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9.15 움오름 주일 설교 -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요 17:6-9)

2019년 9월 1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6~9

6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7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설교문

1. 심청전(沈淸傳)


춘향전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읽혀온 심청전(沈淸傳)은 연대 미상, 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고전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고 주제는 명료합니다.


가난한 봉사 심학규의 딸로 태어난 주인공 심청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눈먼 아버지의 젖 동냥으로 건강하고 바르게 자랐습니다. 여기서 잠깐 봉사(奉事)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조선 초 조정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침술을 가르쳐 그 중 우수한 사람들을 선발한 후 종 8품의 의원직 벼슬을 내렸습니니다. 그런 관습 이후 시각장애인들은 ‘봉사’로 불렸습니다. 심청의 눈먼 아버지가 심봉사라고 불렸던 이유도 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심청은 온갖 허드레일을 하며 아버지를 지성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공양미 300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아버지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의의 제물로 자기 몸을 팔았습니다. 심청은 인당수(印塘水)에 빠졌는데, 용왕은 심청을 연꽃에 태워 다시 인당수로 보냈습니다. 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그 연꽃을 왕께 바쳤는데, 왕은 연꽃에서 나온 심청과 혼인했습니다. 왕비가 된 심청은 고향을 떠나 떠도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잔치를 열었는데, 그 잔치에 온 아버지는 딸을 만나자 반가움과 놀라움에 눈을 떴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정성과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심청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주제는 당연 효, 효 사상입니다. 그래서 어린시절부터 읽기도 하고, 듣기도 했던 심청의 이야기는 늘 우리를 효와 관련하여 되돌아 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던 심청전은 이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심오한 사회적 메시지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읽게 된 김민웅 교수의 <동화독법> 속의 심청전은 동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게 했습니다. 동화의 힘이란? 이야기의 힘 뿐 아니라, 삶을 해석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김민웅 교수의 시각을 빌어 <심청전>을 조명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심청전의 시각으로 오늘 성경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2. 효(孝)가 아닌 사회고발


1) 심학규

심청전의 이야기는 봄기운이 만발한 시절을 노래하면서 황주 도화동에 사는 봉사 심학규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사는 곳은 복숭아꽃이 피는 도화동, 인근 마을은 무릉동이라고 하니 이 두 마을의 이름을 짝하면 낙원을 의미하는 ‘무릉도원’이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명이 주는 인상과 달리 심봉사의 현실은 고단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아마도 아무 근심, 걱정없는 무릉도원에서 살고 싶은 인간의 갈망과 실제 현실 사이의 격차를 예고하는 듯함이 마을들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심봉사의 이름은 학규, 두루미 학(鶴)에 별 이름 또는 걷는 모양 규(奎)자를 써서 학처럼 기품 있고, 별 처럼 빛난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책은 그런 심봉사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눈까지 멀어 뉘라서 대접할까마는 본디 양반의 후예로서 행실이 청렴정직하고 뜻이 고상하여 행동거지에 조금도 경솔함이 없으니, 그 마을 눈뜬 사람들은 모두 그를 칭찬하는 터라.


사람됨이 괜찮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살림살이는 곤핍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할 가장이었지만, 앞을 못 본다는 이유로 심봉사는 모든 경제활동을 전적으로 부인 곽씨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곽씨 부인의 모습을 책은 몸을 아끼지 않은 채 삯바느질, 삯빨레, 삯 길쌈, 염색하기, 음식 만들기, 술 빚기, 떡 찧기를 하며 1년 360일을 쉬지 않고 품을 팔았다고 했습니다.


마치 ‘곽씨’라는 성이 성곽을 의미하는 것처럼 봉사 심학규의 인생에 부는 풍파를 막아주고 울타리가 되어 준 사람이 부인 곽씨였습니다. 이름도 없이 그저 곽씨로 호칭된 부인이 그토록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즈음 심봉사가 부인에게 마음이 원통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가 원통한 이유는 자식이 없어 조상 볼 면목이 없고, 자기들 제사상이 걱정이라서 원통하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장애 자식일망정 남녀 간 낳아보면 평생 한을 풀 듯하니 어찌하면 좋을는지 명산대천에 치성이나 드려보오”라고 권합니다.


