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1.10 움오름 주일 설교 -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였고"(요 17:25-26)

2019년 11월 16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25~26

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설교문

1. ‘아버지’라는 당신


1995년도 어느 보험회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라는 광고를 방송했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29살 …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당신도 모르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37살 …

자식이 학교에 들어가 우등상을 탔습니다. 당신은 그 액자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습니다.

44살 …

약수터에서 이웃 사람들이 자식이 아버지를 닮았다고 해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당신은 괜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48살 …

자식이 대학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당신은 평소와 같이 출근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54살 …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내의를 사왔습니다. 당신은 내의가 있는데 사왔다고 했지만, 밤이 늦도록 그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 봤습니다.

61살 …

딸이 시집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 같은 사위 얼굴을 보고 함박 웃음을 피웠습니다. 당신은 나이 들고 처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한 평생. 이제는 희끗희끗 머리로 남으신 당신 … 우리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 … 참 짠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십대, 또는 이십대 초반이라는 짠한 이름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십대엔 ‘아버지라는 사람은 표현을 잘 못하는 답답하고 구식인 사람, 성적으로만 평가하는 사람, 이해를 잘못해서 세대 차이를 많이 느끼게 하는 사람’으로 여겼을 겁니다. 이십대엔 내가 무엇을 이뤄야만 좋아하는 사람으로 판단했을 겁니다. 이런 아버지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또 조금씩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라는 대상에 대한 생각은 변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라는 이름엔 양가감정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완전한 남자는 없기에, 완벽한 아버지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어가며 이런 부분을 조금씩 생각하고 느끼다 보면,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가 조금씩 맘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2. 길 위의 아버지와 예수님 안의 아버지


2008년으로 기억합니다. 문학을 좋아하던 한 집사님이 제게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신간소설이라며 THE ROAD를 권했습니다. 도대체 뭐가 특별하기에 그토록 극찬하며 권할까 싶어 아마존에서 주문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내용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왜,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한 일절의 설명도 없이 이미 망해버린 잿빛 세상에서 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태양마저 빛을 잃은 세상은 무채색이며, 외롭습니다. 거의 모든 동식물이 절멸하다시피 한 가운데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살아 남았습니다. 하지만,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생존한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며 피하거나 식량을 뺏기 위해 상대를 공격합니다.


작가는 일체의 수식이 제거된 단조로운 문장들 속에서 ‘죽음’과 ‘절망’과 같은 류의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 그 곳에서 살아가는 것은 단순히 배고프고 목말라서 괴로운 것 그 이상입니다. 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아버지는 소년에게 과거의 가치들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니까 좋은 사람들이다.”


책을 읽다보면, 마트에서 사용하는 카트를 끌고 바다를 향해 정처없이 걷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연신 떠올라 맘이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아들을 보호하며 생존을 이어가는 간절한 부성애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 이후 황폐하고 희망이 사라진 잿빛 세상에 홀로 남겨질 아들을 생각하며 괴로워 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후 절망했던 그는 자신의 사후 절망할 아들이 새로운 소망의 불을 안고 살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THE ROAD는 아버지의 이 마음이 전해와 잿빛 분위기와 더불어 읽는 이를 짓누릅니다. 그런데, 문명이 파괴되고, 인류가 종말을 맞이한 THE ROAD는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닮아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쇼핑카트를 끌고 정처없이 길을 걷듯이 길거리엔 노숙자들과 홀로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 나이드신 분들이 카트에 의지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양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싸우듯이 사회의 보호 밖에 있는 극빈층들은 오늘도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도 사람사는 세상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힘 있는 나라가 약소국을 침략해 수탈했습니다. 권세있는 자들은 약한 이들의 고혈을 짜내어 부를 축적해 갔습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문화였습니다. 이런 황폐한 세상, 잿빛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늘 위나, 땅 아래 어느 한 곳이라도 아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을 즐겨하는 비정한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가혹한 인간의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죄를 대속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주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30년을 부모, 가족과 더불어, 그리고 3년은 제자들과 보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주님 또한 황폐하고 희망이 죽어버린 세상을 살아내기가 그리 녹녹치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세상이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더더욱 약한 이들을 돌보았습니다. 사회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셨고, 그들에게 눈길을 주셨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자기 하나 살기도 힘든 세상 속에서도 사람을 사랑했고, 돌보았고, 세워 일으켰습니다. 당시 정치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을 속박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념이었고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일일이 통제하고 형상화하기보다는 인간에게 맡겨두셨습니다. 누군가는 방치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방기라고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삶에 언제든지 즉흥성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셨습니다. 당신의 계획이 빗나거나 방해받을 수도 있었지만, 불연듯 다가오는 계획되지 않은 일과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던 노중에 당신의 옷자락을 만진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받아들여 고쳐주셨습니다. 설교하시던 중 지붕을 뚫고 중풍병 걸린 사람을 내려보내는 네 친구의 믿음을 받아들여 치유해 주셨습니다. 설교는 방해받았고, 시간은 더 걸렸고, 지붕은 부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 삶에 들어오는 방해와 무질서를 너그러이 허락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고 명징하게 보여주셨습니다.


