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2.22 움오름 주일 설교 - 박남희 목사"초대하시는 예수님"(마 2:1-12)

2019년 12월 23일 업데이트됨













마태복음 2:1~12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9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10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2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설교문

어느새 또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한해가 저문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성탄절의 기쁨은 줄어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 예수님께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신 그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 보다 깊고 우주보다 크신 그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 예수님 오신 성탄절은 예수님을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즐거워합니다. 신비하게도 인류의 아주 특별하고 기쁜 날입니다.

이렇게 온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첫 성탄절 이야기가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첫 성탄의 의미를 살필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기 원합니다.


2,000년전 동방에 사는 박사들이 어느 날 하늘에 뜬, 상서로운 별 하나를 보았습니다. 보통의 별들과 다른, 뭔가 복되고 좋은 일이 생길 것을 알려주는 별이었습니다. 박사들이 보기에 그 별은 어디선가 위대한 왕, 영광스런 왕이 태어나시거나 혹은 태어나셨음을 알려주는 하늘의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왕께 경배하기 위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가지고 별이 가리키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유대땅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태어나신 왕, 유대인의 왕이 어디 계신가? 물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 온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헤롯 왕이 아닌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라면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소문이 번져서 헤롯왕의 귀에 들어갔고 놀란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시는지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박사들에게 베들레헴으로 가보라 했습니다.


박사들은 헤롯 말을 따라 다시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왕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가는 이들은 오직 이들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박사들에게서 분명히 그들의 왕이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아무도 왕을 만나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조상대대로 언젠가 자신을 구원할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믿고 그 메시야가 오실 날만을 기다리며 지금껏 살아온 이들입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들은 그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큰 소동만 벌이다 끝났습니다.


3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여기서 ‘소동했다’는 헬라어로 “타랏소”인데, 흥분시키다, 어지럽히다, 무섭게 하다, 당황하게 하다, 불안하게 하다, 동요하게 하다, 슬픔, 근심을 끼치다“ 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조상 대대로 그토록 그리스도를 기다렸던 그 메시야가 오셨음에도 어찌된 일인지 무척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치 안 오셔야 될 분이 오신 것처럼, 기다리지 않은 이, 초대하지 않은 이가 갑자기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것처럼 놀라고 무서웠습니다. 불안했습니다. 기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만나러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동방박사들이라면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겠어요? 이들은 자신들의 왕이 오셨다는 데 왜 기뻐하지 않지? 환영하지 않지? 왕을 경배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이들이 진정 그리스도를 믿었나? 진실로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렸나? 박사들은 이런 의아함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지 얼마 안된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계속 길을 떠났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오신 그리스도를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베들레헴을 향하는 동방박사들의 뒷모습에서 예수님의 슬픔이 느껴집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신 예수님의 쓸쓸함, 아픔이 느껴집니다.

요한복음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의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전에 동방에서 보던 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 별이 그들 앞에서 인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곳에 멈추어 섰습니다.

9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너무 놀랍습니다. 처음에 큰 왕이 탄생하셨음을 알려주던 그 별, 그 왕의 별이 다시 나타나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 계신 곳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신비롭습니다. 베들레헴이 어디 있는지, 아기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 알지 못한채 그들이 가고 있을 때, 그 길에서 헤메지 않도록,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고생하지 않도록 친히 별이 이들의 길을 인도한 것입니다.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갔다”

이 말씀 속에는 그 별이 어떤 의지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별이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 계신 곳으로 정확하게 데려가겠다는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이것을 위해서 직접 인도하는 행동한 것입니다.


그 별은 2절, “그의 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별은 곧 왕의 별, 예수님의 별입니다. 예수님의 별은 곧 예수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박사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은 눈에 보이는 별을 너머 예수님 자신입니다. 별의 행동은 곧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박사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외적으로는 박사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 같은데, 더 깊은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별을 통해 그들을 부르시고 친히 자신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올 때 친히 자신 앞으로 이끄셨습니다.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그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부르신 분도 인도하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 ‘어서 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해 예수님께 나아가면 우리를 자신에게로 친히 인도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왜 그들에게 예수님 탄생소식을 전하게 하셨겠습니까? “내가 왔다. 그리 알고만 있어라”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내가 약속대로 너희를 위하여 왔으니 나에게 오라 나를 만나러 오라” 하신 뜻 아니겠습니까?

