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20.02.16 움오름 주일 설교 - "문 밖에 서 있는지라"(요 18:15-18)

2월 24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5~18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16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18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설교문

1. 속수무책


인간은 처음부터 순발력 있는 판단력으로 생존을 유지해왔습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이런 순발력있는 판단력을 보며 아직도 초원지대에 살았던 경험을 유전자 속에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강한 이빨과 발톱도 없고, 내세울만한 힘도 없는 미약한 신체를 가진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빠른 판단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도망가야 할지, 숨어야 할지, 아니면 상대와 친해져야 할지를 가장 빠른 시간에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생존을 위한 판단과 결정이 재빠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속수무책이라 합니다. 어떤 이(김경후 시인)는 속수무책을 일컬어 ‘내 인생 단 한 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느냐 묻는다면 척 내밀어 펼쳐줄 책…’이라며 익살스럽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속수무책(束手無策)이라는 말 자체는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손이 묶여있어 어떻게 해볼 도리나 방책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무대책’인 셈입니다.


2017년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시’란에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 조항록 시인의 시 ‘속수무책’을 기억하실 겁니다.


속수무책 /조항록

도마 위에서 안간힘을 쓰는 광어를 어찌할까

이를테면 연민 때문인데

납작 엎드려 살아온 것이 죄는 아니지 않은가

한쪽만 보고 살아 다른 한쪽을 외면한 것이

정말 죄는 아니지 않은가


저 살 속에 저며 있는 바다의 노래에

귀 기울이면

가시들의 일상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마지막 헤엄은 눈물 속을 헤매는 법이고

이제 속속들이 칼날이 닿으면

한 접시의 순결한 고백만 남을 것


모든 속수무책의 생애에 대해

오직 천사 같은 몸부림에 대해


어떤 이(성향숙 시인)는 이 시를 보며 ‘도마 위의 광어’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힘없는 서민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못 배웠다는 이유로 온갖 멸시와 차별, 착취당하면서 속수무책 살아갑니다. 하소연 할 곳도 없고 기댈 언덕도 없이 최소한의 행복할 권리마저 빼앗깁니다. 밤낮 구별 없이 열심히 일해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환경은 결코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영화 <기생충>을 보면, 상징적이고 예언적인 경고가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몰고 온 격차와 갈등은 극복되기 어렵고 오히려 점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끝내 공존이 아닌 파멸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요즘 미국에선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기간입니다. 특이한 것은 후보 중 무소속이면서, 가장 나이 많은 78세의 버니 샌더스에 20대 청년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샌더스 의원이 젊은 시대의 필요를 잘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샌더스를 향한 지지와 열광 속엔 ‘돈이 없으면 대학을 다닐 수가 없고, 대학을 다니지 못하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현실’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들 20대에겐 78세 백발의 버니 샌더스가 유일한 대책으로 다가온 셈입니다.



2. 베드로와 속수무책


오늘 본문 속엔 또 다른 속수무책의 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날 밤 감람산 한켠의 겟세마네 동산엔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승인치 않은 대규모의 병력이 감람산에 도달했습니다. 성전경비대를 비롯해 로마의 천부장까지 개입된 대규모 체포조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포승줄로 묶은 채 이전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횃불과 칼과 몽둥이로 중무장한 대규모의 병력과 순식간에 벌어진 예수님의 체포로 인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그들이 이전에 쏟아냈던 충성의 다짐은 포말처럼 사라져 갔습니다.


