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8.25 움오름 주일 설교 - "에크제테오"(히 11:5-6)

2019년 8월 28일 업데이트됨













히브리서 11:5~6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설교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는 별칭을 갖고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사람들의 실제적인 모습을 예로 들면서 믿음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에녹의 믿음에 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며, 그가 하늘로 옮겨지기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기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부부간에 또는 부모와 자녀 간에, 가까운 이들 간에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무엇을 할까, 무엇을 줄까 고민 합니다. 저는 등산을 좋아합니다. 잘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저 좋아만 합니다. 제가 등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등산용품을 파는 곳을 지나치게 되면 무엇에 홀린 듯 발걸음이 자동적으로 그 앞에서 멈춰집니다. 그리고는 이 것 저 것 뒤적거립니다. 비록 돈이 없어 고가의 등산용품 앞에서는 만져보기만 하지만 그것마저도 참 행복합니다. 저는 등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꼭 제 주변의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편안하고 멋있어 보이는 등산복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3인 아들 녀석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지리산 종주를 시도하였습니다. 첫 번째 시도 때에 산 위에서 태풍을 만나 실패하였고, 이듬해에 아들이 좋아하는 온갖 것으로 유혹하여 기어이 종주코스를 완주하였습니다. 저는 등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항상 등산용품점을 지날 때면 등산복을 뒤적여 보다가 아들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아들을 위한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옷을 발견하면 사주고 싶은 생각에 행복합니다. 이쯤 되면... 저는 정말 훌륭한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있습니다. 그 치명적인 문제가 무엇인가하면, 아들은 옷 중에서 등산복을 싫어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위해 등산복을 사기라도 하는 날이면 늘 핀잔을 듣고 멸시를 당했습니다. 제게 돌아오는 온갖 혐오와 핀잔 그리고 질타가 어떠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사랑한다고 하는 대상에 대해 그들이 무엇을 진정으로 기뻐하는지를 모를 때가 참 많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에 대해서도 꼭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에녹에 대해 평가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에녹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잘 알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5장에 등장하는 아담의 족보에 의하면 에녹은 아담의 7대손입니다. 아담은 아들 가인이 떠나간 뒤에 130세에 아들 ‘셋’을 낳습니다. 그리고 ‘셋’은 ‘에노스’를 낳고, ‘에노스’는 ‘게난’을 낳고, ‘게난’은 ‘말할랄렐’을 낳고,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고, ‘야렛’이 ‘에녹’을 낳습니다. 에녹 이후의 계보를 보면, ‘에녹’은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습니다.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는데, 그가 187세 때에 ‘라멕’을 낳습니다. 그리고 ‘라멕’은 ‘노아’를 낳습니다. 또한 에녹이 아담의 7대손이라는 언급은 신약성경 유다서에도 등장합니다.(유1:14)


성경속의 족보에는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의미보다는 그것을 기록한 이들의 신학적 언급이 더 심층적 의미를 이룬다는 성서학적인 고찰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면 성서의 족보를 그대로 따라가는 자체도 성서를 기록한 저자의 그러한 신학적 의미들을 포함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말씀의 의도를 파악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에녹에 대한 사람들의 인지도가 큰 것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성경에는 아주 작은 분량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녹에 대한 주된 구절은 창5:21-24, 히11:5절 그리고 유다서 1:14-15절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무관합니다. 에녹은 성경 인물들 중 모세나 다윗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크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자녀를 낳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녹’이 우리의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에녹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창세기 5장 21절에서 24절을 찾아보겠습니다.