시대가 오늘 날과 다르니 한편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자신은 봉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침술이라도 배워 고생하는 부인을 덜어줄 생각은 않고, 되려 ‘명산대천에 치성을 드리라’고 합니다.정한수 한 사발 떠다 놓고 비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품을 팔아 재물을 바치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고생만 죽으라고 하는 마흔 넘은 부인이 당시로는 엄청난 노산에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남편이라는 사람이 자기 생각만 합니다.



2) 부인 곽씨과 딸

심봉사의 말에 부인 곽씨는 몸을 팔고 뼈를 갈아서라도 그 뜻을 따르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더더욱 품을 팔아 모은 재물로 온갖 정성을 다 들입니다. 가난한 살림에 자식 하나 얻겠다고 부인을 더 사지 속으로 내 몬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인의 정성에 하늘이 감동했는지 곽씨 부인이 임신했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산후의 병고로 세상을 뜹니다. 온갖 품팔이로 골병이 들었고, 치성을 드린다고 더욱 고생을 한데다 노산이었으니 몸이 성할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기가 막힌 것은 숨이 넘어가는 부인 앞에서 심봉사가 하는 말입니다.


“여보, 마누라, 만일 불행히 죽게 되면 눈 어둔 이놈 팔자 일가친척도 없는 혈혈단신 이내 몸이 올 데 갈 데 없어지니 그도 또한 원통한데 강보에 쌓인 여식을 어찌하란 말이오?”


고생고생하다 죽어가는 부인 앞에서 부인의 원통함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 운명이 비참해질 것을 가장 원통해 합니다. 그 다음엔 딸 키울 걱정입니다. 마흔이 넘어 낳은 자식 젖 한 번도 못 먹이고 죽어가는 아내를 향한 안타까움과 비통함은 전혀 없습니다. 부인은 철저히 자기 희생적인데, 남편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부인은 죽어가면서도 남아있을 남편과 갓난 딸을 위해 빌려 준 돈과 농 안에 든 의복, 그리고 젖동냥할 곳을 다 이야기해 주고, 딸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주고 눈을 감습니다. 탁하고 어두운 세상에 맑은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로 살라는 의미에서 ‘맑은 청(淸)자를 써서 심청이라고 지었습니다. 자식 이름의 작명은 부계 관습이었음에도 어머니가 지었다는 것은 심청이가 어머니 곽씨의 정신적 혈통을 이어받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통회

곽씨 부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애통한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를 치뤘습니다. 또한 인심 좋은 아낙들의 도움으로 갓난 청이는 동냥젖을 먹으며 잔병 없이 잘 자랐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꼭 닮아서인지 심청이도 삯바느질로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며 살아갑니다. 제 일신의 편안을 위해 선택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봉양을 선택합니다.


이런 와중에 물에 빠졌다 건짐을 받은 심봉사가 몽운사 화주승의 눈을 뜰 수 있다는 설명에 덥썩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겠다고 약속해 버립니다. 사람 참 안변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도록 고생하던 부인에게도 자식을 낳기 위해 더 고생하도록 떠 밀던 남편이었는데, 15살 여린 딸이 손에 물기 마를 세없이 고생하는데도 자기 눈 뜨겠다고 딸을 더 사지 속으로 내 모는 비정한 아비입니다.


이후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심청은 공양미 삼백 석에 자기를 팔아 인당수에 인신공양 됩니다. 나중에야 사태파악을 한 심봉사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에구 이게 웬 말이냐. 네가 살고 내 눈 뜨면 그는 응당 좋으려니와 네가 죽고 내 눈 드면 그게 무슨 말이 되랴. 눈을 팔아 너를 살지언정 너를 팔아 눈을 산들 그 눈 해서 무엇 하랴. 장사도 좋거니와 사람 사다 제사하는 걸 어디서 보았느냐?… 쌀도 싫고 돈도 싫고 눈 뜨기 내 다 싫다.”