그렇게도 권능있던 스승이 그야말로 손이 묶인 채 끌려가는 속수무책의 그 현장을 목격했던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막 14:50)”고 당시를 기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남아 예수님을 따르던 한 청년이 병사들에게 잡히자 살기 위해 이불 삼아 두르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막 14:51-52)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끝까지 지켜봤던 자신마저 예수님을 끝내 버렸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고, 힘이 되지 않은 채 체포되신 예수님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셨습니다. 그때 모두가 떠난 자리, 사방팔방으로 도주해 버린 자리에 슬금슬금 다가서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한명은 베드로였고, 다른 한명은 ‘또 다른 제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참 명색이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과 몇시간 전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마 26:33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눅 22:33입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단호하고도 믿음에 찬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버리고 떠났음에도 그는 조심조심 체포된 예수님의 뒤를 따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예수님이 잡히신 뒤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 베드로의 본격적인 배신의 행위가 드러납니다. 그는 그날 새벽 닭이 울기 전 주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주하기에 이릅니다. 도대체 무엇이 베드로를 이토록 갑자기 무너지게 만들었을까요? 왜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과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시작의 단초는 오늘 본문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 체포당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줄행랑을 쳤던 베드로는 이후 한 제자와 더불어 슬그머니 대제사장의 사저로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의 상황을 살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다른 제자와 달리 베드로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다른 제자에 대해선 다음 주일에 나눔). 그 모습을 16절의 앞부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이때 문은 다른 복음서들을 볼 때, 안나스의 집이 아니라,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대문이었습니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살펴볼 용기가 없었기에 주저주저하며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서 있었다’는 동사 ἵστημι(히스테미)는 ‘머물러 서 있다’, ‘세우다’라는 뜻 이외에 ‘달아주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달아주다’라는게 어떤 것인지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정육점입니다. 몇근, 또는 몇그램을 이야기하면 거기에 맞추기 위해 저울에 달아 조정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들어갈지 말지, 어떻게 할지 그 마음을 저울에 달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을 마 26:58은 ‘멀찍이’라는 부사를 사용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는 이렇게 번역함으로써 베드로의 내면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들이 대제사장의 안뜰에 이를 때까지 베드로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갔다. 그는 하인들 틈에 슬며시 섞여서, 일이 어떻게 되는지 지켜 보았다.


뛰어난 문학 작품들 속엔 가끔 슬쩍 들어있는 하나의 단어가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경우입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안전한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갔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 서던 이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곁눈질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슬며시’ 주변에 자신의 존재를 섞었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용기도, 그렇다고 해서 함께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같이할 용기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나아가지도 되돌아가지도 못한 속수무책이 되어 마음의 저울만 달고 서 있는 ἵστημι(히스테미)한 겁니다.



3.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속에서 길을 만나다


동물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숲에 사는 원숭이와 초원에 사는 원숭이 사이엔 기강의 차이가 확연하다고 합니다. 숲은 숨을 만한 곳도 많고, 이리저리 피할 장애물도 많아 포식자로부터 방어할 시간을 벌어줍니다. 하지만 아무런 엄폐물이 없는 초원은 상황이 다릅니다. 언제 어디서 위기가 시작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늘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위험이 감지되는 순간 뛰어야 생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같은 종의 원숭이라 하더라도 어떤 상황에 터를 잡고 있느냐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베드로가 왜 문 밖에 서 있었습니까? 사람들이 왜 마음의 저울에 달면서 ἵστημι(히스테미)합니까? 생존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받을 내딛느냐? 되돌아 가느냐? 주저주저하는 것 같지만, 그 자체가 생명에 대한 애착이요, 생존에 대한 욕구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생명에 대한 본능이요, 생존에 대한 욕구라 하더라도 모든 속수무책의 순간에 이렇게 반응하고 대응하는 것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같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우리가 견지해야 할 모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2주 전 읽었던 속수무책 에 처한 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속에서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눅 16:1-8입니다. 찾아서 한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1절: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절: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절: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절: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절: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절: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절: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자주 사람들을 당혹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훔친 도둑, 배임과 직권남용한 거짓말쟁이 청지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롭게 했으므로 칭찬했다’고 평하셨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얼마전 가까운 한 설교자는 이 본문을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볼 여지도 있습니다. 해고통보를 받은 청지기가 재취업 또는 자기사업을 위해 주인의 고객을 자기 편으로 빼돌리는 준비성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 아닙니다. 동시에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지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진정 전해 주시고자 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받은 이유는 그의 윤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섬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 성품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를 가만히 머리 속에 떠올려 보십시오.


