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2.23 움오름 주일 설교 - "다른 제자 한 사람"(요 18:15-18)

3월 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5~18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설교문

1. 모략이라는 이름의 거짓말 집단


제가 태어난 곳은 경북 달성입니다. 현재 행정구역상 대구 달성군 유가읍으로 변경된 곳입니다. 그곳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1,084m의 비슬산(琵瑟山)이 있습니다. 산 정상의 바위모습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비파 琵, 큰 거문고 瑟)고 합니다. 봄이면 참꽃(진달래)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억새풀밭이 장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입니다. 그 기슭엔 827년 신라 흥덕왕때 창건했으며, 전성기엔 3,000여 명의 승려들이 머문 유가사라는 고찰이 있습니다.


성장기 매년 한 두번은 유가사를 지나 비구승들의 수행처인 수도암과 도통암을 거쳐 정상산행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비슬산 정상너머 행정구역이 달라지는 청도군엔 단 한번의 발걸음도 딛지 않았습니다. 소싸움과 감으로 유명하기도 한 청도에 1931년 한 남자가 태어났습니다. 26살이 되던 1957년경 그는 어머니 집안의 유전질환인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박태선의 전도관(신앙촌)에 들어가서 10여 년간 활동했습니다.


이후 그는 한국 기독교 이단 역사 상 가장 어린 17살 교주 유재열의 장막성전과 솔로몬재창조교회 등을 거치면서 지식을 습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84년 3월 14일(움오름교회 창립일과 동일) 경기도 과천에 신천지 장막성전이라는 본부를 세웠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만희, 신천지라 불리는 기독교 이단의 교주입니다.


물론 신천지와 그 신도들은 '이만희는 신천지의 교주가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신천지의 교주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만희는 '계시의 말씀을 받은 자, 이긴 자, 총회장님, 대언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영생교 뿐 아니라, JMS를 비롯해 수많은 다른 사이비 종교들이 하는 공통적인 변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추수꾼, 또는 산옮기기라는 이름 하에 진행해온 신천지의 전략은 한 마디로 ‘기생충 전략’이었습니다. 그들이 숙주 삼은 기성교회에 존재를 감추고 잠입해서 해당 교회를 분열시키고, 결국 접수하는 사악한 방법이었습니다.


신천지 구제활동가 정윤석 목사의 말에 따르면 신천지 신도들은 아프면 숨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천지 교리상 새 세계가 열리면 현재 육신을 벗고 새 육신으로 갈아입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천지 신도들은 현재 육신의 건강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천지는 아픈 것이 '죄'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신도들이 아픈 것을 숨기고 무조건 집회에 나옵니다. 얼마 전 한 신천지 교인이 코로나19 증상에도 검사를 거부하고 집회에 나온 것도 이런 교리 때문일 겁니다.


동시에 확진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선에 대해 거짓진술하고, 방역기관의 전화와 조사에 불응합니다. 어쩌면, 자신들이 공들여 작업해 오던 장소(기성교회)와 은밀한 계획들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회피하고 숨는지도 모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주 좁은 공간에 붙어서 집회를 갖는 신천지 교도들은 지금껏 감기 같은 것은 달고 사는 전염병에 취약한 구조를 가졌다고 합니다.


2002년 사스, 2014년 에볼라, 2015년 메르스에 이어 또다시 시작된 변종 바이러스 코로나19(COVID-19)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다른 이 전염성 강한 폐렴 바이러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박쥐에게서 시작해 중간매개체를 거쳤다는 사실입니다.


콜로라도 주립대 연구진이 발표한 <박쥐 체내의 바이러스 분석보고서>에 의하면 박쥐 몸속에는 약 137종의 바이러스가 살고 있으며, 이중에 인수공통바이러스가 무려 61종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바이러스 저장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그 수많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고 생활하는 이유는 ‘알파 인터페론’이라는 바이러스 면역물질이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포유류 중에 유일하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다 보니 몸에서 열이 많이 발생되어 다른 포유류보다 2-3도 높은 39도-41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한쪽에선 쥐인척하고, 다른 한쪽에선 새인척 한다는 의미에서 ‘박쥐같은’이라는 수식을 안고 살아가는 박쥐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큰 잠정적 유해성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박쥐로 기인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묘하게도 ‘모략’이라는 이름 하에 거짓말이 일상인 박쥐같은 사이비 집단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공공의 유익과 사회 안정에 대해 일말의 양심과 책임을 지지 않는 사악한 이단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 내부에서만 이단시하던 존재가 현재는 전국민적인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바라건데, 조속한 시일내에 이 땅에서 코로나19의 박멸됨과 더불어 한국기독교 역사상 가장 사악한 이단집단이 소멸로 가는 기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진리로 포장된 거짓에 현혹되었던 신천지 신도들이 눈에 비늘이 벗겨짐으로써 참 진리의 길로 되돌아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박쥐 인간


