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0.20 움오름 주일 설교 -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요 17:24-25)

2019년 10월 2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24~25

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5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



설교문

1. ἐν Χριστῷ


지난 시간 바울서신에 반복되는 주요한 단어가 하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ἐν Χριστῷ’(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용어를 무려 169회나 반복 사용했습니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ἐν Χριστῷ는 그의 신학의 핵심이었고, 그의 삶을 견인했던 좌표였습니다.


<ἐν Χριστῷ, 예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주님 안에>라는 삶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쉼없이 기도할 수 있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ἐν Χριστῷ 이 부분을 좀 더 살펴본 뒤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ἐν Χριστῷ의 삶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407장의 1절 가사는 그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 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 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도우심과 통치를 받으며, 영광의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을 노래 한 것입니다. 이 삶을 사도 바울의 서신서에 비추어 정리해 보면 다음의 다섯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사는 삶입니다.

딤후 1:9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선한 행위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택하심(엡 1:4)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전적인 은혜임을 알고, 은혜 입은 사람으로 사는 삶입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서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롬 8:38-39입니다.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절: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삶입니다. 그래서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 속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 안에서 속죄함을 누리는 삶입니다.

엡 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며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넷째, 예수님 안에서 이신칭의의 삶입니다.

고후 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의인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신 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 겁니다. 이것은 1517년 종교개혁의 가장 핵심이 되었던 ‘이신칭의’입니다. 의로움이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잇대어 사는 삶입니다.


다섯째,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삶입니다.

고후 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뀌지 않을 사람, 변화되지 않을 존재는 그 누구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 그 은혜를 누리는 삶은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고도 남을 능력입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안에서>라고 하는 ἐν Χριστῷ의 삶은 이처럼 유한한 인간을 변화시켜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삶을 맛보며 살게 합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어 속죄의 기쁨을 누립니다. 그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삽니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 그것은 바로 이 삶의 원동력입니다. 이것이 ἐν Χριστῷ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연합의 삶입니다.


2. 상황의 통제 - 관계성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제사장적 기도’로 불리는 요 17장 예수님의 기도를 다시 되돌아 보겠습니다. 이 기도 속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창세 전부터 현존하신 분임을 밝히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과 주님의 관계, 주님과 제자들과의 관계, 그리고 제자들 상호간의 관계, 나아가 제자들과 세상과의 관계를 위한 기도로 확장됩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성 속에서 시작하여 서로 안에 거하는 내재와 포용 속에서 하나됨으로 귀결됩니다. 이 모습을 보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믿음은 ‘상황의 통제’라는 목적에서 출발합니다. 그렇지만, 그 지향과 방향성은 ‘관계성’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세 교회에서 강조하는 기도의 모습이나 그리스도인들의 바램은 여전히 최우선 순위가 ‘상황의 통제’에 머물고 있습니다.


고후 12:7-10을 보시면,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는 사뭇 다른 사도바울의 모습을 만납니다. 그는 ’심각한 지병’과 관계된 자신의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하나님께 3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3번이란 숫자상 3번을 넘어 간절함과 애절함이 극에 달하도록 기도했다는 내용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이토록 간절했던 사도 바울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상황을 바꿔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응답하셨습니다. 고후 12:9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존 파이퍼의 설명에 의하면, ‘덜 하나님 중심적인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응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런 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습니다. “하나님, 이것은 제게 고통입니다. 평생 이 고통을 안고 살라고 하신다면, 절 사랑하시는게 아닙니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또는 사랑하지 않으신다”를 규정하고 나누는 척도는 자신이 원하는 문제 해결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대신 자기가 중심인 셈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반응은 이와 아주 달랐습니다. 그는 “약한데서 온전해진다”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자기 위에 머물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 뿐 아니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약함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상황의 통제를 넘어 자신 안에 내재하시며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더욱 깊어져 가는 관계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3.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주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영광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입니다. 비하(卑下, Humiliation)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사됨입니다. 승귀(昇貴, Exaltation)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의 앉으심과 재림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영광을 누린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처럼 비하의 과정을 거쳐 승귀로 나아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주님의 목적은 당신이 이르신 곳에 제자들도 함께 다다르는 것, 그래서 주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 ‘승귀’를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24절을 보시면, 주님은 제자들이 이 영광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보셨던 바로 그 영광을 제자들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영광을 미리 본 사람들은 비하의 과정을 견딥니다. 아파도 이를 악물고 걷습니다. 힘들어도, 외로워도 끝내 완주합니다. 왜냐하면, 아픔의 길, 낮아짐의 그 길 끝은 승리로 이어지는 승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누구보다도 잘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롬 8:18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조금은 다른 반대편의 상황인데, 누군가 이런 글을 전해 왔습니다.

“그런 생각이 든다. 1979년 12. 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은 40년 후인 오늘, 자신의 처지를 알았다면 반란을 했을까? 안했을까?


이 물음은 ‘그리스도와 비하와 승귀’ 관련하여 이런 질문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비하의 끝에 영광의 승귀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비천과 고난 앞에서 잘 견딜까? 안 견딜까?”


