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2.08 움오름 주일 설교 -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요 17:25-26)

2019년 12월 12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25~26

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설교문

1. 인간이란 존재


어제 울산에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어떤 시민으로 살 것인가?>라는 제하의 강연을 했습니다. 그 서두에 유 이사장은 <1. 인간>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성과 욕망/충동 가운데 어느쪽이 사람을 움직이는가?”


어떻게 보십니까? 이성과 욕망, 또는 충동 중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당연 ‘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학창시절 내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삶을 살아오시다보니 우리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이성이었습니까? 별 일 없을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떤 일이 닥치거나 절박할 때 이성은 작동을 멈춥니다. 욕망이 힘을 씁니다. 감정이 우리를 뒤흔듭니다. 그래서 충동이 우리를 행동하도록 자극합니다.


이는 사람의 나이와도 결을 같이 하여 진행되기도 합니다. 치기를 부리던 유년, 사춘기 시절엔 충동에 지배당니다. 젊은 시절 ‘꿈’이라고 포장했던 욕망을 따라 내달려 갑니다. 그러나 중년의 어느 때에 이르면 이성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지나온 시간을 헤아려 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가?’라고 자문하기에 이릅니다.


사람에 대해 더 복잡하고, 세밀하게 분석하고 분류할 수 있겠지만, 간단하게 나눠보자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실상 사람이 이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40대에 막 진입했던 때에 저 자신을 비롯해 이런 인간에 대해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누구인가? 인간 속에 작동하는 힘의 구조는 무엇인가? 인간이란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 변한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하는가?를 비롯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인생의 4계절의 특징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 계절을 살아야 하는가? 등을 연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문 칼럼에서 보았던 한 대학의 상담학과 교수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저에 대한 소개를 간락히 적었습니다. “지금까지 신학과 기독교교육을 공부하며 프로이드, 칼 융, 그리고 폴 투르니에 등의 책을 읽어 왔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 가면 그런 부분에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전에 책을 읽고 싶은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추천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썼습니다.


그랬더니 짧은 답변이 왔습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신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인간에겐 버거운데, 무슨 인간공부를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답장을 받고 내심 섭섭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하던(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음) 동료목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수업시간에 그 교수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어떤 목사에게서 메일이 왔는데,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고. 그래서 자기가 신에 대해 공부하는 것도 부족할 텐데 무슨 인간에 대한 것이냐며 답변했다고. 순간 강의실의 학생들은 까르르 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동료목사가 볼 때, 스위스 제네바엔 한인교회가 하나고, 목사도 한명이니 당연히 저라고 생각하고 연락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화가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갖고 살아가야 할 상담학 교수가 그랬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또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게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옛 어른들이 자주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산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서 죽고, 물 좋아하는 사람은 물에서 죽는다. 조심해라”


좋아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주 하고,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잘하는 것에서 실수하고, 넘어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요, 그것이 우리의 실력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에 대해 공부했다고 인간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혹 알았다고 하더라도 인간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점점 체득해 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인간으로 살아가지만, 인간 자체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저 스스로도 이해 안되는데,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 무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직접 만드신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인간이 이해가 되시겠습니까? 창조주를 거부하고, 제 생각, 제 욕망을 따라 제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되겠습니까? 제가 볼 때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줄기 차게 만나는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이 엉뚱하게도 2001년에 개봉했던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 속이었습니다.


그 중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나이든 주지스님이 승려들과 조폭들 모두에게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우도록 하는 문제를 냈습니다. 모두들 독의 아래 깨진 부분을 고무신으로 막으며 물을 부어댔지만 결국 밑 빠진 독에 물을 가득 채울 수는 없었다.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조폭들은 밑 빠진 독을 들고 연못으로 뛰어듭니다. 당연히 독은 물 속으로 잠겼고 독 전체가 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조폭들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젊은 승려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노스님은 이들이 절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해 줍니다. 조폭들이 젊은 승려들과 함께 절에서 지내면서 자주 갈등을 일으켰지만, 그때마다 노스님은 조폭들을 감싸주는 입장을 취합니다.


어느 날 조폭 두목이 노스님께 물었습니다. “왜 우리들을 감싸주시기만 하고 우리들에게 이래라 저래가 요구가 없으시죠? 착하게 살아라, 좋은 사람이 되어라 등 이런 말을 하지 않으시냐 말입니다.”


노스님이 되물었습니다. “너희가 밑 빠진 독에 물을 어떻게 가득 채웠느냐?”

조폭 두목이 대답했습니다. “밑 빠진 독을 그냥 물 속에 빠뜨렸죠.”

