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9.08 움오름 주일 설교 - "영생은 곧"(요 17:1-5)

2019년 9월 10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1~5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설교문

1. 물 위를 걷고, 하늘을 나는 사람


인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19세기 인도의 정신적 지도자 라마크리슈나 아래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내달려왔습니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선생님! 제가 드디어 물위를 걸어 갠지스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물었습니다.

“그래, 몇 년이나 수련을 해서 그렇게 되었지?”

“20년 동안 날마다 연습해서 이뤄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다시 물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그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현재 환율로 333원)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도의 경지에 다다른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게”


어떤 사람이 물 위를 걸어 강을 건너고, 새들처럼 하늘을 날아다니기 위해 평생을 수행한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요? 마블 히어로, 초능력자일까요? … 아닙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을 엉뚱한 일에 허비한 사람이라 불리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릅니다. 그는 어쩌면, “자기가 할 일은 포기하고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기분 낸다”는 ‘자포자기’의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일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우리가 강을 걸어서 건너고, 하늘을 날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허락하신 일상 속에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일상의 일이 하늘의 빛을 머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셨던 이유입니다. 요 17:4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2. 영생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라고 주시는 일’을 간단한 말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식주만을 위해서 직장생활을 합니다(이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밥벌이’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그 속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일을 따라 온 생을 던져 일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소명을 따라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맹자(孟子) 고자하(告子下)편은 하늘의 소명을 감당해 갈 사람이 감내해야 하는 고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天將降大任瘀是人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餓基體膚 空乏基身行拂亂基所爲 是故動心忍性 增益基所不能 (천장강대임어시인, 필선고기심지, 노기근골, 공핍기신, 행불란기소위, 시고동심인성, 증익기소불능)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먼저 그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도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니, 이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일도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하라고 주신 소명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요 17:2은 이를 ‘영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잃은 이래 인류에게 사라진 영생을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다시 주고 싶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주셔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형제의 찬반여부를 떠나 극악한 살인마에게 사회와 격리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생명과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인간됨을 더 망치게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인간됨을 침해하고 망가뜨리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고, 되려 옛습성을 그대로 간직하는 한 참 생명은 인간에게 이식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법칙과 세계 속에서 해결하셔야 하는 고되고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까지 걸고 이루어 가셔야 했습니다. 그 다음 성령께서 오셔서 사람의 마음을 준비시키셔서 이 복음을 받아들여 생명에 이르도록 견인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원어를 보니, 보통 생명이라고 할 때의 자연적인 생명, 물리적인 생명을 말하는 βίος(비오스)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영적인 생명을 말하는 ζωή(조에)가 사용되었습니다. ζωή(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입니다.


βίος(비오스)는 자연개체의 생명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ζωή(조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계속해서 지속된다는 시간적 측면과 더불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질적 측면이 동시에 포함된 생명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결국 그 원천이신 주님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체험한 사도 요한은 계 3:20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3. 영생이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일찌기 영접을 통해 우리 신분이 어떻게 바뀌는 지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요 1:12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을 통해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바뀐다는 것은 자연적 생명의 존재 βίος(비오스)의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영적이고 관계적인 생명의 존재 ζωή(조에)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요 17:3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생명을 지닌 βίος(비오스)의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 ζωή(조에)의 사람이 되는 길을 ‘앎’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앎’이라는 단어 γινώσκω(기노스코)라는 동사는 56번 사용했습니다. 반면, γνωσις(그노시스)라는 명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지식’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 γνωσις(그노시스)는 신비한 세계로 들어갈 때 경험하는 직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초기 이단이었던 영지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사도요한은 영생에 이르는 길을 ‘앎’이라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그 앎은 영적직관을 의미하는 γνωσις(그노시스)가 아니라, 경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하는 γινώσκω(기노스코)라는 겁니다. 당시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고 하는 신비한 지식, 영지주의적 구원 지식을 철저히 배격했던 겁니다.


우리말 성경에 영생으로 번역된 영적이고 관계적인 생명 ζωή(조에)는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관계적이고, 경험적인 앎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에는 구약성경 속에서 말하는 앎의 개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것은 앎의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에 바탕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와같은 앎을 신앙과 연결시킨 겁니다. 생명의 열쇠는 무수한 사건이나 일들이나 현상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 열쇠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귐이며, 누림입니다.


4. 에피소드


2주전 양재역에서 걸어 교회로 오다 구두 뒷굽을 갈기 위해 길 가의 구두박스로 들어갔습니다. 60대 중후반의 부부가 아주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기존의 닳은 굽을 떼어내고 새로운 굽을 붙이려다 보니 본드를 칠하고 마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분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니, 어떻게 그리 흥겹게 일을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분이 주저치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있는데, 기쁘게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냐는 제 질문에 부인이 제게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라며 소개책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단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제가 빙그레 웃으며 책자 속의 한복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이 분은 요즘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교주 장길자였습니다.


