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0.27 움오름 주일 설교 - "퍼즐"(출 2:1-10)

2019년 11월 7일 업데이트됨












출애굽기 2:1~10

1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2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3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4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5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6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7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8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9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10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설교문

문화평론가 오민석 교수는 삶의 배리(背理)성 즉 이치에 맞지 않는, 이치를 배반하는 삶의 모습을 말하면서 인간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터질 때, 우리는 세계가 일관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논리의 동시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도 확인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문학이나 철학은 세계의 이와 같은 ‘배리(背理)’성에 대한 탐구이며, 세계가 간단한 원리로 설명이 가능하고, 또 그런 원리에 의해 정확히 가동될 때, 세계는 더 이상 탐구나 질문의 대상이 아닐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세상은 왜 이렇게 무질서한지, 왜 악이 선을 이기고 고통과 폭력이 흥왕 하는지, 또 상실과 결핍을 벗어 날 수 없는지 인간은 그러한 삶의 ‘배리(背理)’성 앞에 당황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질문하고 또 무엇인가를 신앙하게 됩니다. 비단 문학이나 철학뿐만 아니라 신학도, 신앙도 이러한 삶의 배리성에 대한 질문과 성찰을 통하여 보다 깊은 지경으로 나아갑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의 ‘배리(背理)’성 앞에 던져진 인간이 어떻게 질문하고, 어떻게 영원의 빛 아래 자신의 삶을 해석하며 답을 찾아가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그러한 인간의 찾아감과 동일하게 성경은 또한 인간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걸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구점을 가면 퍼즐이 있습니다. 문구점뿐만 아니라 전시회에서도 보통 출구 쪽에 그 화가의 그림을 퍼즐로 제작하여 기념품으로 판매하곤 합니다. 작게는 몇 십 피스, 큰 것은 오천피스, 심지어 일만 피스를 넘는 퍼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퍼즐을 맞추는 데는 소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무엇을 맞추어가는 레고나 퍼즐 같은 데에는 그렇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저와는 다르게 제 아들 녀석은 레고의 광팬입니다. 일 년 동안 돈을 모아 레고를 구입합니다. 주문한 레고가 도착하면, 책상 위를 깨끗이 치웁니다. 그리고 손을 씻고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다음 사뭇 경건한 자세로 설계도를 봐 가면서 그 작은 조각들을 조립하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기도 합니다. 부품이 흩어져 있을 때는 도대체 이 어지러운 조각들이 무엇이 될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나 멋진 모형이 완성되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런데는 젬병입니다. 간단한 것은 하겠는데 조각의 수가 많은 것들은 퍼즐을 맞추어 가다가 그만 성질을 내고는 확 흩어 엎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퍼즐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으면 우리는 그 조각들의 완성된 모습을 짐작조차 하지 못합니다. 눈앞에 흩어진 조각들을 보면 무질서 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퍼즐조각들이 만들어 질 때는 반드시 원래의 밑그림이 존재합니다. 밑그림 없이는 퍼즐조각들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흩어져서 엉망이 된 것 같은 퍼즐조각들을 보면서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퍼즐에는 완성된 밑그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조각나 있어서 밑그림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배리(背理)성에 노출된 우리의 삶도 꼭 이러한 퍼즐과 닯아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의 삶 그리고, 그 삶을 품고 있는 역사도 여러 조각들로 흩어져있을 때는 혼란스럽지만 하나님의 밑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생의 퍼즐 조각들은 그 개개의 것이 어떤 모습이든 의미 없는 조각은 없으며, 그 조각들은 전체 밑그림의 일부가 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전후는 모세의 출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출생은 어떠한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가만히 살펴보면 그의 출생은 매우 불행한 출생이었습니다. 그의 출생 장면에서 보이는 생의 조각들은 ‘불행한 탄생’. ‘죽음’. ‘절망’. ‘버림받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조각들입니다. 기쁨과 행복은 희미하거나 보이지 않고 모두가 어둡고 비극의 모습만 지닌 듯 보입니다. 이것이 갓난아기 모세 앞에 펼쳐진 조각들이었습니다.