천사들이 한 밤중에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가서 보라 하였습니다. 눅2:11-12,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의 표적이니라”


2,000년 전, 예수님은 동방박사를 부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에게 나아오라”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초대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예루살렘 백성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잘 믿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언제나 바라보며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너무 기뻐서 두 손을 흔들며 환영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자신들 안에서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습니다. 기쁘지 않았고 환영하는 마음도 없었고 오히려 당황스러웠고 불안했고 두려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데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른척하고 싶었습니다.


이들의 믿는바 대로라면 이들이 박사들보다 먼저 베들레헴으로 뛰어가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텅텅 비어야 했어요. 예수님 계신 마굿간이 그들로 가득차야 했습니다. 정말로 그리스도가 오셨을까? 혹시 의심 되어도 속는 셈 치고라도 가봐야 했습니다. 정말 오셨는데 내가 그 분을 놓치고 잃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워서라도 동방박사들과 함께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통해 보건대,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은 것 같지만 사실 안 믿었어요.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 같지만 사실 안 기다렸어요. 그리스도를 아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낯선 분이셨어요. 하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다 보니 자신들이 정말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잘 믿고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던 겁니다. 속는 줄도 모른채 스스로 속고 있었던 거죠. 결국 이들은 끝까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들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에 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 일치되지 못한 행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지식이 그들 안에 내재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단지 머릿속에만 있었습니다. 머리 속의 지식이 마음으로 내려와 내재화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지식은 있었으나 그 지식의 본체이신 그리스도와 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성전에 할례 받으러 온 아기 예수님을 보자 마자 단번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안나는 아기 예수님을 보며 성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지식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오실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그리스도와 내적으로 관계를 맺어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지식의 본체, 실체를 경험하고 그 대상과 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지식은 더 온전해지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고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사과에 대해 몇 가지 지식이 있습니다. 사과의 종류에는 부사, 선홍, 아오리 등이 있고 그 맛은 새콤달콤하며 과즙이 풍부하고 영양소로는 비타민(A,B,C,K), 칼슘, 칼륨, 인, 철분, 마그네슘, 망간 등을 가진 맛있고 영양 풍부한 과일이다 라는 지식이 있습니다. 이렇게 제가 사과에 대해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과를 제대로 아는 걸까요? 이런 지식만으로 제게 사과가 언제든 먹고 싶은 사랑하는 과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거의 가능성이 없지요. 사과의 맛이 새콤달콤하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맛인지 새콤달콤하다는 말 자체만으로는 결코 이해 불가능합니다. 한입 베어 먹을 때 설명이 필요 없지요. “아~ 이 맛이구나.” 절로 깨우칩니다. 제가 사과는 영양이 많은 과일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제 몸에 도움이 되나요? 아니죠. 실제로 먹어서 내 몸에 흡수되어야 그 영양을 제 몸이 누리게 되는 거죠. 이렇게 사과라는 과일을 알고 또 먹어봄으로 우리는 사과를 더 온전히 알게 되고 사과라는 과일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만 있고 실제로 그 지식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못하면 그 앎은, 믿음은 반쪽짜리입니다. 불완전합니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흔들립니다. 예수님이 정말 계신가? 내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잘못된 것을 믿고 있지는 않나? 흔들립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과 함께 그 지식의 본체,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해서 안다면 그것은 흔들릴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 지식의 대상과 내적인 관계를 맺고 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보인 반응은 예수님과 이들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가졌으나 그 지식의 대상인 예수님과 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예루살렘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나는 어떤가? 질문하게 됩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습니다. 이들처럼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삽니다. 주일 성수 철저히 하고 헌금하고 교회 봉사합니다. 겉으로 볼 때 우리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는 만큼 나는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님과 내적으로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고 있다고 인정하실까요?