지금까지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아왔던 심봉사,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가 딸의 죽음이 임박한 자리에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뭐가 우선이고, 뭐가 중한지를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뱃길을 떠나는 상인들이 장사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왔습니다. 돈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도 주저치 않고 죽이던 인신공양의 사회악을 고발한 겁니다. 더불어 심봉사의 이 질타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부인에 이어 딸까지도 희생으로 내몰았던 자기 삶에 대한 처절한 통회였습니다.


3. 심청전의 메시지


심청전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정리하자면, 다른 시각으로 보았던 심청전은 우리에게 다음의 몇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심봉사와 상인들을 비롯해 나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주저치 않는 강요된 희생 문화를 고발합니다.

: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된 것은 공양미 삼백 석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심청이가 그것을 믿었다면 왕비가 된 이후 눈뜬 아버지를 수소문 해서 찾았지, 시각장애인들 중에 찾으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심청전의 메시지는 희생의 악순환이 멈춘 현실에 눈뜨라고 합니다. 더이상 나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피라미드 구조에서 벗어나라는 메시지입니다.


둘째, 자기 절에 영험이 있다고 자랑하던 몽운사의 화주승을 통해 석가모니의 자비를 모독하던 타락한 종교권력을 고발합니다.

: 종교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제도이자 힘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힘을 통해 사람을 통제하고, 사적이익을 구하는 한 종교는 종교됨을 상실한 사이비요, 주술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육신의 눈이 아닌 맘의 눈을 뜨고 살라고 합니다.

: 심청이가 빠진 인당수(印塘水)는 ‘도장 인, 연못 당, 물 수’로서 두 눈썹 사이의 인당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두 미간 사이에 찡그려지는 부분처럼 물살이 급하게 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인당이라는 혈 자리가 제3의 눈, 마음의 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알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격랑을 만나고, 생사의 기로를 통과하면서 마음의 눈을 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육신의 두 눈을 넘어서는 제 3의 눈 ‘마음의 눈’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라는 메시지입니다.


4.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심청전에 견주어 보자면, 예수님에게 있어 십자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인당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로부터 위임받은 권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주님을 또 다른 인당수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국가의 장래와 사회의 안정을 위한 결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안정을 수호하는 비열한 이익집단이요, 타락한 집단지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고 호통치던 가야바는 표면상 거룩한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를 모독하던 타락한 종교권력이요, 사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부패종교인이요, 맘몬교 교주일 따름이었습니다.


모두가 힘든 시대였습니다. 바벨론에 망했던 나라가 다시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이후 알렉산드의 헬라제국의 통치, 그런가 했더니 또 다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식민국가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쉬웠겠습니까? 만만하고 녹녹한 일 하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힘들다고 모두 고개를 숙여 땅을 쳐다보며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격랑의 인당수, 십자가 앞에서 영의 눈을 열어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두 미간 사이의 마음의 눈으로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이어 가셨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이 기도는 오늘 본문 속에서 볼 때, 한 마디로 축약해 보자면, ‘내게 주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 - 9절 사이에 ‘내게 주신’이라는 말씀은 무려 5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내게 주신’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3가지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위 3가지는 모두 첫 번째인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을 향하고 그 안에서 집약됩니다. 주님은 당신이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임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신 것들을 사용하셨고,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그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도록 독려하고 격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땅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지는 아주 명료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겁니다. 내게 주신 것들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누고 전함으로써 그분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도록 하는 생명의 전달자로 사는 겁니다.