태어나는 모든 남자 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왕의 잔인한 명령은 모세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400여 년 전 조상 야곱과 70명의 가족은 가나안땅에서 기근을 피해 요셉이 총리로 있는 이집트로 이주합니다. 40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자손의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합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7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집트의 왕조도 바뀌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조가 들어서고, 이스라엘백성들의 번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의 인구증가를 억제하고 약화시키고 나아가 인구를 줄이려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바로왕의 압제가 시작되고 잔혹한 노예노동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백성의 인구는 증가하자 결국에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져 죽였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이를 출산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기가 그만 사내아이입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석 달을 숨겨 아이를 비밀리에 키웁니다. 그 일은 아이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마 온 가족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석 달 쯤 되자 아이는 자랐고 더 이상 집안에서 소리 없이 몰래 아이를 키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아이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갓난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띄워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이 배어있는 조각그림 속에서는 그 어떤 희망의 부스러기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압제와 탄압, 비탄과 죽음의 그늘이 가득한 한 복판에 모세는 태어납니다.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모든 남자아이를 죽이라는 왕의 잔인한 명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갓난아기 모세의 생의 퍼즐조각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고난과 불합리성 속에서도 자신의 현재가 하나님께서 그려 가시는 온전한 그림 속 ‘퍼즐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그 속에는 시각의 차이가 존재할 뿐인데, 곧 하나님과 우리의 시각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고 말씀하십니다(사55:9).


하나님은 그림의 전체를 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단지 몇 조각의 퍼즐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현재의 몇 조각들이 어두우면 인생 전체가 어두운 것으로 생각하고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현재의 몇 조각이 힘들면 아예 인생 전체를 불행하게 여기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모세의 출생의 그림 조각들을 감상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태어나자마자 강물에 던져져 수장되는 갓난아이들의 비명이 배어나있는 그 그림 속에서는 그 어떤 실낱같은 구원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세를 향한 하나님의 밑그림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밑그림은 모세가 삶의 폭력과 불합리성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압제 하에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해방하는 통로로 세워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삶도 그리고 그의 삶이 담겨져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도 결코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모세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의 삶, 우리의 역사도 그러하다고 믿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버림받음, 상실, 궁핍, 기다림의 조각들은 그를 지치게 하고 포기하게하고 방황하게 할 것입니다. 폭력과 불의가 힘을 더해 가면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흩어진 조각 그림으로 인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몇 조각의 그림이 인생과 역사의 전부인 것처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직 커다란 퍼즐그림의 윤곽도 나오지 않았는데 한 개의 퍼즐조각을 가지고 전부인양 울고 웃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인생 조각들을 조금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모세의 삶의 조각에서 죽음을 부르는 잔인한 왕의 명령이 없었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그랬다면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의 모습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 잔혹한 명령이 없었다면 모세는 갈대상자에 담겨 버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버려지지 않았다면 이집트 공주 눈에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며, 아마 모세는 평범한 히브리노예로 인생 마쳤을지도 모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를 버리게 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악과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며 어두움 속에서 생명을 가꾸어 내신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조각의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몇 조각의 실패와 아픔으로 낙심하여 전체의 그림을 엎어버리고 마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퍼즐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모세의 어머니를 생각해 봅니다.


그녀에게 있어 하나님의 섭리는 ‘나’를 포기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만약 모세의 어머니가 자기목숨을 걸고 숨겨 키운 그 아들 모세를 포기하지 못했더라면 어떠하였을까요? 아들을 감추고 감추어 키우다가 더 이상 감출 수 없게 될 것이고 결국에는 발각되어 모세는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실 아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갈대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띄워 보낸 때의 모세 어머니가 바랐던 바는 ‘그저 갈대 상자 안에서나마 얼마간이라도 아들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하나님의 섭리에 아들을 맡기고 갈대상자를 강물에 띄워 보냈을 때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모세의 인생을 이끌었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면서 소망과 바램도 점점 쌓아갑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무리해서 달려가기도 하고, 정작 간직해야 할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붙잡기도 합니다. 밑그림과는 맞지도 않는 그림조각을 만들어 억지로 끼워 넣으려 애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신앙이 깊어간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애씀에서부터 조금씩 하나님의 섭리의 강에 ‘나’의 뜻을 내어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과 동시에 나의 삶이 머무는 장소와 환경이 하나님의 섭리의 밑그림 속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은 그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나’의 소망을 하나님의 ‘소망’에로 점점 더 합치시켜가는 과정이지 않을까요?


이러한 성장의 좀 더 적극적인 모습이 바로 내가 위치한 상황과 환경에서 하나님을 ‘에크제테오’하는 걸음일 것입니다. 그 걸음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며 갈망하는 것이며, 평화와 생명을 사랑하고 정의와 공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바라는 갈망입니다.


