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2.15 움오름 주일 설교 -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요 18:1-3)

2019년 12월 27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8:1~3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2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3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설교문

1.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SNS 친구가 되어 소식을 주고받는 선배목사(강동진, 예수마을 보나콤 공동체)가 있습니다. 얼마전 신학교 재학시절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집안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그분은 성경이 찢기고, 불태워졌던 것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신학교를 갔습니다. 얼마나 기쁨이고 감격이었겠습니까! 하지만, 그 속에서 감당키 어려워 몸부림쳤던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배고픔도, 추위도 아니었습니다.


매일 학교 기도탑에서 살다시피했던 그분이 가장 슬펐던 것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동료들은 “부모님이 새벽마다 기도해 주신다”, “교인들이 조를 짜서 기도해 주신다” 등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데, 자신은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한명도 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날도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속상했고, 섭섭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 지쳐있을 때 주님의 선명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널 위해 기도했지 않느냐?”


주님의 음성에 퉁명스레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아니, 주님은 2천년전에 이 땅에 계시다 가셨는데 어떻게 절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요 17:20의 말씀으로 들려주셨습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천년 전에 이미 주님을 믿고 따를 오늘의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주님의 음성이 그분에게 큰 위로요, 격려요, 힘이 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그분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아시아, 아프리카 산간 오지를 누비며 양계농법을 전수하며 복음을 나눕니다. 충북과 경북에 보나콤 공동체를 세워 닭을 기르고, 농사를 지어 사랑을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돌봐주거나 거둬들이지 않는 은퇴선교사들을 위해 공동체 안에 집을 직접 형제들과 지어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2천년 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릴 위해 기도해 주셨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 주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한동안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가 생각납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라는 노랫말이 때로 우리 맘을 먹먹하게 울릴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또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로 현실을 딛고 일어서게 합니다.



2. 성경 속 ‘기드론 시내’




이렇게 우릴 위해 기도하셨던 주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향한 마지막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요 18:1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제자들을 향한 당부의 말씀과 그들을 위한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마지막 기도의 장소인 동산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여기서 ‘동산’이라고 번역된 장소를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모두 ‘감람산’(Mount of Olives)으로 표현했습니다. 때론 그 장소를 구체적으로 ‘겟세마네’(Gethsemane: 기름짜는 틀)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요 8:1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자주 기도하시던 장소를 ‘감람산’으로 명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왜 요 18:1에 이르러서는 신약성경에 유일하게 사도 요한만 이곳 명칭을 ‘기드론 시내 건너편’이라고 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그 이유를 추적해 가기 위해 짧게나마 기드론 시내의 이름과 장소의 의미를 살펴보려 합니다. 나아가 구약성경 속에서 언급된 기드론 시내의 용례를 찾아봄으로써 주님께서 건너셨던 기드론 시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려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 ‘기드론 시내’로 번역된 ‘기드론’은 예루살렘 동쪽 성벽과 감람산 사이에 있는 계곡입니다. 740미터의 성전산(모리아산)과 765미터의 시온산에 연이어 위치한 예루살렘에는 3개의 계곡이 있습니다. 게헨나(Gehenna: 힌놈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서쪽), 기드론(Kidron: 탁한 골짜기, 예루살렘 동쪽), 티로포이온(Tyropoean: 치즈 만드는 사람의 골짜기, 예루살렘 서쪽)이 그 골짜기입니다. 이 3개의 계곡은 3면에서 예루살렘을 자연스럽게 방어하고 U 자 모양의 히브리 문자 (שׁ, Shin)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요 18:1에서 만나는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이 자리하고 있는 740미터의 성전산 동쪽과 826미터의 감람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입니다. 기드론 시내라 불리는 이 골짜기는 와디(dry valley)로 알려져 있습니다. 와디는 겨울철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엔 바싹 말라 이동도로로 사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기드론 시내는 히스기야 전까지만 하더라도 물이 흐르는 골짜기였습니다. 그 골짜기에 풍부한 수원지인 기흔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 때에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방어하고 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기흔샘에서 시작하여 900미터에 이르는 지하수로 공사를 한 뒤 기흔샘을 덮었습니다. 그 결과 기흔샘의 물은 예루살렘성 안의 실로암으로 흐르게 되었고, 기드론 시내는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와디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기 때에 기드론 시내를 쓸고 내려가는 빗물은 곧 예루살렘 서쪽 성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이어지는 힌놈 골짜기와 만납니다. 이렇게 합류된 시내물은 유대 광야를 거쳐 사해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성경 속에서 기드론 시내는 어떤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까요?