11절 보겠습니다.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이 별이 멈추어 선 곳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정말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습니다.

“와 정말 아기가 있어요. 왕으로 나신 아기가 있어요. 우리가 믿었던대로 정말 왕이 태어나셨어요.” 박사들은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직접 목도하면서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니었어! 감격하고 또 감격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별로서 이들을 부르시고 친히 인도하셔서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왕이 태어나셨다는 그들의 지식에, 그 마음의 믿음에, 그 실재를 직접 눈으로 보게 하셨습니다. 친히 만나주심으로 그들의 믿음이 경험된 믿음, 만지바된 믿음이 되게 하셨습니다. 박사들은 이제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께서 왕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박사 각 사람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2,000년 전 동방박사를 초대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2,000년 전에는 예수님께서 이들을 동굴 마굿간으로 초대하셨지만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처소는 내 영혼의 마굿간,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셔요. 예수님은 우리의 영을 거쳐 삼으시어 현존해 계십니다.

요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그에게로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 안을 거처로 삼아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저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은유적 표현이 아닙니다. 실제입니다. 16세기 (1515년-1582년) 스페인 성녀인 아빌라의 테레사는 실제 자신의 기도 경험을 통해서 “주님께서 항상 제 영혼 안에 현존해계셨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 소품집 』104쪽)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다른데로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나 밖에서 헤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내 영 깊은 곳에 현존해 계십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나를 초대하십니다. “내게로 나아오라 내게로 나아오라” 하십니다.


정 원이라는 목사님이 계셔요. 한 날은 너무 외로워서 친구랑 수다를 좀 떨어야겠다 싶어서 전화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수화기 내려놓으라”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예수님 이런 거까지 참견하십니까? 제가 외로워서 그래요. 제가 전화하고 예수님께 나갈께요” 라고 짜증스럽게 항변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네가 외롭니? 나는 더 외롭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그때까지 예수님께서 외로우실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는 더 외롭다”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목사님은 몹시 우셨다고 합니다.


2,000년 전 자기 백성인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외면당하시어 외로우셨던 예수님은 오늘날도 역시 많이 외로우십니다. 예수님을 안다, 믿는다 하는 이가 넘쳐나고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많으나 정작 예수님은 외로우십니다.

입으로는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진정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어떤 분이세요? 예수님 사랑은 어떤 사랑이예요?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제가 알고 싶어요” 예수님을 구하는 자가 적습니다. “얘야~ 내가 얼마나 아침 햇살같이 새로운지 아니? 네게 알려줄게 나에게 와” 예수님께서 부르셔도 “예수님! 저는 지금 제가 아는 예수님으로 만족해요. 저는 이미 다 알아요.” 하면서 더 깊은 앎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께 귀를 막습니다. 또 내가 가진 성경지식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요 관계를 보증한다고 여기고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아닌 청구서 같은 많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이러다 보니 예수님도 외로우시고 우리도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 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채 외적인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영적인 공허함이 커집니다. 신앙의 년수만큼 공허함이 큽니다. 예전에 제가 어떤 곳에 설교하러 갔는데 한 60대 중반 되신 권사님이 그러셔요. “저는 모태신앙인데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제가 삶에서 큰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이 분의 말씀 속에는 내가 예수님 믿는 신앙생활은 오래되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영적으로 공허해요. 라는 의미였어요. 이 분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은 굉장히 솔직하고 용기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공허하고 답답했으면 처음 보는 목사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 놓으셨겠어요. 사실 참 안타깝습니다. 저는 이 분의 고백이 단지 이 분만의 고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러나 안 그런척, 괜찮은 척 하고 있을 뿐이죠. 저는 교회가 이런 영적인 고백들들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인 고민을 가지고 있을 때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비법이 있지 않아요. 말씀 한 절, 말씀 한 단어를 곱씹는 것으로, 혹은 예수님을 잠잠히 바라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랑의 마음으로 불러보세요.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영적인 고민이 있다면 여러분의 영혼의 동반자, 안내자이신 담임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하세요. 우리가 예수님과 내적인 관계를 맺으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에서우리를 찾아오셔요. 찬양 가사에서 뿐 아니라 대중가요 가사를 통해서도 우리를 찾아오셔요.


