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1.24 움오름 주일 설교 -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삼상 22:1-5)

2019년 12월 13일 업데이트됨








사무엘상 22:1~5

1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2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3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4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5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설교문


범죄심리학자 이수정교수는 BBC가 선정하는 ‘올해의 여성 100인’에 선정된 우리나라 1세대 프로파일러입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앙심’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인생을 이 일에 쏟아 붓게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2004년 경찰 요청으로 경남 마산에서 남편을 살해한 아내와 엄마를 도운 딸을 만나게 됐다. 직업적인 프로파일러가 거의 없던 때다. 시신 일부가 사라졌는데, 가해자가 여자이고 나도 여자니까 만나서 얘기해 그걸 찾아달라는 거였다. 만나보니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30년 가까이 상습적인 폭력을 겪은 모녀였다. 미국에서라면 피학대 여성 증후군이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 취약 상태에서 방어 목적으로 죽인 사건으로 정당방위를 받을 만하다고 봤다. 그런데 경찰 조서를 보니 범행 동기에 ‘부부 간 불화가 있던 중 앙심을 품고 남편을 살해했다’고 적혀 있었다. 앙심이 맞는지 정말 의문이었다. 이건 앙심이 아니라 자기방어적 본능일 수도 있음을 설득하는 데 내 평생을 쏟아 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지금은 이런 피학대 여성 배우자 살해에 대한 형량도 줄고, 사회적 이해도도 높아졌다.”( ‘BBC '올해의 여성 100인' 이수정을 바꾼 한 단어’ / 이지은, 한겨례)


그는 죽음과 폭력이 휩쓸고 지나가는 어둡고 캄캄한 고통의 현장에서, 그리고 여성에 대한 드러나지 않는 우리사회의 강고한 벽 앞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인권의 가치가 훼손된 우리사회의 곳곳에서 사람들을 일깨우고 법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고군분투하여 왔습니다.


그의 삶 속에서 우리는 생명과 인권의 가치 그리고 이것을 품어 안은 소명은 밝고 환한 빛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질문되고 드러나고 헌신되는 역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삶의 배리(背理)성 앞에서 비로소 인간됨에 관한 질문과 성찰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러한 질문과 성찰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도 보다 깊은 지경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마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예루살렘의 화려한 성전이 아니라 골고다언덕에 세워진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그를 따르는 이들과 함께 모압에 잠시 내려가 지내다가 선지자 ‘갓’으로부터 다시 유다 땅으로 되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나 헤렛수풀에 이르는 장면입니다.


신앙적으로 해석되는 다윗의 삶은 그의 평생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 속에서 안전했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호출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라고 스스로의 삶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현실은 결코 평탄지 않았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고난으로 점철된 여정이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고백한 이 노래는 자신의 순종과 인내가 얼마나 부요하고 풍성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서 본문의 전후는 이렇습니다.


다윗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사무엘상 16장부터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불순종과 범죄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십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을 보내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다음 왕으로 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17장에서는 그 유명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 사건은 아마 다윗 생애에서 빛나는 정점 같은 사건이라 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 되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 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 만 이로다’라는 노래가 온 백성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그의 인기는 왕을 능가하여 칭송됩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다윗의 인기가 치솟자 왕권에 대한 위협을 느낀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기로 합니다.


젊은 나이에 다윗은 최고의 성공을 맛보았지만, 그러나 그의 성공은 그를 모진 고난의 현장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사무엘상 19장부터 31장, 사울이 전쟁터에서 전사하기까지 다윗은 사울의 살해위협을 피해 10여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광야를 유리하며 도망 다닙니다.


오늘 본문 이전의 21장에서는 다윗이 제사장의 성읍인 ‘놉’ 땅으로 도망한 장면이 나옵니다. ‘놉’은 ‘실로’의 성소가 파괴된 이후 성소의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 성소에 진설되었던 떡과 전리품인 골리앗의 칼을 얻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사울의 목자장 에돔사람 ‘도엑’이 있었고 그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놉’에서도 있지 못하고 또다시 블렛셋 땅 ‘가드’로 도망합니다.


‘가드’에 도착한 다윗은 그곳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가드’는 다윗이 죽인 블렛셋의 장수 골리앗의 고향이었습니다. 가드왕 ‘아기스’ 앞에 선 다윗은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그 앞에서 수염에 침을 흘리며 미친 행세를 하며 목숨을 구걸합니다.



가드 왕에게서 쫓겨난 다윗은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아둘람 굴’로 도망칩니다.(22:1)


미친척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쫒겨난 후 지었던 시가 바로 시편 34편입니다. 찬양으로 시작되는 그의 시 속에서 우리는 다윗의 신앙뿐만 아니라 그의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그의 시어 속에는 이러한 언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 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놉’에서 ‘가드’로 그리고 ‘아둘람 굴’로 도망 다니면서 곤고한 이들, 마음이 상한 이들, 두려운 이들, 고난 받는 이들이 그의 마음 한 켠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아둘람 굴에서 이전에 없었던 일들이 다윗의 주변에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아돌람 굴에 이르렀을 때에 환난당한 모든 자들, 고리대금에 재산을 강탈당하고 빚진 모든 자들, 폭력과 강압에 희생되어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정의와 공의에 굶주린 이들이 사울의 학정을 피해 나아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전, 그가 사울의 왕궁에서 화려한 영화 속에 있었을 때에는 사람들은 권력의 권위 앞에 압도되어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많은 이들이 그의 명성에 이끌려 자신의 입신양명을 꿈꾸며 그에게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다윗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수도 없는 외롭고 어둠 가득한 광야의 동굴로 스스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을 다윗에게로 이끈 것은 자신들의 곤고함과 슬픔과 고통이었습니다. 더 깊은 이면에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수가 어린이와 여성, 그리고 노인들을 제외하고 남자 장정만 세었을 때 400여명가량 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데리고 모압 땅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직 명확치 않았고, 자신에게 나아온 이들을 위험과 고통으로부터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모압 사람들은 다윗에 대해 대단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증조할머니인 ‘룻’이 바로 모압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압 왕의 요새’는 다윗에게 사울의 손을 피하기에 가장 안전한 최적의 환경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을 견디기 힘든 이들, 그리고 연로한 다윗의 부모와 가족들이 두려움 없이 안전한 환경에 거할 수 있었습니다.(4절)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하나님은 선지가 갓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5)