노스님이 곧이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놈아! 나도 밑 빠진 너희들을 그냥 내 마음 속에 빠뜨렸어.”

“나도 밑 빠진 너희들을 그냥 내 마음 속에 빠뜨렸어.”라는 그 한줄의 대사는 20여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남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는 메아리가 되어 제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끌어안는 것,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조금은 압니다. 몇번 해보고 안 고쳐지면, 할만큼 했다며 손을 틉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끌어 안으셨습니다. 밑 빠진 우리를 끌어안고 당신의 마음 속에 빠뜨리셨습니다. 그 역사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성탄이며, 십자가입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2. 인간의 존재와 허영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희생을 “예, 고맙습니다”라고 받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자기 땅에 오셨어도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않았습니다. 거부했고, 외면했습니다. 생명을 주시겠다는데도 거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 숨쉬는 매 순간은 생명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서서히 죽어가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살아 있는 동안, 또는 죽어가는 동안 각자의 고유한 존재 이유를 알고 그 이유를 드러냅니다.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그렇게 존재해 가고, 또 소멸해 갑니다. 그 속에서 묵묵히 자기 존재의 의미를 나누며 공존해 갑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그와는 반대의 길을 질주합니다. 자신이 중요해 지면 질수록 존재의미가 강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주변환경을 파괴하고, 소멸시킴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해 갑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존재로 군림해 가려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이런 존재로 지음받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창1:26은 지음받은 인간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모양)과 똑같이 창조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묘사한 이 부분을 라틴어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Imago Dei(이마고 데이), ‘신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라고 불렀습니다.

Imago Dei, 하나님의 형상에 담긴 깊은 의미는 명료합니다. 창 1:26의 후반절에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 즉 자연을 보호하고 가꾸는 ‘관리사’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는 동료인간들을 하나님처럼 대하라는 명령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은 인간이 신이 되어 자기 맘대로 자연을 대하고 처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곡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허락되지 않은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하나님 자체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에덴(기쁨)을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대신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망각하고 남용함으로써 ‘허영虛榮’이라는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배철현 전 서울대 교수는 이러한 질병 ‘허영’을 ‘자기 자신에 몰입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공허에서 자신이 아닌 것에 자신을 투영하려는 마음’이다고 정의했습니다.


자신이 아닌 것에 자신을 투영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교만과 오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위치, 다시말해 서있는 자리(존재 position)를 망각한 인간의 허영은 노아 홍수 이후에도 이어져 결국 하늘에 닿고자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 노아 홍수 이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인간의 딸들과 혼인하여 태어난 네피림의 시대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존재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위치(position)을 잊고 욕망대로 살다보니, 한 마디로 속은 없고, 겉모습만 있는 빈껍데기로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언어 조차 소통의 언어를 상실한 채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사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인지하고 있으면, 오순절 성림강림 때에 보혜사 성령님이 왜 불의 혀와 같은 모습으로 임하셨는지가 이해가 됩니다. 이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행 2:1-13입니다. 한절씩 교독하시겠습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행 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 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 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 2: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행 2: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불의 ‘혀’와 같은 모양으로 임했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첫번째 현상은 ‘언어의 회복’이었습니다. 갈라지고, 나눠짐으로써 말 통하는 사람끼리만 어울리던 문화의 종식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16개국 다른 이들의 언어로 다가가고, 그들과 소통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럼, 왜 성령님의 임재의 첫번째 현상이 언어의 달라짐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철학자 하이데거가 이야기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das Haus des Sein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외부세계를 인식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언어를 보면, 그가 세계(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곳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바꾸심으로 인간의 인식을 바꾸고, 존재의 변화를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인간 속에 자리하시는 ‘내주하심’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해 집니다. 인간이 자신 아닌 것에 자신을 투영하며 살아오던 허영의 틀을 벗고, 원래 지음을 받은 자리로 회복되는 겁니다. 그걸 위해 언어를 바꾸시고, 존재를 바꾸시며, 삶을 바꾸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대제사장의 기도같은 예수님의 기도는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는 기원으로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믿는 이들 속에 있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허영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본연의 자리에서 의미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주님의 결의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위해 깨진 항아리 같은 인간을 끌어안고 그 속으로 들어오신 겁니다.