하나님이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급,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들은 결코 우리의 탐욕을 채우는 것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의 권력과 폭력, 지배와 안락 속에서는 좀처럼 발견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은 낮아짐과 섬김에서 발견되며, 또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에서 발견되며,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서 비로소 풍성해 지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반대의 모습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상급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낸 것으로 하나님의 상급이라고 이름 붙이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탑을 높이 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자기의 생각과 욕망에 집착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음으로 삼아 우리의 생각과 삶을 조율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편린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인생조각들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모세의 인생 조각들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섭리라는 밑그림의 중요한 한 부분 이었듯이, 오늘 내가 맞닥뜨린 조각들 또한 그것들이 내 인생을 결정 짖는 기준이 아니며 나아가 그 조각들은 나의 인생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밑그림의 중요한 한 부분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래전 모세의 인생이 하나님께 그렇게 소중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우리,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 모세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동그란 길로 가다>라는 시를 통해 삶의 걸음을 이렇게 시로 노래합니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쁨도 짧다

지옥의 고통도 짧다

긴 호흡으로 보면

좋을 때도 순간이고 어려울 때도 순간인 것을

돌아보면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게 나쁜 것이 아닌 것을

삶은 동그란 길을 돌아나가는 것

그러니 담대하라.

어떤 경우에도 너 자신을 잃지 마라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삶은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는 것이며 긴 호흡으로 조명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인간의 위엄을 파괴하거나 스스로 그 위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의 시선으로 읽는다면, 나의 삶 속에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밑그림이 있으며, 오늘 내 앞에 놓인 조각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내 인생 밑그림의 중요한 부분이기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고 당당하게 오늘을 살아내는 걸음을 걸으라는 격려요 당부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오늘은 주보에도 나와 있듯이 종교개혁 502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502주년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올해는 개혁주의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개혁주의종교개혁은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기념합니다. 쯔빙글리는 35살이 되던 해인 1519년 1월 1일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뮌스터 예배당’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1월 2일부터 마태복음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의 교회의 예배는 미사 형식이었습니다. 설교가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성경 봉독은 전례에 따라 순서대로, 기계적으로 읽혀졌습니다. 쯔빙글리는 그런 관행을 개혁합니다. 주어진 그날의 본문을 읽는 대신, 마태복음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어나가면서 강해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쯔빙글리의 그 설교가 시작점이 되어 이후 개혁주의가 기틀이 잡혔기 때문에 1519년을 개혁주의 종교개혁의 원년으로 삼습니다.(우병훈-‘울리히 츠빙글리와의 대화’ 중 )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루터와는 조금 결이 다른 개혁의 성격을 지닙니다. 루터의 질문은 “죄인인 내가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지만 쯔빙글리의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과 의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 편만하게 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서 보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복음의 영향력에 대한 천착이었습니다. 개혁주의종교개혁에서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한 참여는 주변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중심적인 지점으로 나아옵니다. 이러한 복음의 지향점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맞닥뜨린 삶의 조각을 ‘나’ 개인적인 인생사의 영역을 넘어서서, 그 조각들을 ‘우리’와 ‘역사’ 속에서 읽어내는 데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조각은 ‘우리’의 조각, ‘역사’의 조각 속에서의 의미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압제와 폭력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키고 자유와 평화, 생명과 공의가 다스리는 세상을 도래시키는 통로로 모세의 삶을 이끌어 가셨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해서도 그러한 존재로 세우셔서 이 땅의 역사의 밑그림을 그려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온 우주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혹독한 차별과 탄압 앞에서도 용기를 내어 불의에 맞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고, 부활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포물선이 정의 쪽으로 굽어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이 땅 역사의 밑그림입니다. 그 역사의 밑그림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분투합니다. 불의와 악이 득세할지라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고 연대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이 땅에 도래시키는 그 일에 자신을 복무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억하실 것입니다.



걸어가는 길이 좁고 굽어져 있다고 실망하지 맙시다. 지체되고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포기하지 맙시다. 생체기가 나고 상처가 나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악이 득세한다고 낙담하지 마십시다. 불의 앞에 무너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진리와 생명, 정의와 공의 갈망하기를 멈추지 맙시다.


선지자 이사야는 밑그림을 그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전망하며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그 자리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영이 그에게 내려오신다.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권능의 영, 지식과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 그에게 내려오시니,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 모여들어서, 그가 있는 곳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사11:1-10/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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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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