듣기엔 다소 불편할수도 있지만, 오늘 본문 가운데 이런 박쥐인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 조심스레 체포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감으로써 굉장히 의리있는 제자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상황을 가만히 반추해 보면, 매우 모호하게 자신의 신앙과 신분을 위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제자에 대해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사도요한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남긴 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요 18:15-16입니다.


15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절: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익명의 그 제자는 대제사장 가야바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다는 것이 안면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관저를 지키는 경비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신분검사나 제제 없이 자유로이 그 집안으로 출입했을 정도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히 관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던 베드로를 대제사장집의 여종을 시켜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들 정도로 그는 대제사장과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이한 대제사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위장인이었습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자신을 감춘 채 예수님을 따른 이 제자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사도 요한이 익명으로 그를 남겨놓았기에 “누구이다”라고 분명히 확정할 수는 없지만, 본문에 사용된 단어를 통해 유추해 볼 수는 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알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γνωστός(그노스토스)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충 안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친분이 두터운 관계, 또는 친족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과의 친족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 자신이었음을 우선순위에 둘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세례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과 친척이었는데(눅 1:5, 36), 엘리사벳 집안이 남편을 비롯해 제사장 가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요한의 아버지 세베데는 갈릴리 지역을 배경으로 여러 직원들을 두고 수산업에 종사했던 상당한 재력가였습니다. 그러니 그 부를 바탕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권력의 핵심자인 대제사장과 적절한 거래를 통해 친분을 유지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베대는 1년에 적어도 3번(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마다 선물(뇌물)과 함께 그의 두 아들을 대동한 채 대제사장의 집을 방문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이런 까닭에 대제사장 집의 하인들도 요한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것이야 말로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지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방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의 일당’이라고 추궁받으며 변명하고 부인하던 그 자리에서도 교묘히 자신을 숨기던 그가 뱀처럼 지혜로웠을지는 몰라도 비둘기처럼 순결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3. 다른 제자 한 사람 -그를 위한 변명


물론 누군가는 이 제자를 변호하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오바댜 같은 사람도 그랬지 않느냐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오바댜와 이 제자와는 결이 달라 보입니다. 똑같이 자신을 감추고 살았지만, 오바댜라는 사람은 또 다른 제자와는 분명 달라 보입니다. 그렇다면, 잠시 오바댜의 행위를 조명해 봄으로써 세속사회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모습이 어떠 해야하는지를 돌아보겠습니다. 왕상 18:1-14입니다. 구약성경 546쪽입니다. 한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1절: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절: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3절: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4절: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5절: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6절: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7절: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8절: 그가 그에게 대답하되 그러하다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9절: 이르되 내가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당신이 당신의 종을 아합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하려 하시나이까


10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께서 사람을 보내어 당신을 찾지 아니한 족속이나 나라가 없었는데 그들이 말하기를 엘리야가 없다 하면 그 나라와 그 족속으로 당신을 보지 못하였다는 맹세를 하게 하였거늘


11절: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나


12절: 내가 당신을 떠나간 후에 여호와의 영이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이끌어 가시리니 내가 가서 아합에게 말하였다가 그가 당신을 찾지 못하면 내가 죽임을 당하리이다 당신의 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


13절: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일 때에 내가 여호와의 선지자 중에 백 명을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로 먹인 일이 내 주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나이까


