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1.03 움오름 주일 설교 - "의로우신 아버지여"(요 17:25-26)

2019년 11월 7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25~26

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26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설교문

1. 아버지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났습니다. 항상 곁에서 지켜봐 주시며 어려울 때, 힘들 때 버팀목이 되어 주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순식간에 아버지를 보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시간이 약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번씩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이 나 울컥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도…


제 아버지께서 말기암으로 매일같이 통증과 싸우던 때의 일입니다. 거의 마지막까지 마약성 진통제를 멀리했던 아버지는 통증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 온몸에 옷을 입은 듯 파스를 붙이고 지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의 요청에 마른 막대기같이 앙상해 진 아버지의 다리에 파스를 붙이며 여쭸습니다.


“아버지~ 기억나세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배가 너무너무 아팠는데, 학교에서 연락을 받고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러 오셨잖아요!”


“기억하고 말고…”


“아버지께선 아픈 저를 업고 읍내까지 수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뛰셨잖아요. 그때 우리 아버지 다리는 지금의 저보다 더 튼튼하셨는데…”


저의 옛이야기에 시골 담뱃가게 낡은 벽에 덕지덕지 붙인 광고지마냥 파스를 붙인 제 아버지가 우는 듯이 웃으셨습니다. 웃는듯이 우셨습니다. ‘아버지’하면, 이 장면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가셨는데, 그 아버지의 등골을 빼먹은 자식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1997년 IMF가 일어났던 해를 기억하실 겁니다. 하루 아침에 길거리로 나 앉은 수많은 가정들이 있었습니다. 청춘을 바친 직장, 가정에 버금가게 헌신했던 회사에서 일순간 해고를 당한 가장들, 이 땅의 아버지들이 있었습니다. 철저하게 이익과 손해라는 잣대에 의해 사람을 선택하고, 버리는 사회구조가 팽배하면서 무능하다고 낙인받은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점점 더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갔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결국 직업을 잃고 가족에게도 버림받는 아버지들의 고뇌, 절망, 슬픔이 안타까운 사연으로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했습니다. 초능력자 아버지, 가정과 가족의 울타리라고 여겼던 이 땅의 아버지들도 실상은 상처받기 쉽고,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여전히 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울 때마다 떠올리는 이름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발견한 시인 김지훈은 그의 시집 <아버지도 나를 슬퍼했다>에서 책과 같은 제목의 시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은은한 달밤에 탁상에 앉아

저물어 가는 하루를 붙잡고 있었다

오고 가는 술 한 잔에 친구는 쓰라렸고

달빛의 조명에도 쉽게 슬펐다

배운 말은 많은데 위로해줄 언어가 없었다

단지 취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친구의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배춧잎 몇 장을 넣었다

친구가 떠난 자리는 공허하고 추웠다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금은 없어야 할 배춧잎이 있었다

그때, 그날 아버지도 내가 슬펐나 보다​

친구의 쓰라린 이야기를 들으며 술한잔 기울인 저녁, 묵묵이 돌아가는 친구의 주머니에 건넨 배춧잎 몇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작가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옛날 시인의 옷 주머니속에도 지워지지 않는 배춧잎이 들어있었습니다. 아버지도 밤늦게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자식의 아파하는 청춘이 슬펐던 겁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 못 들다 벗어놓은 아들 옷 주머니에 몰래 배춧잎 몇장을 넣어놓으셨습니다. 시인의 글을 읽다보니 연약함에도 온힘을 다해 가정을, 자식을 사랑해 온 아버지들의 마음이 물씬 전해 왔습니다.


2. 의로우신 아버지여


생의 마지막을 앞에 둔 예수님은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것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나누고 있는 요 17장입니다. 형광펜을 갖고 줄을 그으며 요 17장을 다시 읽었습니다. 무수히 반독되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 단어는 ‘아버지’였습니다. 26절 밖에 되지 않는 요 17장의 기도 속에 무려 39번이나 반복해서 부르신 이름,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생의 마지막에 서신 주님도 그토록 애타게 아버지를 찾고 의지하셨던 겁니다.