오랜 도피생활 끝에 모처럼 만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어찌 부도덕하고 나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향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울이 있는 곳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 다시 고난가운데로 나아가는 모습은 성경의 여러 군데에서 등장하는 데 이러한 장면은 예수님의 삶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받으시러 가시는 장면을 다른 복음서 보다 더 원초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


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마가복음은 ‘몰아내신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후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순종하십니다.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십니다.


빌립보서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어떻게 이러한 순종이 가능할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요새를 떠나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다윗, 이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곳은 내 마음이 있는 머무는 곳이 아니다. 내 마음은 혼돈과 어둠속 새날을 갈급 하는 목마른 사람들의 외침 속에 있다. 죽음이 있는 곳, 도망 다니며 폭력과 불의에 희생되어 부르짖는 나의 백성들이 있는 곳, 나는 그들 속에서 네가 나를 만나기를 원한다. 그들 속에서 네가 나를 배우기를 원한다.”라고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놓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뜻 만을 강요하는 감히 거역할 수도 없는 무감정한 차가운 존재로 인식하기 쉽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아버지 하나님, 그 하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는 아들의 외침을 철저하게 외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자식의 고통에는 무관심 한 채 오직 자신의 뜻만을 강요하는 무감정한 존재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신학자 몰트만이라는 분은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들 예수님이 죽음의 고통을 겪을 때, 예수님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독생자의 죽음의 고통을 함께 겪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고후 5:19에서 이렇게 진술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실 때, 그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고난이기도 하고, 하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고통을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측량할 수 없는 놀랍고 신비로운 비밀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그 자녀를 풀무에 던지실 때는 하나님께서도 그 안에 같이 들어가신다”라고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야곱의 생애 속에서도 발견됩니다. 야곱의 인생이 광야로 내몰렸을 때, 광야에서 차가운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 야곱은 철저히 자기 혼자 인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적어도 돌베개를 베고 누운 지금 이곳에서 만큼은 하나님은 자기와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여겼다는 사실은 그가 꿈에서 깨어난 후의 첫 고백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꿈속에서 야곱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지 않고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단서는 16절에서의 꿈에서 깬 이후의 야곱의 첫 반응에서 나타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16,17)


광야 가운데 돌베개를 베고 누웠던 곳의 원래 지명은 ‘루스’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난 후 야곱은 그곳 지명을 ‘벧엘’로 바꿉니다. ‘벧엘’, 즉 ‘하나님의 집’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이 계실만한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예배와 찬양이 넘치고, 사람들의 헌신과 예물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아름다운 곳이 하나님의 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실패와 좌절과 고난이 있는 곳은 하나님의 집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과연 알지 못했다고 놀라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의 생애에서 하나님께서 계시고자 하셨던 당신의 집은 찬송과 예배가 가득한 그곳이 아니라 야곱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고독했던 지금 이곳, 야곱의 곁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지점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베었을 때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좌절과 상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더 깊이 발견합니다. 그가 시편34편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곤고한 자가 부르짖을 때 구원하시는 하나님,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 의인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통회하고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고난당하는 이들을 건지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유다광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고난당하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의 초청이었다고 제게는 그렇게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5b)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 다윗은 모압 땅을 떠나 사울왕의 압제가 기다리는 유다 땅 헤렛 수풀로 갑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가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왔을 때 무엇이 기다라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영광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헤렛’이라는 지명의 뜻이 ‘무덤’인 것처럼 그를 맞이한 것은 죽음의 그림자였습니다.


사울의 목자장 에돔사람 ‘도엑’의 밀고로 사울은 제사장 ‘아히멜렉’과 ‘놉’에 있던 제사장85명을 죽이고, ‘놉’ 성읍의 성민들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그리고 가축들까지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다윗은 고난당하는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정의로운 자들의 마음속에서 계셔서 그 정의로움 때문에 고난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낱낱이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힘이 없어 멸시당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좌절과 두려움, 분노와 통곡을 낱낱이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위로받을 길 없어 헤매는 이들의 아픔을 보듬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겸손한 왕으로 훈련되어져 갔습니다. 폭력으로부터 나오는 세상의 권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진정한 통치자’로 말입니다.



저는 다윗뿐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속된 오늘 우리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물들어 가는 것이 ‘신앙’이요 ‘신앙의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인생퍼즐조각을 우리가 그리는 그림에 끼워 맞추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그림 속에서 해석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움오름교회가 ‘아돌람 굴’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시작된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릅니다. ‘아돌람 굴’이라는 움오름의 자의식은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서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시선 두기를 포기하지 않는 교회, 든든하고 안전한 요새나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유다 땅’을 자신의 자리로 인식하는 교회,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과 은총의 통로가 되는 교회의 또 다른 자기인식의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신앙이 생명을 억압하는 폭력이 되지 않고, ‘유다 땅’으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마음이 상하고 곤고한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그리스도의 교회되기를 늘 소망하십시다.


나의 ‘유다 땅’에서 슬픔 대신 찬송이 흘러나오고, 우리의 ‘유다 땅’에서 구원의 샘이 터지고, 이 땅의 ‘유다 땅’에서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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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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