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9.01 움오름 주일 설교 -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 17:1-5)

2019년 9월 3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1~5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설교문

1.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요즘 길을 가다 보면 한껏 연분홍 빛 꽃을 드리운 나무를 보곤 합니다. 일명 ‘배롱나무’라고 불리는 목 백일홍입니다. 연분홍 빛 꽃 뿐 아니라, 라일락꽃을 닮은 보라빛 꽃에다 흰색 꽃까지 다양하게 있는 꽃나무입니다. 워낙 꽃이란 열흘을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란 말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일홍’이라는 꽃은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꽃이 100일을 간다한들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만약 1년 365일 내내 붉은빛을 드리운 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생화가 아니고, 조화일 수 밖에 없습니다.


꽃이 10일을 넘지 않는다는 花無十日紅은 예부터 다음과 같은 문구들과 함께 인용되었습니다.


人無十日好(인무십일호) 사람의 좋은일은 10일을 넘지 못화고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꽃의 붉음도 10일을 넘지 못하는데

月滿卽虧(월만즉휴) 달도 차면 기우나니

權不十年(권불십년) 권력도 10년을 넘지 못하느니라


10일 이상 붉은 꽃 없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권력도 10년을 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선택은 크게 두 가지 형태를 보입니다. 하나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부르며 놀자주의를 지향합니다. 살갗 땡땡하고 뺨에 핏기 곱게 돌 때 놀아도 재미있지 나중에 무릎뼈 시릴 때 해외여행이다 효도관광이다 돌아다녀봤자 즐거움이 없다는 겁니다. 허무주의와 맞닿은 낙천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 權不十年(권불십년)임에도 불구하고 부나방처럼 권력의 불로 날아드는 경우입니다. 지극히도 세속실리주의, 세속영광추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멀리 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바로 직전 2명의 대통령이 권력의 최정점에서 천하를 호령하며 온갖 영광을 누리다 영어의 몸이 되어 판결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花無十日紅(화무십일홍)이라는 세상 앞에서 이처럼 사람들은 양분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가치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태를 취하며 살아야 할까요? B.C 700년경 유대왕국은 점점 쇄락해 갔습니다. 제국 앗시리아 막강한 힘이 짓눌러 왔습니다. 이어 곧 신흥 바벨론제국이 뻗어올 겁니다. 이런 상황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외치라 하셨습니다. 허무주의와 결합한 낙천주의, 그리고 세속실리주의로 양분된 사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라 하셨습니다. 사 40:6-7입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이 땅의 모든 육체가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들의 꽃과 같답니다. 한껏 아름답다가도 순간 아라비야 사막으로부터 동풍이 불면 금새 누렇게 시들어 버리는 풀처럼 하나님의 기운이 인간 위를 덮고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사도 베드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벧전 1:24-25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는 이사야 선지자가 전했던 ‘아름다움’이란 말을 ‘모든 영광’이라는 말로 해석하면서 풀과 같고, 꽃과 같이 곧 스러질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세세토록 존속될 그것을 위해 살라고 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고,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것을 위해 살아가는 이의 눈엔 일시적으로 화려한 영광에 결코 현혹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 때가 이르렀사오니


2000년전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늘날 평균수명의 1/2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삶은 이 땅을 거쳐간 그 어떤 인간보다도 더 뛰어나고 아름다운(영광)스런 삶을 사셨습니다. 풀과 같은 유한한 삶 속에서도 어떻게 영원한 삶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의 모습과 태도가 예수님을 그리 만들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비결을 들려줍니다. 요 17:1입니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때가 이르렀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뜻합니다. 죽음의 경계에 다다른 분들이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외로 그것이 먹고 싶은 음식이기도 하고, 가고 싶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2007년에 개봉했던 영화의 제목처럼 어떤 이들은 그 일들을 적은 버킷리스트(Bucket list)를 만들어 죽기 전에 이루어 가기도 합니다.


그럼, 죽음이 임박한 순간까지 주님은 무엇을 구하며, 무엇을 추구하며 사셨습니까? 1절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하나님께 영광)을 구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습니다. 그것은 한시적으로 있다 곧 사라질 이 땅의 영광과는 다른 영원한 하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이 땅을 거쳐간 무수한 사람들과 주님을 다르게 기억토록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생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세분한다면, 왜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나아가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할까요? 이 세 가지 부분을 본문에 맞춰 살펴보겠습니다.