3. 하나님의 이름


몇주 전 수영자매가 제게 학교 친구와 나눴던 이야기를 전하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날 간단하게 설명했었는데, 오늘은 조금더 상세하게 나누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부릅니다. ’여호와’. 그래서 기도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이름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자락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칠 때였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는 타지 않는 진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호기심 강한 모세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현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고통받는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보내시겠다는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분이 네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냐고 물으면 누구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출 3:14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


“אֶֽהְיֶה אֲשֶׁר אֶֽהְיֶה(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우리말 성경은 이 하나님의 자기계시 문장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번역은 일반적인 서양교회의 전통과 영어번역을 따른 것입니다. 영어식 표현으로는 “I am who I am”, “I am He who Exists”입니다. 번역하자면, “나는 나다”, “나는 존재하는 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신 이름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하나님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אֶֽהְיֶה אֲשֶׁר אֶֽהְיֶה(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의 하나님은 이전에 존재했었고, 현재도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하시는 분, 바로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는 존재론적 의미로 하나님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אֶֽהְיֶה אֲשֶׁר אֶֽהְיֶה(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는 말씀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조금 어려울 수 있는데, ‘무엇이 되다’라는 동사의 단순 미래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좀더 간단히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 하나님은 현재 고정된 존재로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אֶֽהְיֶה אֲשֶׁר אֶֽהְיֶה(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는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또는 “나는 무엇이든 될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 자기소개를 해석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가 이집트의 파라오와 히브리 민족에게 소개하는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역할과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하시는 일이 가리키는 방향을 소개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그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분이 됩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소개하신 하나님은 이집트의 노예였던 히브리 민족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재작년 여름 수련회에서 출애굽기를 다룰 때 설명드렸듯이, 애굽(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야기라는 ’출애굽기’의 본래 이름은 ἔξοδος (éxodos)입니다. 이는 ‘밖으로’라는 뜻의 접두어 ἐξ와 ‘길’이라는 명사 ὁδός’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길 밖으로’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근동지역을 아우르는 가장 강력한 제국은 두말할 나위없이 애굽(이집트)이었습니다. 서양 속담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이, 그 당시 모든 길은 애굽으로 통했습니다. 애굽이 표준이었고,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떠나라 하셨습니다. 대세였고, 기준이었던 애굽이라는 길에서 떠날 때 그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서 길이 되어 주시고, 방패가 되어 주시고, 나라가 되어 주시는 등 그 무엇이라도 되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자기의 백성들과의 동행과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이 내포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1인칭 אֶֽהְיֶה(에흐에)는 출 3:15에서 3인칭으로 된 야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컫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됩니다.