14절: 이제 당신의 말씀이 가서 네 주에게 말하기를 엘리야가 여기 있다 하라 하시니 그리하면 그가 나를 죽이리이다


오바댜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7번째 왕이자,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했다고 평가되는 아합 왕 때의 궁내대신이었습니다. 아합 왕의 부인이 바알과 아세라 숭배로 민족을 내몰아 갔던 그 유명한 이세벨입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3년 6개월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던 가뭄과 흉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방금 전 함께 봉독한 왕상 18:1은 그렇게 비가 내리지 않던 3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엘리야가 그 소식을 누군가를 통해 왕궁에 있는 아합 왕에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만난 사람이 아합의 궁내대신(아합 집안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신하) 오바댜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를 섬긴다’는 뜻의 오바댜( עבדיה )인 것처럼 그는 어려서부터 여호와를 경외했고 크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배교한 시대에 그것을 명하고 조장한 사람 아래에서 그 명령을 따르며, 한편으로는 여호와에 대한 경건한 신앙을 지켜간다는 것이 정말 가능했을까요? 그에겐 일말의 갈등도 없었을까요? 가장 사악하고 타락한 왕의 시대, 가장 배교와 불신앙으로 점철된 시대에 그 원흉 아래에서 관직을 갖고 산다는 것은 부역하는 것이라 여겨져 스스로 괴롭지 않았을까요?


상호충돌되는 것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리고 왜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어려운 것을 오바댜는 감당해 갔습니다. 홀로 감내해 갔을 뿐 아니라, 그는 당시 핍박받고 죽임당하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이세벨 몰래 백명을 오십명씩 나누어 굴에 숨겨주고 떡과 물을 공급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겉으로는 철저히 희대의 악녀 왕비 이세벨의 꼭두각시요, 아합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양심을 따라 여호와 신앙을 따라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관직생활 중 아합이 모든 신하와 더불어 금송아지를 숭배할 때,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할 때 그는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아합과 이세벨의 신하로서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기도 했다면, 그것은 박쥐요, 위선자요, 기회주의자이지, 진정 여호와를 경외했다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오바댜는 어떻게 여호와의 신앙을 진심으로 유지하면서도 사악한 우상의 소굴에서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이 모든 부분에 대해서 상세하게 진술하지 않기에 드러난 부분으로 그를 보며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때로 고통스럽고 두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오바댜는 죄악과 세속의 중심에서 죄와 타협하지 않고 지혜롭게 신앙을 지켜갔음에 분명합니다. 빛나지는 않지만, 조용히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갔을 겁니다. 조금 전 읽은 왕상 18:9, 14을 보면, 그도 아합 손에 죽을까 근심했고, 두려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용기란? 아무런 두려움이 없기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옳다고 여기기에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바댜 그는 박쥐같은 사람이라고 욕 먹을 지언정, 어둡고 타락한 세속 속에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굽혀 가장 타락한 왕 밑에서 그를 시종들던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 그리고 아합의 궁내대신 오바댜는 모두 동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숨기고 세속 권력 하에서 생활해 갔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을 감추고 신분을 위장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장 타락한 권력 하에서도 부역자처럼 살았습니다. 감추고 속인 그들의 행위 자체는 같을지언정 그들의 동기와 신앙의 진실성은 결코 동일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4.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눅 19:11-27엔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 므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간략히 설명드리자면, 한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먼길을 떠나며 10명의 종들에게 한므나씩 주며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1므나는 100데나리온이었는데, 오늘날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10므나는 1천만원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귀인이 떠남과 동시에 백성들이 종들에게 한 사자를 보내서 “자신들은 그 귀인이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전했습니다. 그런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그 주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와 종들을 불러 세웠을 때 몇몇 종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 결과를 아뢰었습니다. 한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또 다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이에 주인은 그 종들을 착한 종이라, 작은 일에 신실했다고 칭찬하며 각각 10 고을과 5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한 종은 달랐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받았던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보관해 두었다며 한 므나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러고는 주인의 말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합리화 하며 궤변을 일삼았습니다. 주인이 엄한 사람이라 투자금을 날리면 혼낼 것 같아 두려웠다는 겁니다. 이에 주인은 그를 책망하며 그의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열 므나 비유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이 비유는 마 25장의 달란트 비유와 비슷해 보이지만, 주제에 있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와 재능들을 최대한 선용해야 한다는데 강조점이 있는 반면, 본 비유의 강조점은 늦어지는 예수님의 재림과 부재의 시기를 살아갈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 므나 비유에서 “내가 돌아올 때(내가 돌아올 것이므로) 열심히 장사하라”고 주인이 당부하고 떠난 뒤 곧 바로 그를 반대하던 백성들이 종들을 위협했습니다. 주인에 대해 비호감과 적대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종들이 주인의 이름을 내걸고 장사를 한다는 것은 주인으로 인해 고초를 겪고 어려움에 직면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재의 시기, 늦어지는 재림의 때를 살며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며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적절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주인이 종들에게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묻는다는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살았는지, 얼마나 예수님의 편에 서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천년간 늦어지는 주님의 재림 속에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핍박과 멸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며, 예수님 편에 서서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지구의 어느 편에선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자체가 죽음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상황은 비교적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말로 시인하는 것에 제제받지 않는 땅에 사는 우리는 어떤 모습의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예수님의 편을 들며 이 시대 앞에 서야 할까요?