3. 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나?


먼저, 주님께서 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는지는 앞서 살펴본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들을 영화(영광)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얻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이유입니다.


1643년 7월에 신학자 121명과 상당한 성경실력을 갖춘 그리스도인 학자들 30명등 모두 151명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영국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약 5년여에 걸쳐 그 위원회가 완성한 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청교도적 개혁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전문 33장으로 되어 있는 이 신앙고백서는 장로교의 기본교리로 채택되었으며, 장로교회의 직분자들에게 성경적 교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맨 첫번째 장, 첫번째 질문(1-1)과 대답은 이렇게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입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권력과 영광의 정점을 추구하는 삶은 아무리 애쓴다 한들 하나님을 수단화하는 삶이지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을 빌리고자 하는 삶이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영광의 빛 속에서 만나는 그 희열을 맛보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느낌, 그 감격을 한 번이라도 맛보고 언젠가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 하나님 앞에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생을 소처럼 일하고 악착같이 살아내도 그 모든 것이 나의 생명과 함께 사라질 내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너무 허무하고 부끄럽게 하나님 앞에 서지 않겠습니까?


4.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연말 시상식이나, 어떤 경기에서 승리한 이후 소감을 묻는 말에 자주 이렇게 말하는 경우를 들으셨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 그렇게 소감을 말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답은 4절 속에 기록된 주님의 기도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요 17:4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주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라고 명하신 바로 그 일을 이루신 겁니다. 그 일이란? 당신의 죽음으로 이루신 십자가와 구원입니다. 인류 속에 오랫동안 숙명처럼 전해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몰아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것, 바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요 17:3과 관련하여 다음 주일에 상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껏 지켜봐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열망을 가집니다. 그리곤 주의 일을 하겠다며 신학교에 가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주의 일, 하나님의 일은 신학교에 가서 목회하는 것입니까?


17세기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화가는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입니다. 그는 주로 수도원의 요구로 종교화를 그렸지만, 때론 세비야의 거리풍경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장엄하고도 높은 영적 세계에 관심이 있었지만, 일상에서 빛을 발견하는 일 또한 즐긴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 중에 영적 생활과 일상생활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마치 답이라도 하는듯한 그림이 있습니다. 1646년에 완성한 ‘천사들의 부엌’(Angels’ Kitchen, 180x450cm, Louvre Museum)이라는 작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평론가들은 무리요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세비야 인근에 있던 수도원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San Francisco el Grande)에서 30년을 하급 수사로 일했던 페레스의 일화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페레스는 하나님을 섬기고자(주의 일을 하고자) 수도원에 들어갔지만 라틴어, 그리스어, 스콜라신학 등의 수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주로 부엌 일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기도 생활에 열중했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데 머물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가 기도에 몰입하던 중 그만 식사 준비하는 것을 잊었습니다. 뒤늦게 깨닫고 허겁지겁 부엌으로 달려갔는데, 천사들이 이미 식사를 다 준비해 놓았음을 보았습니다. 무리요의 그림은 바로 페레스의 이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화폭의 한복판에는 크고 화려한 날개를 단 두 천사가 서 있습니다. 한 천사의 손에는 물 항아리가 들려 있고 다른 천사는 빵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좌측에는 부엌에 들어서고 있는 두 명의 귀족과 상급 수사 한 명이 보입니다. 그들은 뜻밖의 광경에 놀란 듯합니다. 그들 앞엔 단정하게 무릎을 꿇은 채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 한 수사가 있습니다. 페레스입니다. 금빛 아우라에 감싸여 있는 그는 공중에 떠 있습니다. 비록 후광은 없지만 깊은 영적 희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화면 우측에서 부엌일에 열중하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입니다. 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점은 그들의 어깨에 다 날개가 돋아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들입니다.


무리요는 이 그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소위 성과 속, 거룩한 것과 세속의 경계를 짓는 일이 적절한지를 묻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거룩한 일이지만 밥을 짓는 일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앙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거룩함이란 특정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접속된 모든 일상의 삶과 행위를 통해 나타납니다.