1) 다윗의 기드론

첫번째 사건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벗어날 때 건넜던 사건입니다. 다윗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을 오른 뒤 유대광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으로 갔습니다(삼하 17:24). 마하나임은 야곱이 밧단아람(메소포타미아) 외삼촌 집에서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 천사를 만났던 요단강 유역입니다.


성경(삼하 15:23)은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널 때 함께 건너던 수많은 백성들이 통곡하며 건넜다고 전합니다. 도망자가 된 다윗왕의 처지가 안쓰러웠기에, 나아가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정을 일으킨 압살롬의 수중에 들어갈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안타까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드론 시내는 사랑하는 이의 배반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의 골짜기였습니다.


2) 시므이의 기드론

기드론 시내가 등장하는 두번째 사건은 시므이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도망자가 되었을 때 저주했던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다시 다윗이 왕 위를 되찾자 시므이는 용서와 생명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그의 청을 들어줬지만, 훗날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7 )


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는 주거제한 명령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드론 시내는 시므이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그 말 속엔 벗은 발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 죽음의 길로 향하던 다윗왕을 저주했던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살라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셨다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3) 아사의 기드론

세번째 기드론과 관련된 사건은 왕상 15:13에 등장하는 분열왕국 유다의 3번째 왕 아사(르호보암 - 아비얌 - 아사)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아사는 아버지 아비얌이 왕이 된지 3년 만에 갑작스런 죽음으로써 별안간 왕이 되어 41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52년 동안 통치했던 웃시야 다음으로 오랫동안 통치한 왕).


아버지 아비얌이 즉위 3년만에 죽음으로 폐위된 이유는 다름아닌 우상숭배와 악행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았는지 아사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대적인 정화작업에 나섭니다. 우상을 제거하고, 악행을 근절시킵니다. 그 대상엔 할머니 마아가(우리말 성경엔 어머니로 나오나 ‘אִמֹּ֗ו’이라는 말이 할머니라는 뜻도 됨. 그래서 영어성경은 grandmother로 번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사는 할머니의 우상숭배를 근절시키고, 그녀를 강제폐위시킬 정도로 단호했습니다.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아사가 부순 우상들을 모아 불사른 곳이 기드론 골짜기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정화운동은 유다의 13번째 왕이었던 히스기야 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그때 히스기야도 아사와 같이 우상 제단을 헐고 그것들을 기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라 태웠습니다(대하 30:14).


이런 면에서 보자면, 기드론 시내는 죄와 결별하고 신앙을 새롭게 하는 상징적인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훗날 아사는 여호와 신앙과 멀어집니다. 그때 선지자 하나니가 했던 말은 끊임없이 신앙의 초점을 조율해야 할 우리를 향한 메시지가 되어 다가오기도 합니다. 대하 16:9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4) 스가랴, 요엘, 에스겔 선지자의 기드온

기드론 시내와 관련된 네번째 사건은 스가랴, 요엘,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실존의 소멸과 ‘부활’이라는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기드론 시내는 평민을 위한 예루살렘의 공동묘지였습니다(왕하 23:6, 렘 26:23).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예루살렘을 방문해 보시면 지금도 즐비한 무덤들의 광경 속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곳을 일컬어 ‘여호사밧 골짜기’(욜 3:2, 12)라고 칭했습니다. ‘여호사밧’(의미 :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의 의미와 같이 ‘심판의 골짜기’(욜 3:14)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전 왕들의 때에 우상들과 관련된 제단을 불태웠듯이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던 겁니다.