제가 한 10년 전 쯤 교회사역을 할 때, 여름 휴가를 마치고 교회로 돌아가다가 차 안에서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때 김동규 씨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라는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때 처음 들었는데 멜로디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었네~ 하면서 노래를 듣는데 이런 가사가 흘러나왔습니다. “널 만난 세상 더는 바램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널 만난 세상 더는 바램없어... 이 가사가 어느 순간 제 안에서 절로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주님 만난 세상 더는 바램없어. 바램은 죄가 될테니까...” 그러면서 제 마음이 너무 기뻐졌습니다. 순간, 차 앞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충만해졌습니다.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났구나!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났어.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났다면 나는 내가 만나야 모든 것을 다 만난 거야. 그래 더 바란다면 죄지. 나에게 주님을 만나게 한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널 만난 세상, 주님 만난 세상 더는 바램없어.. 이 짧고 단순한 한 마디만으로 마음이 너무 기뻤습니다. 좁은 차 안이 마치 넓은 우주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충만해지고 행복했습니다.


최근에 마1장을 묵상했습니다. 특별히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말씀이 다가왔고 그 중에서 “예수”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예수, 예수란 단어를마음으로 천천히 반복하는데(곱씹는데) 어느 순간에 예수라는 그 이름이 제게 너무 사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너무 부드러웠고 제 마음에 기쁨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저의 전부라고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분리될 수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지금 내 삶은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설명될 수 있고 예수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어” 라고 여겼습니다. 기도 후에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지?” 스스로 놀라서 되물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변했다는 사실이 저 스스로 믿기지 않고 놀랍습니다. 사실 전에는 이렇게 될까봐 두려웠었습니다. 예수님께 깊이 들어가면 왠지 내가 없어지고 예수님만 남을까봐 두려웠습니다. 내가 위험해지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라고 하실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성경 지식이 아닌 실재로서 경험해 가면서 제가 조금씩 변해간 것 같습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제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예수님께서 저를 날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초대하셨고 그에 따른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저를 예수님으로 조금씩 물들여 가신 것이지요.

예수님과 지극한 사랑의 관계, 영적 결혼의 관계까지 이른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누구와 같다고 느끼셨어요?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어왔다고 했으나 예수님이 머리 속에 지식에 불과했고 예수님과 내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던 예루살렘 사람들과 같다고 느껴지셨어요?

아니면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진정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동방박사와 같다고 느껴지셨어요?

예수님은 첫 성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교회가, 우리 자신이 어떤 행위보다 믿음의 본체이신 예수님과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는데 마음을 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서 많은 행사를 하고 봉사들을 하지요. 물론 필요하면 해야 하지요. 하지만 그런 행위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 좋은 나무가 될 때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여야 합니다. 먼저 좋은 나무가 되지 못한 채 열매만 맺으려면 거기에서 맺히는 열매는 나쁜 열매일 뿐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요? 온갖 것을 하는데도 칭찬보다는 손가락질하고 민폐라고 조롱합니다. 이 부끄럽고 아픈 현실은 예수님, 예수님 말만 하지 실상은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로 귀찮게 하고 부담주시고 피곤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예요. 지극히 사랑하는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고 그 힘으로 그 생명으로 우리가 살고 앞으로 나가게 하시려는 것이예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그 나무로부터 온갖 좋은 양분이 흘러나와 아름다운 열매가 절로 맺혀져요. 영적으로도 똑같아요.

마음의 평화가 필요하세요? 마음의 평화를 구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구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의 평화가 내 마음을 채우실 거예요. 마음의 기쁨을 원하세요? 마음의 기쁨을 구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구하세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참된 기쁨을 일으키셔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오라, 나와 함께 있자, 나와 함께 머물자, 나와 함께 사랑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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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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