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10.13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비옵는 것은"(요 17:20-24)

2019년 10월 15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20~24

20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3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4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설교문

1. 어느 편에 서느냐? 누구의 편을 드느냐?


지난시간 내용을 잠시 회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몸부림만 친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회색지대를 통과해 신앙의 흰색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진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성별한다’, ‘따로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동 시대, 동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의 저급한 시류를 좇지 않고 따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편을 들며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편드는 삶’ …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하다고 여기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때로 박해를 당하는 삶이고, 때로 차별받는 삶입니다. 나아가 항상 소수의 자리에 서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난 기독교 신앙의 역사가 증언해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 편드는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은 늘 소수의 사람, 적은 무리였습니다.


작년 여름수련회에서 함께 공부했던 성경은 여호수아서입니다. 24장으로 구성된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장(24장)은 여호수아의 유언과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여호수아는 죽음 전 마지막 호흡을 다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 신앙’을 당부하며 그들이 하나님 편에 서도록 언약케 합니다. 수 24:14-15입니다.


14절: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절: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백성들을 향해 독려하는 한편, 먼저 자신과 가족들이 하나님 편에 서겠다고 고백하는 이 언약식이 거행된 장소는 세겜(shechem)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북쪽 약 49km지점에 위치한 세겜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은 곳(창12:6-7)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 밧담아람의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을 때 그와 가족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우상들을 모두 땅에 묻은 곳이 세겜이었습니다(창35:4).


여호수아는 분명 선조들이 신앙을 결단했던 이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고 신앙의 결단을 촉구했음에 분명합니다. 조금 전 함께 봉독한 수 24:14은 ’그러므로’라는 인과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여호수아가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지나온 역사를 설명한 뒤 그러한 이유에 근거하여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촉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가나안 입성 후 7년의 정복 전쟁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줄곧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 하나님 편에 섰다면 굳이 여호수아가 지나온 사건들을 언급한 뒤 우상을 치워버리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가 마지막 힘을 다해 이렇게 우상을 버릴 것과 하나님 편에 설 것을 촉구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7년의 짧은 시간 속에서도 벌써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종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의 반증입니다.


벌써부터 가나안 신앙으로 쓸려갈 것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제의 것도 아니고, 내일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누구를 섬길 것인지, 누구 편에 설 것인지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중립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닌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 아닌 곳에서부터 돌아서는 겁니다. 여호수아 후 500년, 이 부분을 절실히 깨달았던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왕상 18:21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 한쪽만 선택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그 말을 듣는 백성은 말 한마디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쪽만 선택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편이에 따라 이쪽도 선택하고, 또 저쪽도 선택하며 살고 싶다는 겁니다. …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간 얼마나 하나님 편에 서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 편 들며 사셨습니까? 어느 때까지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 사이에서 머뭇머뭇 할 수는 없습니다. 2019년 가을엔 하나님께로 확 돌아서서 줄기차게 하나님과 한팀, 편먹는 계절이었으면 합니다.


2.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곧 있을 체포와 십자가를 앞에 둔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3가지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주님이 하나이듯이 제자들도 하나되게 해 달라고 구하셨고,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인 20절은 그 3가지의 기도 다음의 기도를 이렇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내가 비옵는 것은…”이라는 말씀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지금 주님 곁에 있는 제자들만을 위함이 아니고, 그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도 위함이랍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 당시 눈 앞의 사람들 만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2019년 바로 오늘 우리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얼마나 감동이 되는 말씀입니까! 십자가를 목전에 둔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아닌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하나되게 해 주십시오! 보전해 주십시오!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 기도가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주님의 이 기도를 보며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랑, 그를 위한 기도는 그 사람 뿐 아니라, 그 사람 이후의 누군가를 위한 기도요, 헌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몇년 전 은퇴를 앞둔 어떤 분이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 공헌할 3가지의 궁극적인 헌신이 있습니다. 첫째는 책을 쓰는 것이고, 둘째는 건물을 세우는 것이고, 셋째는 단체를 만드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온 그 분은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저를 비롯한 몇명에게 그 말을 전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당시 분명 저건 아니다 싶었는데, 마땅히 반론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공헌할 궁극적인 헌신은 책도 아니고, 건물도 아니고, 단체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책도, 건물도, 단체도 사람을 세우기 위한 도구요, 통로일 따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를 보면 주님의 관심이 시종일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보입니다. 주님은 첫째도 사람이었고, 둘째도 사람이었고, 셋째도 사람, 바로 주님을 믿을 우리였습니다.