자본과 이익이 최우선시되는 세속주의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말로 그리스도인이다고 고백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누구의 사람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맘몬이라는 금권의 종인지, 아니면 맘몬이 지배하는 세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지를 분명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돈이 가장 우선시되는 물질사회 속에서 한 눈만 지긋이 감으면 한몫 챙길 수 있는데 포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압니다. 잠시만 불의와 타협하고 은밀하게 내통하면 상당한 이익이 보장되는데 그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이해됩니다.


하지만, 우리마저 겉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온갖 불의와 손잡고 사익을 추구한다면, 이 땅은 우리로 인해 더더욱 추악해 지고, 타락해 가지 않겠습니까?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눈 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면, 그런 우리로 인해 공평과 공의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조금이라도 더 임하지 않겠습니까?



5. 재의 수요일에


어려운 때가 되면 평소 우리의 일상이 어떠했는지 예리하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재해는 그 사회의 실력과 민낯을 여지없이 나타냅니다. 사회적 신뢰의 수준이 확인되고, 공동체와 여러 조직의 저력이 적나라하게 비교됩니다. 사재기와 매전매석을 일삼는 수준낮은 곳에서는 소통이 단절로 바뀌고, 신뢰가 의심으로 바뀝니다. 공익보다는 사익이 우선시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태도와 책임감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요?


앞서 한국 기독교 역사상 가장 사악한 이단이라고 신천지를 언급했지만, 그 또한 성경을 오독하고 오용한 한국기독교 패착의 산물일 뿐입니다. 감염경로가 미궁이며, 확진자 급증하는 이때 감염병 예방 및 관리법에 의해 광화문광장 집회를 불허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롱하듯 집회를 강행한 전광훈씨 또한 한국교회의 거짓된 진리의 결과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천지를 욕하고, 전광훈씨를 비난하지만, 그 잘못됨의 근원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 잘잘못을 따지고, 남 탓하며 희생양을 만드는 것을 넘어 개혁과 변화가 시작합니다.


기억하시는 바와 같이 오는 수요일은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6주 전에 시작되는데, 주일을 제외하면 36일밖에 되지 않으므로 사순절 첫 주일 전 4일을 더한 40일로 합니다. 그 시작이 재의 수요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재의 수요일엔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를 이마에 발라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던 유대인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비록 재를 뒤집어 쓰지 않고, 이마에 십자가를 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번 사순절은 우리를 새롭게 하는 참회의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모호하게 자신을 위장하며 그리스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게 살아왔던 우리 자신에게서 되돌아 서십시다. 근원적인 우리의 잘못을 몇몇 이단과 특정인에게만 전가했던 지난 과오를 인정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가십시다.


그때 우리는 늦어지는 재림, 주님의 부재의 시간,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회 속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는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이 시대의 오바댜로 변해 갈 겁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거짓이 지혜요, 모략이라고 가르키는 미혹됨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점점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불필요한 사회악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들이 우리의 잘못에 의해 기인되었지만, 이토록 믿음에 적대적인 시대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되돌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 땅에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이 땅을 고치시고, 우리를 치료해 주옵소서. 어려운 시절 불철주야 어떻게든 이 전염병을 막아보겠다고, 고쳐보겠다고 자신을 던지고 있는 의료진과 공무원들에게 지혜와 힘을 더해 주옵소서. 이 땅의 사람들 또한 소통하며, 신뢰하며, 공익을 우선시하는 높은 시민의식을 보이게 하옵소서.


뿐만 아니라, 이 혼란의 때, 어려움의 때에 사람들의 마음을 혼탁케 하고, 거짓으로 일관하는 사이비와 광장의 종교사기꾼이 우리 신앙과 별개의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인식하며 더더욱 우리를 믿음과 말씀으로 바로 세워가는 이 시대의 오바댜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어려움의 시간을 지나며 사람들의 육신이 치료되어 갈 뿐 아니라, 이 사회의 병약한 부분이 보완되게 하옵소서. 겉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속의 사익을 보다 우선시 했던 우리 믿음이 새로워 지는 변화의 시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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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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