흔히들 ‘No cross, No crown’이라고 합니다. 우린 이 뜻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의 삶을 따라 살아가느냐? 아니냐는 아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생각했습니다. 고난의 한 가운데서도 생각해 보니 현재의 그 환난과 아픔이 장차 맞이하게 될 주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플수록, 힘들수록 더더욱 주님 편에 섰습니다. 주님 편 들며 그 삶을 완주했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 주일에도 강조했던 ‘거룩’과도 통하는 일면이 있습니다. 제가 설명드렸던 거룩의 개념을 기억하시지요? 그런데 포천중리교회의 송영윤 목사는 지난 주중 설교원고를 서로 리뷰해 주는 시간에 박동현 교수님의 견해를 따라 다른 정의를 전해주었습니다.


거룩이란? 따로 구별되고, 다른 편에 서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만지신 것,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란 개념이라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분명 아무리 천하고, 더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선하다, 거룩하다 하시면 신분이 바뀝니다. 존재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거룩’에 분명한 인정과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룩이란 개념을 이 부분에만 머무르게 될때, 거룩하냐? 아니냐라는 상태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경계심 또한 견지해야 합니다.


거룩은 구원과 같이 분명 하나님의 선재적인 선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응답도 분명 요구됩니다. 그것은 거룩이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한 성결한 삶에 대한 인간의 애씀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 편에 서도록 구별되게 애쓰고, 몸부림 쳐 가는 것, 바로 그것이 거룩이요, 성화((聖化, sangtification)입니다.


24절에서 조금 많이 나간 면이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거하기를 바라며, 주님이 보셨던 것과 같이 제자들도 주님의 영광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영광을 미리 본 사람은 오늘의 굴골진 일상을 견디며, 노래하며 걸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울림있는 삶


여기서 잠깐 자문해 봅니다. ‘영광을 미리 보기만 하면 아픔의 시간을, 비하의 시기를 견디며 이겨갈 수 있을까?’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후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고 아셨던 주님 조차도 고난의 그 자리를 될 수 있으면 피하시기를 구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그 터널을 끝내 완주하셨다는데 주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름난 종교사학자 필립 젠킨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가난하고 박해 받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멋지게 자라나지만, 부유하고 안전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위축된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보통 가난하고 박해 받는 사람들은 아픔의 그 이후를 바라보며 견디며 소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부유하고 안전한 사람들은 현재에 만족하고, 지금이 영광이다 여기기에 참 영광을 바라볼 눈도, 마음도 갖기 힘듭니다.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요?


요즘 아주 감동 받으며 읽는 책이 있습니다. 워낙 좋아서 매일 조금씩 아껴서 읽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제작자 마틴 슐레스케가 쓴 <가문비 나무의 노래>라는 묵상집입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오늘 예배순서지 ‘움이 트는 생각’에 싣기도 했습니다).


삶이란

정중앙에 흔들림 없이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에는 울음도 없고, 웃음도 없으며,

찬양도 탄식도 의심도 없고, 희망도 가벼운 유머도

진심을 다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중간쯤에 엉거주춤 머무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울림이 죽고, 모든 의지가

어정쩡한 중간 상태에서 정체될 것입니다.

다양한 기운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대신,

삶이 뜨뜻미지근해질 것이며, 결국

영혼의 생기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혹시 현재 우리 삶이 너무 만족스럽고 부유하고 안정적이어서 모든 것이 정중앙에 엉거주춤 머무르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도 한 때는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 그때 간절했던 그 마음, 그 동경의 불꽃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면, 그전까지 우리가 믿음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다 타버린 재로만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와는 다르게 현재 우리 자신이 끝모를 아픔과 고난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면, 우리는 힘내어 주님의 영광의 날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 영광을 날을 소망하며 견디며 이겨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너무나도 평탄하고 안정된 삶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는 더더욱 간절한 맘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 삶의 자세를 채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겉은 매우 화려하나 아름다운 울림을 지니지 못한 악기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기독교 신앙은 줄곧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뒤 주어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광이었습니다. 주님도 그것을 잘 아시기에 먼저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비하를 친히 감내하셨고, 그 결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영광에 다다르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주님의 영광이 어떠한지 잘 알았기에 긴 고난과 궁핍과 핍박 앞에서도 더더욱 주님을 찾으며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의 신학을 배제한 채 영광의 신학만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명백히 세상법을 어기고 예배당을 건축하고도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라고 거짓말 합니다. 대법원에서조차 불법이라고 판결났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탄압이라고 반격합니다.


어떤 교회는 교단총회의 헌법을 우습게 여기고 아들에게 세습했습니다. 그런데도 해당교단은 수습안이라는 것을 통과시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안’으로 세습을 허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도 하나님으로부터 세습하셨다며,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다는 이상한 교리로 혹세무민 했습니다.


이렇게 몇몇 대형교회들이 초대형사고를 치는 속에서 교회는 자기들만의 영광을 추구하는 단체, 계모임 같은 인상을 덧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들의 영광을 취하는 세태 속에서 우리는 어떤 영광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주일입니다.


하나님~

우리 삶에 울음도, 웃음도, 탄식도, 의심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때로 이것들이 뒤섞여 짓누르는 것이 버겁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삶의 무게로 인해 우리 영혼의 생기가 사라지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걸음 내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바라건데, 이 땅에서의 우리 삶이 지속되는 동안 고난 당하신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손잡고 걷는 이 걸음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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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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