3. 주님의 영이 통치하시면


그렇다면, 주님의 영이 임재하시고, 주님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일하시고, 통치하시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기원전 740년-680년 활동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사 11:6-9을 통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11: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리 - 어린양, 표범 - 어린 염소, 송아지 - 어린 사자… 서로 반목하며, 죽이고, 죽임 당하던 존재입니다. 이런 존재들이 함께 공존해 갑니다. 이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해 갑니다. 그런데, 사 11:9의 연결이 좀 이상합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으시겠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복음성가의 가사로도 불리고, 워낙 자주 인용되는 부분이기에 익숙하실 겁니다. 그래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올 겁니다. 그런데,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좀 이상합니다.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원문에 가깝게 직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내 모든 거룩한 산에서 그들이 서로 악을 행하지도 않고 상하게 하지도 않으니, 이는 그 땅이 바다를 덮는 물처럼 여호와의 지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메시야가 오시고, 그분이 통치하시는 곳엔 서로 악을 행하거나 상하게 하지 않는 것과 그 땅이 여호와의 지식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가까워지면 질수록 사람이 어떻게 변해 갑니까? 기존에 살아오던 죄와는 멀어집니다. 바다의 물이 빈공간이 없이 바다를 가득 채우고 있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진 곳에서도 악을 행하는 것과 서로 상하게 하는 것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예언을 잘 알고 계시던 주님께서 오늘 본문 26절의 앞부분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후반절에 나오는 2가지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믿는 우리 안에도 있게 되고, 두번째로 이어지는 결과로 주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겁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믿고, 주님의 영이 거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이 땅이 반목과 죽음이 없는 평화를 찾게 되는 겁니다.



4. Shalom & Ma’a Salama


캐나다 토론토에서 목회하는 후배(장성훈)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 앞서 우리가 읽은 메시야 예언에 관한 사 11장 본문을 교우들과 함께 읽었는데, 그 후기를 다음과 같이 알려왔습니다.


읽기를 마친 후 한 분이 진심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 짧은 이 한 마디에 마음이 ‘쿵’ 했다. 나는, 성령의 꿈은 황홀경에 빠진 무아지경이 아니라, 사람 살 만한 세상 가꾸기에 있다고 이야기했다.


‘사람 살 만한 세상’, 평화의 세상입니다. 너의 것을 빼앗고, 너를 죽임으로써 내가 더 잘 살겠다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대리자로 인정하고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이와같은 염원을 담은 유태인들의 일상 인사가 “שָׁלוֹם 샬롬”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안녕”이라는 인사이지만, 그 본래의 의미는 기원전 2,300년 쐐기 문자(신전의 경제 문서)에서 발견된 바에 의하면 ‘돈을 다 갚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여전히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입장에선 “샬롬”이라는 인사는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빚(임무)를 알고, 그것을 갚고 있습니까?"라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샬롬’처럼 아랍 사람들도 아랍어로 مع السلامة (Ma’a Salama)이라고 인사합니다.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엔 세상의 마지막 날에 신이 인간에게 مع السلامة (Ma’a Salama)라고 인사할 것이라고 합니다. 샬롬에서 봤듯이 이 인사에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인생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완수했습니까?” “당신은 빚을 다 갚았습니까?”


지난 주일 광고시간에 12월 22일 주일까지 “나의 2019년에게”라는 제하의 글을 형식에 관계없이 적어보자는 제안을 드렸습니다. 그때 조경숙 집사님께서 순간 “자아비판하자는 거지요?”라고 말씀하셔 우리 모두를 웃게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2019년 올 한해는 우리에게 어떤 해였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빚(고유한 임무)을 얼마나 갚으며 살아 왔습니까?


오늘은 대림절 둘째주일입니다. 대림절은 누차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을 기억하고,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은 분명 2천년 전에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숨 쉬는 매 순간이 소멸로 점철될 수 밖에 없는 허영에 물든 인간, 자기의 위치를 상실한 인간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깨진 항아리 같은 우리를 끌어안고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고, 우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 인생을 통해 그 빚을 어떻게 갚으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깨진 항아리같은 우리를 끌어안고 역사 속으로, 우리 속으로 들어오신 주님을 생각하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욕망으로, 충동으로, 또는 타락한 이성으로 판단하고 살아온 인간의 삶이기에 살아가면 갈수록 성한 곳 하나없는 생채기 투성이 항아리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우리를 용납하시고, 품어주심을 감사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이 감사가 우리 삶을 통해 샬롬을 이 땅에 나누고 전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를 원합니다. 반목과 질시가, 혐오와 차별이 물러가고, 이쪽과 저쪽이, 좌와 우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사회를 열어가길 소원합니다.


2천년 전 주님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실 때 천사들이 노래했던 그 말과 같이 “하늘엔 영광이, 이 땅엔 평화”가 깃드는 2019년 대림절 되게 하옵소서. 그 일에 우리가 징검다리 되고, 디딤돌 하나라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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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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