“(21)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365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시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는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즉 에녹의 삶에는 전환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환점은 아들 ‘므두셀라’를 낳는 사건이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365세에 하나님은 그를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던 것은 그가 65세 때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난 것과 중대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의 탄생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어떻게 관련지어 짐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과, 창세기 5장의 연대기 속에서 그 단서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에 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먼저, ‘므두셀라’라는 이름은 ‘죽다’는 뜻의 ‘무트’와 ‘보내다’는 뜻의 ‘샬라흐’의 합성어로 ‘그가 죽으면 그것(종말)이 오리라’고 해석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죽는 그날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창세기 5장의 아담의 연대기를 그대로 따라가면, ‘므두셀라’가 죽는 해에 노아의 홍수가 일어납니다. ‘므두셀라’는 969세에 죽습니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그리고 ‘라멕’은 182세 즉 아버지 ‘므두셀라’가 369세 때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는 해에 일어납니다(창7:10-11). 따라서 ‘므두셀라’가 죽은 해는 ‘노아’가 600세 되는 해입니다. ‘그 날’ 즉 ‘므두셀라’가 죽는 해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므두셀라’의 뜻 속에는 성인 남자를 가르키는 ‘마트’라는 단어와 병기나 칼로 번역되는 ‘쉘라흐’가 결합하여 ‘창던지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해석을 따른다면, 성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고대 사회에서 ‘창던지는 자’는 그 성의 안전을 최후로 보장해 주는 존재였습니다. 적이 쳐들어 왔을 때, 훌륭한 창던지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곧 함부로 그 공격할 수 없음을 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최후의 보루가 죽었다는 것은 곧 그 성은 적에게 함락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창던지는 자의 죽음은 곧 그 성의 멸망을 뜻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을 따른다면 즉,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 속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었던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에게 ‘므두셀라’의 출생을 통하여 세상의 심판을 말씀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렇게 에녹은 65세가 되던 해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그 사건은 그를 하나님 앞에 세우게 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해석에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해석의 모든 과정이 신학적 기록과 해석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생각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읽기에 대한 논의인데 ‘역사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라는 성경해성의 오랜 논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에녹에게 세상의 종말을 예언해 주셨다는 이 사실은 단순히 ‘므두셀라’라는 이름에서만 유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에녹이 그러한 종말의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유다서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에녹의 예언이 등장합니다.


“아담의 7대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6)


아담의 10대손인 노아의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온 세상에 멸망을 당했다면 에녹시대에도 죄가 만연했고 불경건한 자들의 불경건한 삶이 일반화되었을 것입니다. 불경건이 편만했던 타락한 어두움의 시대에 에녹은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있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가게 한 에녹의 하나님과의 ‘동행’은 어떠한 내용이었을까요?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답변들이 있을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는 그것을 그의 ‘믿음’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며...”


신약성경 히브리서는 에녹이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며,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다고 합니다. 즉,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삶’은 그의 ‘믿음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그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6절은 그 ‘믿음’을 이렇게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 두 번째로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먼저는,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현존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눈으로는 감각되지 않을 지라도 우리 앞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철학적 명제나 관념적인 사변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에, 지금 나의 현실 가운데 실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이 계는 분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바른 신앙은 이렇게 실재하시는 하나님,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그 삶은 자신이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이 처해 있는 그 순간, 그 현장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은 ‘하나님을 찾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이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즉 그는 왜, 무엇 때문에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찾는 영적 변화를 겪게 되었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에녹이 하나님을 찾은 이유는 바로 그가 만난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존하시는 하나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자 에녹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상’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디디고 섰던 것들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며, 아니 오히려 더 나아가서 심판의 연기 속으로 사라질 재와 연기와 같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깊이 만나면 이러한 열망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곳 바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세상이 주는 상, 세상이 보장하는 상을 바라고 달려왔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진리와 생명을 찾아 나섭니다. 그것의 값어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식으로 말하자면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는 돌아가서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사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보화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화의 값어치를 모르는 사람은 밭에서 번쩍이는 물건을 발견하였을 지라도 누군가 유리조각 같은 반짝이는 쓰레기를 버렸다고 투덜거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상에 대한 열망이 없다면 그는 아마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겉으로는 괜찮은 신앙의 모습이지만 내면의 실상은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현존하시는 하나님, 관념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있다면 새로운 가치 추구의 소망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을 찾고 찾았습니다. 그러한 찾음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징계를 받을까봐 겁나서, 복을 받지 못할 까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이 누리고 가진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에의 발걸음이요, 열망의 발걸음이지 결코 두려움의 발걸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에녹은 자신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된 존재임을 고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상에 대해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없어도 자족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는 이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없어도 자족하며 만족하는 것..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없는 세상의 상급, 세상의 부와 권력, 명예를 바라고 추구하는 것이 더 익숙하고 실제적입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가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던 시대 말입니다.


성경은 에녹이 하나님을 찾고 찾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찾았다고 하는 동사가 원어로 ‘에크제테오’입니다. 이 단어는 ‘에크’(~로부터)와 ‘제테오’(찾는다)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즉 ‘찾아내다(find out), 자세히 살피다, 정밀하게 조사하다, 주의 깊게 부지런히 수색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사냥개가 깊은 수풀 속에 숨어있는 사냥감을 향해 추적하며 찾아내는 모습니다. 어떠한 장애물과 난관이 있더라도, 개울과 덤불과 계곡과 담이 있더라도 사냥감을 찾아내는 사냥개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산맥 깊은 곳에 금광을 발견하고 추적하여 캐내는 광부처럼 역사의 현실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내며,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선포하는 추적자의 발걸음입니다.