이러한 심판의 경고와 예언은 슥 14:4에 여호와의 날에 임할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기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기드론’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죽음의 골짜기로 명명된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이 있던 그 골짜기가 바로 기드론입니다. 죽음이 가득한 곳, 메마른 뼈가 온 골짜기를 뒤덮고 있는 곳에 하나님의 생기가 불자 뼈에 살과 힘줄이 붙고 살아나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하던 곳이 바로 기드론입니다.


이런 부활의 메시지는 바사(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총독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재건(부활)을 위해 밤에 잠행을 나서던 곳에서도 암시됩니다. 그가 그 밤에 걸어서 살펴본 곳이 기드론 시내(느 2:15, 우리 말 성경에서는 ‘시내’로 번역)였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기드론 시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장소는 수많은 역사의 사건을 담고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기드론’이라는 성경 속의 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지명 자체가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이 ‘감람산으로 가시다’는 표현을 쓴 것과는 달리 유독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때까지 구약성경의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온 기드론 골짜기에 대한 의미가 녹아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곳은 아버지를 다윗을 거역했던 압살롬의 반역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배반한 인간을 향해 아파하는 하나님의 골짜기였습니다. 그곳은 스므이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듯이, 주님에게 십자가를 향한 갈림선이었고, 스스로 선택하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곳은 아사와 히스기야의 때에 신앙을 새롭게 하는 골짜기였듯이 하나님을 찾고 또 찾게 하는 주님의 골짜기였습니다. 그곳은 스가랴와 요엘과 에스겔 선지자에게 죽음이 드리워진 하나님의 심판의 골짜기임과 동시에 부활의 골짜기였듯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는 생명의 골짜기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반역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넜던 다윗처럼 이제 주님도 사랑하는 제자 가룟유다의 배반(요13장)으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십니다. 다윗을 따르는 온무리들이 흘렸던 눈물처럼 주님을 위해 울어주는 제자는 없었지만, 자기 백성들의 죄와 심판을 보시며 주님은 눈물을 흘리십니다.


지표면으로부터 120미터나 아래에 위치한 기드론 골짜기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듯이, 주님께도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십자가의 모멸과 수난을 위해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던 주님의 심정을 마 23:37은 예루살렘을 향해 절규하시는 모습으로 이렇게 드러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4. 대림절 셋째주일에


주님이 제자들과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던 날 밤은 유월절 하루 전날, 다시 말해 유월절 어린양을 잡는 날이었습니다. 당시 순례의 길을 떠나 온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에 성전희생제물로 바치던 어린양의 수는 무려 수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날 성전에서 쏟아져 나와 성전산을 타고 흐르던 어린양의 피는 기드론 시내로 흘러들었고, 피는 강물처럼 흘러내렸을 겁니다. 그래서 마치 '탁한, 흐린, 어두컴컴한’이라는 그 이름의 뜻처럼 탁하고 흐린 광경을 연출했을 겁니다. 주님이 기드론을 지나실 때는 검붉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특유의 피냄새를 진동하며 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던 주님은 짐승의 피로 드렸던 불완전한 제사를 끝내고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당신이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실 것을 다짐하고 또 하셨을 겁니다.


오늘은 대림절 셋째주일입니다.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사람을 살리기를 원하셨던 주님, 그것을 위해 핏물이 흐르던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자신을 드림으로써 죽음의 골짜기가 하나님의 생기로 가득한 부활의 골짜기 되기를 바라셨던 주님의 마음을 되새겨 봅니다.


그 주님을 기억하며 다시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대림절이 깊어갑니다. 대림절이 깊어갈수록 우릴 위한 주님의 안타까움도, 슬픔도 깊어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도 우릴 위해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다림의 불을 밝힙니다.


우리를 살리려 자신을 비워 핏빛 기드론 시내를 건너시던 주님을 생각하며 이제 우리도 고집스런 우리를 조금씩 비워가게 하옵소서. 속이 비지 않고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악기가 없듯이 비워지지 않은 영혼으로 어떻게 주님을 향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하듯이, 오늘도 “ㅇㅇ야, ㅇㅇ야”라고 우리 이름 외치실 주님 생각하며 우리도 사랑을 위해, 생명을 위해 기드론 골짜기로 발을 옮기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곳에서 벗은 발의 주님, 못자국난 주님의 손 붙잡고 함께 하는 주님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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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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