횡령과 배임이 확인된 청지기가 주인 앞에 불려왔습니다. 그는 그의 불의한 행위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는 주인 앞에서 단 한마디도 소명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주인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 법적 고발조치를 당하거나 당시 보상법에 의거하여 배상하지 못할시 그의 신체가 억류될 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 모두가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 어떤 법적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조용히 그가 청지기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만 마무리짓기를 원했습니다. 이때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너그러운 마음과 제한없는 자비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주인의 이런 관용이 그의 성품을 규정하는 핵심임을 확신하고 그의 미래를 걸었습니다. 그 결과 채무장부를 되돌려 주기 전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사람들이 주인에게 더 감사하게 했습니다(주변에서 주인의 평판이 더 좋아짐). 나아가, 불확실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우호고객을 확보케 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너그러운 주인이 자신을 칭송하는 그 지역사회 사람들에게 “그것은 청지기가 속인 것이다”며 원래대로 돈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그 성격과 성품에? … 아닙니다. 너그러운 성품의 주인은 결코 그럴 수도, 그렇게 하지도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청지기가 알고 백분 활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지혜롭다고 칭찬받은 이유입니다.


그렇다면,비유의 마지막 8절에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악한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불의한 청지기)도 이처럼 자기 주인의 성품을 알고, 그 성품을 적극 활용해 미래를 대비하며 살아가는데, 믿음의 자녀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인생의 주인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모를 뿐 아니라, 그 성품에 기대어 미래를 준비해 가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4.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


20세기 초 가장 위대한 수도사라 할 수 있는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푸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토록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결정적일 때 되려 비신앙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를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보느냐? 아니면 그 상황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더 확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유회 하나를 가더라도 혹이나 비가 올 때 어떻게 할지 ‘우천시 계획’을 짜는 것이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더 중요한 일에 1안, 2안, 3안을 만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안전장치입니다. 결정적일 때 보호받고 생존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더 큰 인생을 살면서, 그 인생에 이어 올 또 다른 인생을 생각지도 대비하지도 않습니다. 그 인생의 주인이신 분의 성품을 알려고도, 활용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라며 우뇌와 좌뇌 사이에 있는 ‘잔뇌’로 짠 계획이 미래를 준비하는 방책이 될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는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삶을 새롭게 디자인할 것을 요구합니다. 생의 온갖 종류의 문 앞에 발을 들일 것인가? 뺄 것인가를 저울질하는 우리를 향해 근본적인 선택을 권면하십니다.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맡기며 살아갈 것인지, 그 하나님을 알며 살 것인지 택하라 하십니다.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한 발은 예수님을 따르고 다른 발은 여차하면 도망 칠 준비를 하며 따를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에 우리 삶을 배팅하며 살 것인지 우리 삶의 변혁을 요구하십니다.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저울질, ἵστημι(히스테미)하고 서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왜 그저 왠만큼 믿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과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아갈까요? 왜 수많은 일의 계획을 짜면서도 이 인생과 그 너머의 인생에 대한 궁극적인 생각과 대비없이 세월을 보낼까요?


‘멀찍이’, ‘적당히’가 생존을 위한 가장 적확한 처세술이 되어 우리 신앙마저 무색, 무취, 무미의 그리스도인으로 존재하려는 걸까요?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적당히 종교생활 함으로써 ‘교양있는 신앙인’으로 분류되는 것에 왜 만족할까요?


불의한 청지기, 이 시대 세상의 자녀들도 나름대로 그 주인의 성향과 성품을 파악하고 그를 이용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지 이제 눈을 뜨게 하옵소서.


생의 문 앞에서, 선택의 자리에서 저울질하며 살아가는 얄팍함의 자리에서 이제 일어나 하나님의 선하심에, 그 인자하심에 우리 삶을 내어맡기는 주님의 사람들, 빛의 자녀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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