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9.22 움오름 주일 설교 -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0-15)

2019년 9월 24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10~15

10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1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3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14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5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설교문

1. 영광을 받았나이다


사람은 속성과 심적구조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너나 할 것 없이 그렇게 삽니다. 자연스런 현상이고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자기의 이익과 결부되면 다른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짓도 서슴치 않고 자행합니다. 인간의 심성이 죄에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굳이 성선설과 성악설로 나누자면, 성경은 성악설이라고 선언합니다.


롬 3:9-12입니다.

9절: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절: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절: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게 인간의 본 모습이요, 수준입니다. 그런데, 간혹 공익과 공공의 선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내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이익에 충일한 심성을 거스른 결과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와 목적을 지향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은 이런 높은 가치와 목적을 지향하는 이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습니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을 뿐 아니라, 지극히 자기이익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학식이 풍부하거나 통찰이 뛰어난 사람들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번 깨닫고 믿은 것은 온 힘을 다해 지키는 신념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주님을 이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셨겠습니까?


우리교회 안에도 많은 분들이 음악을 전공하셨는데, 아마도 대부분의 음악인들은 이런 바램을 안고 살아갈 겁니다. 배우던 시기엔 더 탁월한 연주자가 되고 싶은 열망, 그리고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더 뛰어난 제자로 만들고픈 열망… 더 나은 제자, 더 훌륭한 제자로 키우기 위해선 당연히 선생님의 가르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엔 선행되어야 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재능있고, 열정있는 학생을 선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일반상식을 벗어나도 한참을 벗어난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택하신 제자들은 평범할 뿐 아니라, 때로는 수준 이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까지 했던 행동들을 보면 그 수준이 충분히 가늠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맡기셨던 그 제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더 나아가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10절입니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주님은 9절에 이어 10절에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당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요, 또한 하나님의 소유가 주님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아가 그 제자들로 인해 주님께서 영광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아니 예수님도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 왔는지를 뻔히 아실 텐데 어떻게 그들로 인해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부분엔 신학자들의 두 가지의 주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눅 10장의 경우처럼 70인 제자들의 복음전파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나타날 제자들의 미래적이고 잠재적인 부분을 미리 예언하듯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두 의견 모두 설득력이 있습니다. 전자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제자들의 모자람과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믿고 인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후자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미래적 선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 훨씬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편없는 실력과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적으로 신뢰하고 인정해 주시는 주님의 격려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오순절 이후 실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신뢰 덕분이었습니다.


<좋은생각>의 발행인이었던 정용철님의 에세이 <불량품>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불량품입니다.

자주 삐거덕거리고 멈추고 흔들립니다.


그런데도

나를 안아 주는 가정이 있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고

나를 받아 주는 직장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를 불량품이 아니라 명품이라 부릅니다.

그들은 나를 자랑하고 기뻐하며 소중히 여깁니다.


불량품인데도 내가 이렇게 당당한 것은

그들의 사랑 때문입니다.


자신을 안아주는 가정과 가족, 좋아하는 친구들 그리고 받아주는 직장이 있기에 불량품인데도 불구하고 당당히 살아간다는 시인의 고백에 공감이 갑니다. 맞습니다. 누군가 믿어주는 이, 지지해 주는 이, 격려해 주는 이가 있으면 일어납니다. 넘어졌다한들 다시 일어나 달려갈 수 있습니다. 시인에겐 가족을 비롯한 가까운 이들이 그러했듯이, 제자들에겐 주님의 신뢰와 격려가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셨던 주님의 신뢰와 격려는 오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아직도 넘어지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는 사람이지만 우리들의 나중이 어떻게 될지 명약관화 (明若觀火)하지 않겠습니까!


2. 보전하사


제자들을 통해 영광받으셨다는 주님은 이어 11절을 통해 그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곧 있을 주님의 부재시대를 살아갈 제자들을 위해 주님은 하나님께 2가지를 구하셨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을 보전해 주시고, 다른 하나는 하나되게 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두 부분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고 하실 때 ‘보전하다’로 번역된 τηρέω(테레오)는 ‘굳게 붙잡다, 지키다, 보살피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런 뜻들을 감안하자면,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주님의 요청은 ‘굳게 붙잡아 완전하게 지켜 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제자들을 굳세게 붙잡아 지키시는 방안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한번 11절의 해당부분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주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제자들을 굳세게 붙잡고, 완전하게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몇 구절의 성경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시 20:1-3입니다.


1절: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절: 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절: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시편기자는 환난의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기를 구하며 우리를 도우시고, 붙드시고,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받아주시는 분을 일컬어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쓰고 능력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부분은 시 54:1에 보다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문장은 댓구형식을 취하며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변호하소서’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반복을 피하기 위해 후반부는 ‘주의 이름’ 대신에 ‘주의 힘’으로 표현했습니다. 주의 이름이 곧 주의 힘이라는 뜻입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은 구약성경의 전통 속에서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아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기도 속에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셨습니다. 고로 이를 반영하여 재해석해 보면 이런 간구가 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능력으로 그들을 굳게 붙잡아 완전하게 지켜 주옵소서”


하나님의 힘으로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주님의 기도는 12절, 15절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12절에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금껏 제자들을 지키고 굳게 붙잡았다는 고백과 아울러 단 한 사람, 가룟 유다는 그 예외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다름 아닌 성경의 예언을 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구원과 선택의 부분이기에 간단히 설명하기 쉽지 않습니다. 기회가 되면 시간을 갖고 면밀히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15절에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한 기도의 목적이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니 한 사람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시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시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 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략)…


퇴역한 뒤 재임용되어 일흔이 넘은 나이에 한국전에 참전했던 맥아더 장군이 1952년 5월 한국전 당시 그의 자녀를 위해 드렸던 기도의 일부입니다. 그의 기도는 오늘 본문 속 주님의 기도와 닮아 있습니다. 그는 환난을 제거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환난 속에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아들로 키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병균이 없기를 구하는 기도보다는 병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갖게 해 달라는 기도를 연상케 합니다. 믿음의 자녀라고 해서 고난이 완전 제거된 무균실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능치 않은 일이고 타당치 않은 요구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고난을 제거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구했습니다.