그런데, 39번이나 반복된 호칭 ‘아버지’ 중에 오늘 본문 25절 속의 호칭은 특이한 수식이 앞에 붙어 있습니다. 25절을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 요 17장의 기도 속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수식어는 ‘의로우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마지막이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을 찾으신 걸까요?


의롭다는 것은 ‘공의롭다’, ‘정의롭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의 신체 기관은 평소 그 중요함을 인식치 못하다가 어느날 불연듯 그 필요와 중요성을 절감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일까요? 신체 중의 그 부분이 아플 때입니다. 모순되게도 아플 때, 그 기관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때가 되면 그것의 이름과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공의, 정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구성원들과 시민들이 ‘공의, 정의’ 이런 말들을 모르고 산다면 비교적 그 국가와 사회가 공의롭고, 정의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공의와 정의’를 외치고 신경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가 공의롭지 못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도하던 중에 ‘의로우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그 시대가, 그 땅이, 그 사람들이 정의롭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대략 1,070여년 전에 살았던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갑자기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13여년을 줄곧 광야에서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해야 했습니다. 한때 자신이 굳게 믿었던 사람들, 가까이에서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던 전우와 부하들이 등돌리며 모함하는 것을 그는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측근이었기에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실을 살짝 비틀고, 조미료를 쳐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된 이야기를 알려 다윗은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하는 존재, 비리덩어리, 천하에 못된 반란자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왕보다, 그런 배신자, 그런 음모와 모함을 꾸미는 자들을 생각할 때마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단독’이라는 이름으로 거짓뉴스를 생산했고, 그것을 유포하는데 주저치 않았습니다. 나아가 다윗의 가족, 친인척들을 압수수색해서 볼모로 잡기도 했고, 말도 안되는 것들로 엮어 도망자 다윗을 압박했습니다. 억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숨 섞인 심호흡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도망자 다윗이 칼을 들어 암살단을 조직하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암살, 보복 이런 것들은 당장은 분이 풀릴 일일지는 몰라도 결국은 다윗 자신을 악마와 싸우다 악마가 되게 하는 길이었기에 결코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앞에 그의 억울함을 아뢰며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7:8-11입니다.


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9절: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다윗의 기도는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의 탄원이었습니다. 그는 옳고 그름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의로운 재판장으로 판단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장에 심판과 징계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정의롭고 공의롭게 재판하실 것임을 믿으며 찬양했습니다. 그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불의하고 부정한 시대와 사회에 대해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보다 문득 요 근래의 제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의분’이라는 이름으로 목소리를 높이며 개혁과 개정을 부르짖었습니다. 문제는 너무 저만 의롭다 착각했다는데 있습니다. 제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어 악을 척결하려고 날을 세웠습니다.


지난 10월 30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자신만이 정치적으로 옳다고 여기며 타인을 비난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제게 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순수해야 한다는 것, 절대로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정치적으로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에서 어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은 복잡하고, 모든 일이 딱딱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정말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This idea of purity, and you're never compromised, and you're always politically woke, and all that stuff, you should get over that quickly," Barack Obama said. "The world is messy. There are ambiguities. People who do really good stuff have flaws."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만이 고결하며, 나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나만이 항상 정치적으로 깨어있다는 생각을 어서 극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자신이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손잡고 함께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저 부터 깊이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주님이 말씀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으로 되돌아 가겠습니다. 결국 주님이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생각하며 ‘의로우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셨다는 것은 당신이 직접 심판자가 되지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지켜보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분명히 심판하시고, 일하심을 신뢰하셨기에 위탁하셨다는 의미입니다.


