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9.29 움오름 주일 설교 - "에크제테오Ⅱ - ‘자기를 찾는 사람들’"(히 11:6)




















히브리서 11:6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설교문

에녹의 생에 속에서 아들 ‘므두셀라’의 출생은 자신이 누리며 향유해 오던 그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무너져 심판아래 있게 될 것이라는 영적 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 후 에녹은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불경건함이 가득했던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고 찾습니다.


본문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고 할 때 그 찾는다는 말이 ‘에크 제테오’입니다. 이 단어는 ‘에크’(~로부터)와 ‘제테오’(찾는다)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즉 ‘찾아내다(find out), 자세히 살피다, 정밀하게 조사하다, 주의 깊게 부지런히 수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사냥개가 깊은 수풀 속에 숨어있는 사냥감을 향해 추적하며 찾아내는 모습입니다. 그것은 또한 산맥 깊은 곳에 금광을 발견하고 추적하여 캐내는 광부처럼 역사의 현실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며,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선포하는 추적자의 발걸음입니다.


이렇게 동사 ‘에크 제테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임을 알고 그 하나님을 찾고 찾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러한 삶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성경이 에녹에 대해 진술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을 찾는, ‘에크제테오’ 하는 에녹을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에 대해 갈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어도 자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에 익숙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닌 것에 더 익숙하고, 또 그것이 생활에 더 실제적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것은 사람들의 바람과 다른 것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생명과 진리가 굳건해 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급은 결코 우리의 탐욕을 채우는 것일 수 없으며, 세상에서의 권력과 폭력, 지배와 안락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낮아짐과 섬김에서 발견되며, 또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에서 발견되며,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서 비로소 풍성해 지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반대의 모습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에크제테오’하는 사람은... 불의와 악의가 가득한 현장의 한 복판에서도, 그리고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그것에 휩쓸리거나 압도되어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건과 현장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아내며, 그곳에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도래시키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오늘 본문 속의 에녹의 하나님 찾음과 같은 단어인 동사 ‘제테오’가 등장합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15:8)


유명한 예수님의 ‘잃었다가 찾은 한 드라크마비유’입니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익숙한 모습은 <전도>에 관한 이미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죄인들에게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하는 것, 그 이미지가 이 말씀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그려집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로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마 그들을 영접하시고 식사도 함께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죄인들’을 영접하고 밥까지 겸상하면서 먹는다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태도를 지켜보셨던 예수님은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이 드라크마비유는 두 번째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은 바로 <죄인>이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죄인’이라는 말을 교리적인 의미로 제한하여 흔히 이해합니다. 즉, ‘예수 믿지 않는 죄인’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차마 인간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더럽고 몹쓸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어감의 윤리적인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죄인>이라는 단어가 성경 당시의 사회 속에서는 그러한 의미를 넘어서는 보다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은 천대받는 사람, 율법적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신분이나 직업을 가진 사람, 소외 된 사람, 병든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죄를 지은 사람, 윤리적으로 옳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포함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따진다면야 의인으로 여겨졌던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들도 모두 죄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접하셨던 죄인은 그러한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 소외되고, 공동체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을 뜻하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죄인’에 대한 이러한 시각을 놓치지 않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비로소 오늘 우리들의 삶에 더 직접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럴 때 말씀은 더욱 나의 삶과 생활에 보다 밀접하게 관련된 이야기가 되고, 나의 구체적인 관계 현장의 이야기로 말씀이 다가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지향점에까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비유 속에서 <죄인>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입니다.

그런데 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는 여인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고 크나큰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여인 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없는 작고 미미한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크지도 않고 없어져도 관심 갖지 않는 작고 미미한 존재이지만, 그것을 잃어버린 여인에게는 크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찾습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가 찾는다는 뜻의 ‘제테오’라는 동사의 현재직설법인 ‘제테이’입니다. 현재직설법은 반복과 계속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데 발견할 때까지 열심히 찾고 찾는 모습이 문법 속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는 작아서 잊혀지기 쉬운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라져도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 아니 존재하는지 조차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 사회로부터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바람의 대상이 되는 이들 또한 있습니다. 다수로부터 밀려난 이들이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죄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라졌던 이웃들이 두둥! 하고 등장하게 됩니다.


저는 어린이들도 우리 사회에서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미성숙한 존재로 인식되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고, 어른들의 부속으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체적이고 사회 문화적인 이유로 인해 전반적인 영역에서 성의 평등이 미루어진 여성들이 있습니다. 어린 미혼모들이 있고, 난민과 이민자들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있고, 성소수자들이 있으며,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적인 댓가를 다 치뤘지만 전과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 속에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있고, 어떤 이유에서든 생의 기초를 구성해야 할 가정을 가출한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해고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비정규직 노동의 현장과 관련된 이들이 있고, 공정의 촛불에 조차 감히 끼어들지 못하는 울타리 밖의 청년들이 있습니다. 실직으로 인하여 관계로부터 밀려나는 이들과 빈곤한 노년의 삶을 견뎌야 하는 이들이 있으며, 언제든 주변부로 밀려나기 쉬운 다문화가정의 현실이 있습니다. 중한 병에 오래 동안 고통 받는 이들이 있고, 정서적 육체적 기능이 일정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습니다.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재해로 고통을 짊어진 이들과 그 가족들이 있습니다.