맥아더 역시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 그의 자녀들이 환난 가운데에서 쓰러지지 않으며 오히려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기도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보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우리들도 거짓과 불의가 가득 찬 세상 속에서 견뎌가고, 이겨가게 보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앞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요 14:1을 기억하고 또 마음에 새겨야 겠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3.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어는 ‘보전하사’입니다. 중요하기에 본문 속에서 3번이나 반복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반복이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하나됨’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을 보전하시는 것의 궁극적 목적이 제자들의 하나됨이라는 겁니다. 11절 후반절을 제가 쉬운성경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자들을 지켜주시는 이유가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겁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제가 신학교 재학시절 교정에 이런 플랑카드가 걸렸습니다.


“주여, 우리를 하나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 플랑카드를 보며 모두들 별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영성학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되어서 뭐 할려고요?”


그 질문은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하나되어서 뭐 할런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되게 해 달라고만 구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제자들이 하나되기를 구하셨습니까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야 할까요? … 요 17:22-23입니다.


22절: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절: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11절에 이어 22절에서도 반복해서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주님은 23절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과 주님을 사랑하심 같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세상으로 알게 하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그 길이 제자들이 하나되는 것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온전히 하나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인간세계에서 이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톰소여의 모험>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 마크 트웨인이 이 부분을 이렇게 풍자했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우리에 넣었습니다. 둘은 서로 원수인데 시간이 지나자 곧 친해져서 잘 지냈습니다. 그 다음에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넣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당황한 눈치였는데, 조금 지나니 그들도 역시 잘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천주교인을 섞어서 한 우리에 집어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바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좀 지나면 괜찮겠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싸움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풍자이긴 하지만, 믿는 이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되기가 어렵더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회만 주어지면 편당과 당파를 조직해 나뉘기를 즐깁니다. 우리가 툭하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를 본받자!”라고 하는 그 초대교회에도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불화와 오해가 많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어떻습니까?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에다가 심지어 그리스도파까지 있어서 서로 갈라져 크게 분쟁하는 추태를 보이곤 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실상이고, 실력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은 인간의 본성과 속성을 뛰어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이 하나 됨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이요, 통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4. 함께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 교회의 생명력은 ‘하나 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달라진 제자들의 모습을 표현하는 품사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함께'라는 부사입니다. ‘함께’라는 말은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것’, ‘여럿이 한데 어울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44절),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절), ‘함께 음식을 먹고’(42절, 46절).


성령님의 오심은 이처럼 나눠졌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초기 폭발적인 확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 모습을 보며 오늘 우리교회의 모습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함께’를 위해 매 주일 예배 후 김밥과 빵으로 함께 음식을 나눴습니다. ‘3덜 교회’(덜 멋진 교회, 덜 훌륭한 교회, 덜 가진 교회)가 되겠다며 할 수 있는대로 교회 밖과 나누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진정 교회의 본질인 ‘하나 됨’, ‘함께’에 얼마나 힘을 썼나 부끄럽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무론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가장 퇴색되고, 없어져 가는 말이 있다면 그 중의 대표적인 하나가 ‘연대’(solidarity)라는 말, 바로 ‘함께’입니다. 마치 각자 각자가 하나의 섬처럼 존재해 가고 있습니다. 각자도생해야 하다보니 다른 이들과 함께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겠지요. 그렇다면, 바로 이러한 때일 수록 이 시대,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 가야할 지 보이지 않습니까? 어떤 모습의 그리스도인, 교회여야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통로가 될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수준이 하찮고, 실력이 여전히 밑바닥임에도 불구하고 믿어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힘을 다해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해 주시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의 이 감사가 하나님과 하나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 교회가 되어 이 시대, 이 사회 속에서 함께 호흡해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윤성천 집사 봉헌기도>


죄에 오염된 심성을 거스르며 어떻게든 주님이 바라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돌아보면 늘 제자리인 것 같습니다.

저의 이익을 완전히 내려 놓은 것은 여전히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부족함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격려해 주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켜주심을 감사합니다.

때로는 고난을 주시지만 고난을 이길 힘과 방편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살든지 죽든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 앞에 반듯하게 홀로서기도 어려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형제 자매된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할 때 더 힘든 경우가 많고 특히 갈라진 의견을 조율하기는 참 힘이 듭니다.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에나 네 뜻대로 하라고 응답하셔서 그런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함께 하나되는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모습이요 통로라고 하셨는데 우리 움오름교회부터 그리고 나아가 한국과 세계의 모든 교회가 하나됨을 위하여 더 노력하고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인인 우리들의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능력으로 인도해 주실 것으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들에게 주신 것의 일부를 정성껏 하나님께 올립니다.

드리는 마음을 축복하여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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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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