3.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해 달라는 다윗의 기도는 또 다른 시편 23:3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신답니다. 동아프리카에서 출생해 실재 8년 동안 직접 양을 쳤던 필립 켈러는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편 23을 탁월하게 해석한 <양과 목자>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속에서 켈러는 양의 행동양식을 단 하나의 수식으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멋대로’ … 가장 온순한 동물이요, 평화로운 가축이라 생각하는 양은 실은 천성 자체가 제멋대로 살아가고, 제멋대로 싸우는 제멋대의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금방 파괴적인 습관에 빠져 땅을 황폐화시키고, 자신들도 파멸될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양이 이런 습관을 가진 짐승이기에 제대로 된 목자는 그들이 습관에 뒹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못된 습성에 방치되어 파괴적이 되지 않도록 하루도 빼놓지 않고 풀을 뜯고 있는 목초지를 걸어 살핍니다. 양들이 풀을 뜯어먹으면서도 목초지를 파괴하지 않도록 돌봅니다. 베이스캠프를 중심으로 매일 클로버 잎사귀 모양으로 넓게 원을 그리며 아침에 나갔다가 다시 다른 길로 귀가토록 합니다.


목자가 이렇게 양과 목초지를 돌보듯,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인 교만과 자기 주장으로 파괴적인 자기 결정에 이르지 않도록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세심히 우리 생의 목초지를 살피고, 세밀히 우리 걸음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의로우신 목자는 제멋대로인 우리가 본성대로 살다 파멸하지 않도록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4.아버지의 등


오늘 설교 시작부분에 아버지와 관련한 시 하나를 나누었습니다. 끝부분에서도 시 하나를 나누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정철훈 시인의 <아버지의 등>입니다.


<아버지의 등> -정철훈


만취한 아버지가 자정 넘어

휘적휘적 들어서던 소리

마루바닥에 쿵, 하고

고목 쓰러지던 소리


숨을 죽이다

한참 만에 나가보았다

거기 세상을 등지듯 모로 눕힌

아버지의 검은 등짝

아버지는 왜 모든 꿈을 꺼버렸을까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고

삼십년이나 지난 어느날

아버지처럼 휘적휘적 귀가한 나 또한

다 큰 자식들에게

내 서러운 등짝을 들키고 말았다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고 가는

딸년 땜에 일부러 코를 고는데

바로 그 손길로 내가 아버지를 묻고

나 또한 그렇게 묻힐 것이니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서러운 등짝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검은 등짝은 말이 없다


"아버지의 등"을 읽으며 울컥했습니다. 세상 모든 아버지들이 점점 좁아져가는 어깨에 가족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책임지는 그 의무가 얼마나 고단한지가 보입니다. 술을 마시고 휘청휘청 들어서는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홑이불을 덮고가는 자식의 마음에도 눈물이 고입니다. 시인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지만 마음 속에 아직도 아버지의 검은 등짝이 옮겨 붙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아무 말없이 묵묵히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마음이 온기가 되어 전해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술에 취한 아버지가 코를 골고 주무시더라도 그 이마 한 번 짚어보며 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갈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픈 자식을 업고 몇 십리를 내달리던 이 땅의 아버지들. 그 볼품없는 아버지의 등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우리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의 검은 등짝을 매고 우리 또한 아버지로, 어머니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땅의 아버지들이 자녀들을 위해 자신의 그 볼품없는 등짝을 아낌없이 내어준다면, 하늘의 아버지는 당연 어떠하시겠습니까? 친히 사람이 되어 배역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서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 사랑으로 오늘도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겠습니까!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시어 매일 분노하시는 그 마음으로 안타까이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살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하시지 않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죽음을 앞에 둔 주님은 연신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생의 가장 절박한 순간에 힘이 되실 아버지 앞에 서셨습니다. 불의와 부정이 판을 치는 시대 속에서 스스로 심판자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남겨질 제자들과 직면할 십자가를 공의와 정의의 심판주,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 맡기셨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만이 고결하며, 나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며, 나만이 항상 정치적으로 깨어있다며 스스로가 심판자가 되어 즉결심의 망치를 두드리곤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런 선악의 구별자요, 교만한 종결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판결하심과 일하심에 겸허히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파괴적인 우리의 본성에 의해 우리와 우리 주변이 파멸되지 않도록 날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휘적휘적 귀가하여 서러운 등짝을 보인 아버지 위에 슬며시 홑청이불을 덮어주던 딸처럼, 아버지의 검은 등짝 닮은 아들처럼 그렇게 서 가게 하옵소서. 나아가 교만하고 제멋대로인 나를 살리려 서러운 등짝 위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 위해 우리도 우리 등 내어드리는 제자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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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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