그분들은 자기들의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을 안다는 생각에 환한 웃음과 더불어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 여쭤보고 싶은데, 복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분들이 신나하며 “복음이란? 복된 소식, good news”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건 복음이라는 단어를 풀이한 말이고요, 그것 말고,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 좀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랬더니 선반 위의 성경을 꺼내더니 성경보고 가르쳐 주겠다고 하길래, 제가 성경보지 마시고 그냥 알고 계시는데로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암송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이야기하며 설명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그분들이 암송하는 구절들의 앞뒤 구절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한 구절도 중요하지만, 그 뜻을 더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전후 문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본래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분들이 제게 일반교회 사람은 아닌 것 같고, 혹시 신천지냐고 물었습니다(저 신천지란 소린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분들과 성경을 찾아가며 설명과 반론을 거듭했습니다. 드디어 남편분이 제 구두 손질하는 것을 멈추고 얼굴이 상기된 표정과 억양으로 자신이 아는 것들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엔 교수들도 자기에겐 다들 못당한다며 당당하게 이야기하던 분이 제가 원한다면 자기보다 더 고수를 만나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오후 1:30에 누가 찾아오시기로 했는데, 시간이 5분 밖에 남지 않은 것을 발견하곤 서둘러 인사하고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가면서 참 안타까운 생각, 안되었다는 연민이 떠올랐습니다. 장로교, 성결교, 카톨릭 등 수많은 교회를 젊은 시절 찾아다녔지만, 복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교회에서 진짜 복음을 만났다며 기뻐하시는 그분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떠나오기 전 그분들께 제가 설명드렸던 영생이란 부분이 오늘 본문인 요 17:3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분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1981년 남편이 있던 상태에서 안상홍을 만나 결혼했던 장길자를 하나님의 신부요, 어머니 하나님으로 어찌 섬길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일하고, 그렇게 번돈으로 열심히, 또 많이 헌금해서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한다고 자랑하시던 그들 부부의 간증아닌 간증이 서글펐습니다. 무엇보다도 잘못된 교리와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해서 사익을 탐하는 이단들의 행태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올바른 앎에 바탕해서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은 지식으로만 저장하는 앎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오랫동안 친밀하게 교제한 결과로서 깊이 그분을 이해하면서 경험하는 앎을 뜻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경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말씀을 듣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나고, 교제하기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로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렘29:13입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온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 외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또 다른 방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당연 성령님의 조명과 깨닫게 하심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친밀하게 경험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치열함이 배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온 맘으로 찾는다면 만나주시겠다는 하나님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만나고 있습니까? 비록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함께 예배드리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각종 매체를 통해 얼마나 탁월한 설교자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우리의 앎은 머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진정 그 깨달음이 가슴에 내려와 아버지의 뜻대로 이 땅에서 그 말씀을 구현해 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많은 문제의 원인이 다양할 수 있겠지만, 그 근본엔 누구도 부인치 못할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와 성공과 행복과 건강에는 관심이 탁월하지만,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데는 우린 너무 무관심했지 않습니까? 그 결과 영혼의 바스락거림을 안고 차가운 영혼으로 무기력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핍박을 벗어난 우리 시대의 비극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형식만 존재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관계로 알아가는 것, γινώσκω(기노스코)해 가는 겁니다.


2019년 가을의 시작 이 문턱에서 움오름의 가족님들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알아가시렵니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드리고 친분을 나눠 가시렵니까? 이 맘때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김현승 시인의 시 <가을의 기도>로 마무리 하려 합니다.


< 가을의 기도 >

-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태풍의 거친 손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도 결실의 계절은 오고 있습니다. 생채기 난 가지와 이리저리 찢겨있는 잎들을 돌아보며,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는 농부의 맘으로 이 가을엔 무너진 우리 신앙의 기본과 기초를 새로이 세워가는 계절되게 하옵소서.


가족과 주변의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되, 무엇보다도 기꺼이 만나주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기도의 계절되게 하옵소서. 이 가을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던 우리 교만이 사라질 뿐 아니라,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경청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선지자 호세아의 외침처럼 힘써 여호와를 알아가게(호 6:3) 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참 생명이 넘쳐나게 하시고, 영생을 누리고 흘러가게 하는 생명의 부양자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이번 주간에 있는 추석명절기간에 하나님을 경험으로, 관계로 아는 사람의 여유와 관대함으로 함께 하는 가족과 친지들을 대하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윤성천 집사 봉헌기도>


성령하나님의 은혜로 이시간에 신앙의 기초를 다시 세우고 기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머리에만 머물러 있고 가끔식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고 기도를 통해 온마음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당연한 의무는 다하지 않은채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뚝 떨어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껍데기만 있고 속은 비어 있는 허무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온몸으로 느끼고 관계로 알아가는 기노스코의 삶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위로하면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생각하며 주님 앞에 한번이라도 더 엎드려 주님의 뜻을 찾고 따르고 싶습니다.


영원한 영적 생명에 소망을 갖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당당하게 감당해서 주님이 뜻하시는 세상을 만드는 데 쓰임받는 우리 움오름 가족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 권능으로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을 책임져 주실 것으로 믿고 의지하며 우리들의 정성을 담은 예물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드리는 마음을 축복하여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받게 하옶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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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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