그런데, 20절의 주님의 기도를 찬찬히 살펴보니 그냥 장래에 주님을 믿을 사람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거기엔 중요한 수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을 사람들’입니다. 지금 주님의 눈 앞에 있는 제자들은 지난 3년간 주님과 동고동락 (同苦同樂)하며 지냈습니다. 눈으로 직접 주님을 뵈었고, 손으로 주님의 살결을 느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주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제자들의 말을 통해 주님을 믿게 될 것이랍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냥 후에 나를 믿게 될 자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기적도, 치유도 아니고, 방언도 아닌 예수님을 전하는 제자들의 말로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어떻게 말로 그리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이후 제자들의 말에 담긴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제자들의 삶이 그들의 말을 힘있게 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말에 권위와 권세가 덧입혀 졌습니다.


신학교 재학시 2번 방문했던 태백 예수원에서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대천덕 신부님과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당시 연로하셔서 거동도 자유롭지 못하시던 그분이 나지막하게 들려주시던 목소리엔 굉장한 권위와 힘이 실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사랑이신 하나님 안에서 우리 모두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합니까? …”


교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매우 평이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대천덕 신부님을 통해 전해지는 그 메시지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는 확이하게 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온 생을 쏟아 사람을 사랑해 온 그분의 삶이 그 말 속에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비록 이 세상을 2002년에 떠나셨지만, 그분에게 들었던 그 말씀은 오늘도 제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전한 말을 통해 그 다음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 제자들이 전한 말을 통해 또 그 다음, 그 다음… 이렇게 해서 오늘 우리들이 믿는 사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뒤를 이을 사람들의 모습이 그리 밝지 않습니다.


지난 6월 25일 <기독신문>이 한 교단의 설문조사결과를 인용해 밝힌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 청소년들 중에서 2-3%만이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선교학에서 3% 이하를 미전도종족이라고 합니다. 언어와 생각과 문화가 다른 종족에게 복음으로 다가갈 때 그들의 언어로 그들 속에 들어가듯 이제 그렇게 해야 할 때입니다.


나아가 왜 이런 현상 앞에 서게 되었는지를 돌아보며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물론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뒷세대에게 들려지는 우리 말에 힘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삶이 동반되지 않은 공허한 말로 혹 우리가 그들에게 들려져야 할 주님의 말씀, 복음을 가로 막아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한강의 물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사람들은 결코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강을 연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오염되어 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오염시키고, 다음세대에 전해져야 할 복음을 가로 막고, 청소년들이 미전도족속이 되게 한 사람들은 결코 타종교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 우리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동의하고 절감한다면, 우리의 말로 말미암아 주님을 믿을 사람들을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지난 주간 김민웅 교수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귓전을 울렸습니다.


"지식인은 민중의 삶과 미래에 헌신해야 한다. 현장 없이 논평만 하는 지식인들은 그런 역할과 임무로부터 스스로 퇴각하거나 아니면 역사에 기여하지 못한 자로 전락하고 있다.”


