, 사회에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방법을 달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행을 바라며,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맹신을 가르친다면, “기도하면 코로나19에 걸리지 않는다”, “여기 나와서 기도하면 아픈 사람도 낫는다”고 가르친 전광훈씨와 우리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또한 작금의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이것은 마귀의 짓이다”고 말한 신천지의 교주 이만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역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설파하고, 그 말에 “아멘”이라고 화답했던 신천지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둘째,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기 때문입니다.

: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 두렁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제자 중 몇몇이 밀 이삭을 비며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고, 여정이 힘겨워서 입니다. 어디 한곳에 머물러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니며 말씀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며 살았으니 얼마나 삶이 고단했겠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들은 고단한 사람들의 삶에 연민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보다 안식일 법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들의 법에는 사랑은 없고 율법적 잣대와 차가운 시선만 있었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은 안식일이 있기 전에 사람이 있었음을 말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2:27 -28입니다. 찾아서 함께 봉독하시겠습니다.


27절: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을 만드셨을 뿐 아니라, 그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무한 사랑이며, 배려입니다. 이렇듯,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없는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사랑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않는 바리새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사람들을 향한 가없는 사랑과 따스한 눈빛을 원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었듯,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주일 또한 사람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가족님들이 이러한 이유를 받아들이셔서 몇 주가 될지 모르지만, 가족 또는 개인별로 드리는 예배를 기꺼이 선택하신다면, 스스로 이런 본질적인 질문들을 끊임없이 하셨으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가? 그 사랑으로 이웃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일은 무엇을 위해 모여야 하는가? 예배란 무엇인가? 그리고 교회는무엇인가?”


이런 질문들과 더불어 이 기간을 지나며 우리는 급진적인 자기갱신과 근본적인 자기개혁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코로나19사태를 벗어난 후에라도 교회와 기독교는 더더욱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격리될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현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영혼의 깊은 곳을 새롭게 하면서도, 상식이 통하고, 신뢰할 수 있고, 소통가능한 믿음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주님께서 사셨던 삶이며, 십자가였습니다. 동시에 주님이 꿈꾸셨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제 더이상 불 가에 함께 서서 쬐며 ‘모방행위’를 하던 이적행위에서 벗어나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가지 않으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사순절 첫째주일을 맞이하며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의 수난의 길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주님도 아프시고 안타까우시겠지만, 우리도 슬프고, 또 아픕니다. 이런 슬픔과 더불어 우리는 주일에 교회에 모인다는 자체가 죄악시 되고, 이단시 되는 사회의 풍조 속에서 지난 날 우리 행위의 열매를 마주합니다. 허약한 우리 믿음의 토대를 발견합니다.


자신했고, 자랑해 왔건만, 우리는 사회에 신뢰를 주지 못했고, 하나님의 신의도 져버려 왔습니다. 모호한 모방행위를 하며 ‘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존재’로 살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각종 이단과 사이비가 잘 자랄 수 있는 생태계가 만들어 지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대해 무지했고, 주님의 말씀보다는 목사의 말을 맹신하고 추종했던 허약한 우리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하나님~

새벽 찬공기를 가르며 잠자던 이들을 깨우던 사라진 교회의 종소리처럼 이 땅의 교회가 잠자던 영혼을 다시 깨우게 하옵소서. 모닥불가의 모방행위에서 벗어나 진정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주님의 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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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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