4.임마누엘 & 예수


백성들을 위해 “무엇이든 될 것이다”, “무엇이든 할 것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사 7:14을 통해 ‘임마누엘’,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약속은 360여년 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든 될 것이다”, “무엇이든 할 것이다”는 임마누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셨으며, 어떻게 함께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창립이래 계속 나누고 있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εγω ειμι(에고 에이미)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εγω ειμι(에고 에이미)는 “나는 ~이다”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줄곧 명명되고 있는 “אֶֽהְיֶה אֲשֶׁר אֶֽהְיֶה(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의 하나님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될 것이다”, “무엇이든 할 것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계시, 약속의 말씀은 예수님의 7가지 εγω ειμι(에고 에이미)에 다음과 같이 담겨 있습니다.

1.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

2.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8:12)

3. 나는 양의 문이다(요 10:7)

4. 나는 선한 목자다(요 10:11)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 14:6)

7. 나는 참 포도나무다(요 15:1)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אֶֽהְיֶה(에흐예), 여호와라는 계시와 약속은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 생명, 길, 진리, 생명, 참 포도나무 등으로 보여지고 나타났습니다. 예수님 이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본질과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는 세번째 계명을 잘못 적용해 “야훼”를 신성사문자로 떠받들어 발음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알지 못했던 그 하나님 이름의 의미를 주님이 알게 해주셨습니다. 말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표현하고 보여주셨습니다.


5.존재 이유


창세기 5장은 아담의 족보를 소개하며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창 5:1-3입니다.


1절: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절: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벨 이후 아담 부부가 낳은 셋을 일컬어 성경은 아담의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아담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셋이 이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불렀습니다. 성경은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의미는 비로소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이러한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같은 예로 사용되었습니다(시 79:6, 시116:17, 렘 10:25, 습 3:9).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에노스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을까요? 에노스의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인간 스스로가 불멸의 존재가 아닌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약함과 한계를 인식하고 비로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고 예배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불러왔고, 오늘도 부르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정말 우리가 우리의 약함과 한계를 인식한 에노스임을 자각했다면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차별되고 구분되지 않겠습니까?


주중에 차를 타고 가다 어느 한 분께 제가 질문했습니다. “집사님~ 움오름교회의 존재 의미가 무엇일까요?” 집사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 질문은 우리가 목사님에게 해야 할 질문인데, 우리에게 물으시네요? …”


맞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움오름교회의 목회자인 제가 해야 할 답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해야 할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는 대답이어야 합니다.


이 대답을 찾다 움오름교회 창립예배 때 나눈 설교원고를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런 목회를 하고 있나? 정말 이런 교회로 존재해 가고 있나?’


이런 질문의 연장선에서 또한 이런 질문들을 해 보게 됩니다. ‘정말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가? 정말 하나님의 이름이 이 교회를 통해, 우리 삶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가?’


이른 아침 세탁기를 돌리기 전 세제통을 열어보았습니다. 온통 물 때에 시커멓게 곰팡이 때가 끼여있었습니다. 더러워진 옷들을 깨끗하게 세탁하면서 정작 더럽혀져 가는 자신은 돌아보지 못했던 겁니다. 이와 유사하게도 남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면서 자신이 추잡하고 타락해 가는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검찰, 경찰, 판사, 목사, 교회…. 나도 혹 그 부류 속에 들어있지 않나라고 슬프게 되돌아본 아침이었습니다.


세제통을 분리해서 하나 하나 닦고, 또 베이킹소다와 뜨거운 물로 씻어 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수시로 자신을 돌아보며 닦아내야 합니다. 청소하고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가장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오판하고 오해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되려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더럽히는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제통은 어떠합니까? 우리 삶은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알리기에 적당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의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완료된 존재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나 돌아보면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목적과 방식과 지향은 늘 사랑하는 우리를 향하셨는데,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쉬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한계와 약함을 절감한 에노스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지고 알려지고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에 하나같이 ‘묵묵부답’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실력과 현실이 그저 죄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의 하나님~

우리 삶도 언젠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3년의 짧은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예수님을 닮아 우리 삶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알려지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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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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