이 중 많은 이들이 애써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잊혀지기 쉽고 기억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미미하여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습니다. 이들은 온 집안을 빗자루를 쓸면서 샅샅이 찾지 않으면 잘 찾아지지 않습니다. 이들의 고통과 불안과 두려움은 등불을 켜고 들추어서 보지 않으면 농장 뒤나 침대 밑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쉬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시선을 넓히면 우리가 잃어버린지도 모르게 잃음을 당한 이들과 함께 우리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그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에크제테오’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저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모습 속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등불을 켜는 언어 속에 계시고, 빗자루로 집안을 쓸고 쓰는 언어 속에 계시고,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는 언어 속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고 주목받지 않는 이들의 소리와 함께 계시고, 손 내밀지 않으면 잡히지 않는 농장 밑에 숨겨져 있는 이들의 몸짓과 함께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행한 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청파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기석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철학자는 ‘낯선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을 선택할 때,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볼 때 비로소 인간의 윤리가 완성 된다’고 말했다. ‘너’를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 라고 반문합니다.


우리사회는 지금 공정의 문제 이면에 도사리고 있었던 점점 고착화 되는 사회의 계층화가 만들어 내고 있는 절망과 아픔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촛불조차 들지 못하는 울타리 밖 청년들의 낮은 웅얼거림, 가냘픈 신음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성찰의 목소리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부요해진 한국교회는 높아지고 거대해지려는 탐욕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그 탐욕의 노예가 되어 불법 세습의 죄를 교단의 이름으로 옹호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찾았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가 담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은 외면한 채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근심거리가 되고 세상으로부터의 교훈과 질타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너’를 통하지 않고 ‘나’의 필요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에크제테오’하려했던 지난날의 과오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에크제테오’하는 것은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고, 불편하게 만들 수 있고,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이기에 고독하게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내야 하는 일일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고, 연약한 이들과 연대해야 하는 일이며, 손해와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창한 특수사역을 해야 한다거나 사회사업을 해야 한다는 것 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의 시선의 변화로부터, 지향점의 변화부터, 그리고 일상의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의 곁을 내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그것이 확장되어 가지만 결국 그것으로 귀결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국, 하나님 찾음은 ‘나’의 필요를 통해 찾아왔던 하나님 찾음에서 ‘너’ 특별히 침대 밑에, 장롱 속 캄캄한 곳에 숨어있는 ‘너’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는 새로운 성찰과 영적 각성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에크제테오’는 달리 말하면 ‘잃어버린 드라크마 찾기’의 또 다른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에크제테오’, ‘드라크마 찾기’에는 또 우리들이 쉬 생각지 못하는 중요한 면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실은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잃어버림을 당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나 다수이면서 소수라는 사실이며, 어떤 곳에서는 다수이고 어떤 곳에서는 우리는 소수가 됩니다. 또한 지금은 다수로 살지만 어느 때인가는 소수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수의 목소리를 어떻게 다루고 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대하는지 살피고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이야기’는 그들을 위한 이야기가 이기도 하지만 곧 ‘나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나의 신앙자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렇게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나’를 포기하지 않고 ‘에크제테오’하시는 하심의 은혜를 힘입어, ‘나’의 필요를 통한 하나님 찾음에서 벗어나 ‘너’를 통한 하나님께 이르는 신앙의 걸음으로 점점 옮겨가는 우리의 신앙걸음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걸음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고, 우리가 시민으로 속해있는 우리의 국가와 사회가 하나님의 뜻을 더 많이 담고 실현해가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스위스연방헌법의 전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능하신 신의 이름으로! 스위스 국민과 주(Kantone)는, 창조에 대한 책임을 유념하고, 세계를 향한 개방정신과 연대정신으로 자유와 민주주의, 독립과 평화를 강화하기 위한 우리의 연대를 새로이 할 것을 결의하며, 타인을 존중하며 공정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다양성 속에서 함께 삶을 영위할 것을 다짐하며, 공동의 경험을 자각하고, 미래세대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유를 행사하는 자만이 자유로우며, 국민의 힘은 약자의 복지를 척도로 평가됨을 인식하며, 여기 다음의 헌법을 제정한다.”(위키문헌)


국민의 힘의 크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계층의 복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국민의 힘은 약자의 복지를 척도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에크제테오’하시는 그 은혜의 힘으로 우리의 ‘에크제테오’를 통하여 이 나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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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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