하늘과 접속된 주님의 십자가, 그 일상과 삶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듯이, 다시 말해, 주님의 일상과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자가에 맞춰졌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도 먼 곳에, 특별한 어떤 일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일터와 가정에서 구현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치 30년 동안 수도원 부엌에서 상을 차리던 하급 수도사가 경험한 것처럼 지극히도 사소한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체험하며, 소통하며 살아가는 바로 그 삶입니다.


성과 속은 결코 갈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으면 지극히도 세속적인 일 속에서도 우리는 가장 성스러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초점이 우리 개인의 욕망에 맞춰있다면, 가장 성스러운 일에 종사하면서도 가장 세속적인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님의 기도와 무리요의 그림 속에서 확인합니다.


5. 언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하나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야 할까요? 요 17:5은 다음과 같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그 영광을 누려왔던 분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후에도 주님은 줄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앞둔 시점에서 주님은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에게는 그 이전의 삶도 중요했지만,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의 삶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저는 우리나라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교회의 규모를 모두 경험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매주 출석교인 100명, 200명대 부터 4천명, 2만 5천명, 7천명, 그리고 개척교회까지 하고 있으니 골고루 경험한 셈입니다.


그런데, 그 중 교회가 오래된 교회일수록 몇 대째 신앙생활을 해오는 가족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엔 여전히 아름답게 신앙생활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과거의 영광에 젖고, 옛일을 추억하는 이야기를 자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지켜보며 마음에 새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점과 점이 이어져 오늘의 선에 이르렀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어떤 점을 찍고 있느냐는 사실입니다. 그 한 점, 한 점에 의해 앞으로의 우리 생의 선이 그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6. 일상의 자리, 지금이라는 시간에서


파라오의 궁전을 나온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이집트의 왕자였다가 순식간에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는 처가살이 양치기로 전락했습니다. 비참할 수도, 허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매일같이 반복하던 일터의 한켠에서 성실함을 살아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일터 시내산 자락 불타는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권을 가로챘던 야곱은 도망자가 되어 야반도주하던 사기꾼이었습니다. 노상에서 곤한 몸을 돌에 의지해 잠을 자던 중 그는 하늘에 닿은 사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베고 누웠던 그 돌 위에 기름을 부으며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삶을 달라지게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선지자였던 이사야는 매일같이 드리던 성전제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현현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높은 보좌위로부터 성전까지 흘러내린 성스러운 광경, 하나님을 보는 스랍들조차 거룩하신 여호와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모습,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어찌나 크고 웅장한지 문지방이 흔들리고, 연기가 자욱해졌던 모습, 음향과 영상이 한데 어우러진 입체적인 장면, 이것은 신앙인이라면 꿈에서라도 꼭 한번 가져보고 싶은 부러운 체험이었습니다(이사야서 6:1-8). 반복되는 일상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그 일이 그와 민족 나아가 인류의 삶이 오시는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으로 채워지게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경외함을 품는 사람의 만남의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졌음을 확인합니다. 종교적 행위가 경건생활을 위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 속에 경건이 스며들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은 위선이 되거나 교만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상이란 어제의 영광 위에 세우진 훈장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세워가는 일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선 하늘의 빛을 머금은 우리 일상을 경건의 통로가 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주실 겁니다. 그때 우리의 평범한 삶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의 삶으로 기록될 겁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일상의 자리가 하늘 빛을 끌어들임으로써 경건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출근하고, 등교하고, 일을 하는 일상이 거룩이 되게 하옵소서. 청소하고, 밥 짓고, 땀 흘리는 모든 행위 뿐 아니라, 즐겁게 노는 일마저도 거룩함과 잇닿은 일상되게 하옵소서. 그러기에 평범한 일상을 아끼게 하시고, 귀히 여길 수 있게 하옵소서. 30년 동안이나 수도원 부엌에서 밥을 지었던 하급 수도사의 깊은 삶의 신비가 반복되는 우리 일상 속에서도 재현되게 하셔서 우리 일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주요한 통로되게 하옵소서.


지나간 옛일의 영광을 노래하는 화석화된 신앙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교제해 감으로써 지금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가는 믿음의 사람들 되게 하옵소서.


일상과 지금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우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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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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