그의 말이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삶과 미래에 헌신해야 합니다. 현장 없이, 삶 없이 말만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역할과 임무로부터 스스로 퇴각하거나 아니면 하나님 나라 역사에 기여하지 못한 자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전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듯이, 우리의 전하는 말로 사람들이, 우리 가족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3.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21절 - 23절의 말씀에 대해선 9월 22일에 이어 지난 주일에도 간략하게 나누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듯이 제자들도 하나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과 속성을 거스르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것이 가능하게 되는 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세상에 알리는 가장 좋은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어려운 일이 가능하게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주님은 21절, 23절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 안에,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13개의 서신서를 보면 반복되는 주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 안에서’라는 용어입니다. 무려 169회나 반복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교회론에 대해 집중해서 전하는 에베소서에서만 3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서신을 연구한 학자들은 사도 바울의 신앙을 한 마디로 ‘ἐν Χριστῷ’(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바울 사도는 서신을 쓸 때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주 안에서 강건하여라”… 등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살도록 권했습니다. 심지어 엡 4:1에서는 “주 안에서 갇힌자 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고 말하며 사도 자신이 주 안에 있음으로 인해 죄수의 몸이 되어 있음을 말하기 까지 합니다.


그는 예수 안에 있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예수 안에 있었기에 쉼없이 기도할 수 있었고, 예수 안에 있었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 ‘ἐν Χριστῷ’(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비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온 맘과 삶이 들어간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눈 앞의 제자들 뿐 아니라, 그 제자들의 말로 인해 주님의 사람될 오늘 우리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주님의 삶이 들어있는 것이었듯이, 제자들이 전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권위와 권세가 있었습니다. 허나 오늘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말에는 삶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다음을 이어갈 청소년들의 2-3%만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의 삶과 미래에 헌신해야 하는데, 그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뒤를 이어 이 땅을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어떤 궁극적 헌신을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ἐν Χριστῷ’(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본보기로 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덕분에 그는 항상 기뻐할 수 있었고, 예수 안에 있었기에 쉼없이 기도할 수 있었고, 예수 안에 있었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주님이 그 안에, 그가 주님 안에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우리까지 전해오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복음을 전해받은 우리는 우리 시대를 어떻게 이어가시렵니까? 마지막으로 한희철님의 <말없이 당신께>라는 시를 보며 오늘 우리의 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멀 너머 계신 당신께

말로써 나아가는 게

어렵습니다.

저녁 어스름

강물 거슬러

제 집으로 돌아가는

물새처럼

말 없이도

당신께 가는 길을 배우고 싶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삶이 배제된 말이 힘이 없고 공허하듯 우리 삶이 그러하고, 우리 말이 그러하지 않은지 되돌아 보니 많이 맘 아픕니다. 미전도종족으로 남은 청소년들을 보니 무엇하며,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니 그저 부끄러워 낯을 들기도 민망합니다. 우리 세대의 잘못으로 이 땅에 전해온 복음이 단절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로 굳게 세워주셔서 우리 말에 우리 삶이 녹아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2천년 전 주님이 기도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이 전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되었듯이, 앞으로 이 땅에서도 우리가 전한 말로 그리스도인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세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윤성천 집사의 봉헌기도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는 것 같은데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이 녹녹치 않습니다.


기독교가 세상에 전파되고 가장 영향력있는 신앙이 되기까지 주님의 제자들은 물론이고 믿음의 조상들의 복음의 메시지에는 사랑과 헌신의 삶이 뒷받침되었기에 권위와 권세가 있었는데, 지금의 우리 상황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약함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배우고 물려받은 귀한 믿음을 후세들에게 잘 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으로서, 믿지 않는 사람,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 세상을 더 사랑하는 사람과 구분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특히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열매가 삶에 나타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성령 하나님을 붙들겠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의 행실을 보고 주님을 찾는 사람이 나오도록 사람들의 삶과 미래에 헌신하겠습니다.


나약한 우리를 위해 옛부터 기도하셨고 지금도 중보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의 앞길을 친히 인도해 주실 것으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들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정성껏 하나님께 올립니다. 드리는 마음을 축복하여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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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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