5. 인당수와 십자가


평생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온 심봉사는 인당수에 빠져 죽은 줄만 알았던 심청의 목소리를 듣고 생애 처음으로 눈을 떴습니다. 단순히 ‘효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전래동화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심청전의 표면 아래엔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더러 마음의 눈을 뜨고 살라는 메시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을 위해 당신께 주신 모든 것들을 사용하셨다는 주님의 기도는 그와는 반대로 살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자신만의 안위와 협소한 가족주의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제발 눈을 뜨고 주변의 사람들을 돌보며 챙기며 살아가라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우리 사회엔 공익과 정의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은 위선의 탈을 쓰고 힘 없고, 가지지 못한 이들을 억압하며, 죽음의 인당수로 내모는 비열한 문화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어느 대학 총장은 ‘교육자의 양심’을 들먹이며 정의를 외쳤지만, 실은 누군가를 음해하고 죽이려는 의도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뭐든 하는 비열하고도 저급한 양아치 문화의 발로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학사, 석사, 박사 학위 전체가 허위일 뿐 아니라, 25년 총장생활과 인생 자체가 거짓이었던 사람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목소리를 높여 소리지르는 많은 이들이 자기 모순, 자기 이익을 숨긴 채 선동질하고 있습니다. 한동대학교 손화철 교수는 경북일보에 실은 칼럼 가운데 지금의 세태에 분노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왜 학벌주의는 용인하고 입시제도의 공평만 요구하는지, 왜 높은 임대료에는 눈감고 최저임금에는 눈을 부릅뜨는지, 왜 재벌은 선처가 필요하고 노동자는 엄벌이 필요한지, 왜 장관후보자에겐 그렇게 가혹하고 국회의원에겐 그렇게 관대한지, 왜 학자는 표절로 망하는데 기자는 가짜뉴스로 승승장구하는지.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을 외치고, 공평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이중적이고, 선별적 정의에 젖어 있는지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 자기이익의 시대를 사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타인의 눈 속의 티클을 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이런 세태입니다. 주님은 이런 시대 속에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던 인당수에 생명의 연꽃이 피어오르는 세상을 만들라고 촉구하십니다. 겉으로는 멀쩡히 눈뜨고 본다고 하지만, 정작 인당에 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이들이 없는지를 마음의 눈을 열어 살피라 하십니다. 세월의 격랑 속에 가라 앉아 죽은 줄만 알았던 희망과 미래가 다시 살아나 세상을 다시 꿈꾸게 하는 인당의 사람, 십자가의 사람으로 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귀한 줄 알고,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나누며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며 전하며 살라 하십니다.


지난 여름수련회 때도 통독한 바 있는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쓴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입니다. 그 내용은 ‘복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인데, 2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이론 부분인 1장 - 11장과 실천 부분인 12장 - 16장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논문과 같이 치밀하게 설명하는 로마서의 가장 마지막은 놀랍게도 그 복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게 하신 26명의 이름들을 열거하며 문안하는 것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함입니까? 복음이라는 것은 관련 성경 몇 구절 암송하고 유창하게 정의를 말하는 그런 류가 아니라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복음을 산다는 것과 동일시 되는 것이며, 복음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사람들 속에서 그분들과 함께 일구어가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지나온 우리 삶을 보고드려야 할 때가 올 겁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고 맡기신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세세히 아뢰어야 할 겁니다. 어떻게 보고 준비는 잘 해 오셨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제라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람들과 더불어 어떻게 복음을 살아가시렵니까? 자기 이익이 최고선이요, 핵심가치인 이 세태 속에서 내게 주신 것들을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나누며 살아 가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고 맡겨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 더 큰 노동으로 내 몰았고, 우리의 욕망을 위해 인당수를 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관계의 기준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정으로 대했고, 비인격적으로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정의로운 척, 선한 척하지만, 우리 중심엔 내 것을 빼앗기지 않고, 남의 몫까지도 더 가지려는 자기 욕망, 이익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위선의 가면을 벗게 하옵소서. 우리 눈 속의 들보를 보며 울게 하시고, 남의 티끌에 분노하던 자신 앞에 정직하게 하옵소서. 부인을 죽음으로 내몰고, 자식마저 인당수로 떠밀던 비정한 남편이요, 아비로 이 시대를 살지 않게 하옵소서. 찌푸린 인당 사이의 눈을 열어 세상을 보고, 사람을 살필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언젠가 우리를 부르시는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맡기신 사람들과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고, 전했는지 즐겁게 아뢰는 보고의 날 맞이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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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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