이렇게 동사 ‘에크제테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아가는 헌신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바로 그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크제테오’를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며,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사모하며 갈망하는 것이며, 평화와 생명을 사랑하고 정의와 공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을 뜨고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임재하여 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 하나님의 주권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에크제테오’하는 사람은 불의와 악의가 가득한 현장의 한 복판에서도, 그리고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때로는 용납할 수 없는 불합리의 구덩이에서도 그것에 휩쓸리거나, 그것 때문에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건과 현장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아내며,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며, 그곳에 하나님의 의와 진리를 도래시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진리가 서는 것이요, 생명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우리의 탐욕을 채우는 것일 수 없으며, 세상에서의 권력과 폭력, 지배와 안락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낮아짐과 섬김에서 발견되며, 또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에서 발견되며,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서 비로소 풍성해 지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반대의 모습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시편57편을 보면 다윗의 유명한 시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57:7-11)


그런데 이 시의 위대한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 시가 탄생된 장소가 우리의 시선을 새롭게 주목하게 합니다. 시편57편의 표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그가 사울의 박해를 피해 도망 다녔던 때의 대표적인 장소가 광야가운데 있는 ‘아돌람굴’입니다. ‘아돌람굴’... 그 캄캄한 삶의 밑바닥이 어찌 상급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히려 우리 인생에서 지워버려야 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저주의 장소라고 할 만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돌람굴’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상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내면에 생명과 진리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섭리의 상급’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캄캄한 현실 속에서 다윗은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너무도 뚜렷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형의 낯을 피해 도망하던 야곱에게 광야 한복판 돌베개를 베고 누워서 잠을 청했던 ‘루스’가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 되었던 것처럼, 캄캄하여 아무것도,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던 그 어두운 동굴은 다윗에게 더 이상 ‘하나님의 버림’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외면도, 하나님의 징계’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물매돌로 적장 골리앗을 무너뜨린 승리의 장소보다도, 화려하고 찬란한 사울의 궁궐 왕좌보다 더 뚜렷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진리의 사람으로, 이스라엘의 겸손한 왕으로 세워져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삶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그토록 에녹을 기뻐하셨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당신을 찾지 않는 그 캄캄한 세상 속에서 오직 그만이 하나님을 그렇게 찾고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녹의 그 ‘찾음’은 더 안락한 삶이나, 더 많은 누림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상급’,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굶주린 가난한 마음이었습니다.


신문지상이나 주변에서 종종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마음이 씁쓸해 진 경험이 한두 번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부자 부모에게 평소에 효도를 하지 않다가 임종이 다되어서는 문지방이 닳도록 자식들이 드나들며 효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자식들이 정말 부모를 공경해서일까요? 아마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보려는 심산이었겠지요. 안 찾아오던 자식들이 자주 찾아오기 때문에 그 자식들의 효도를 받는 부모의 마음은 기쁠까요? 아마 자신의 가슴을 치며 탄식하지 않았겠습니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내 업보를 내가 받는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부흥하였다고 자랑하는 한국교회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주일날 예배당을 채우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서 아멘으로 받아들여지고 가슴을 뛰게 하는 말들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어떤 마음으로 찾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어떤 상급을 바라고 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내가 드리는 공경은 하나님의 마음에 어떤 자국을 남기고 있을까요?


‘하나님 편에서...’


우리는 여기서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 또한 생각 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는 자녀를 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무도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진정으로 주고 싶어 하는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자녀를 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오래 전, 한 방송에서 자기 자녀에 대하여 밝혔던 어느 유명 연예인의 고백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와서 기억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는 그 방송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 아이가 아픈 아이였어요. 마음에 병이 있던 아이... 아내의 소원은 아들보다 하루 더 사는 것... 제 아이가 11살이지만 저와 한 번도 대화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제 아이와 대화하는 꿈을 꿉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이런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기대하는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원하고 기대하는 상급은 어떤 것들인가? 만약 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 없어도 나는 살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에 대해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두렵게 하거나, 염려하게 하는 사건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에크제테오’ 할 수 있는가?


오늘 우리사회는 역사의 깊은 변곡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분단의 아픔, 폭력의 희생, 이웃과의 연결은 끊어지고 각각의 개인에게 모든 책임이 지워진 짐을 져야하는 단절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역사의 폭력 속에 희생된 개인의 눈물이 넘쳐흐르고 오히려 희생자들을 향한 혐오와 비아냥이 넘쳐 납니다. 공의와 정의는 경제적 욕망 앞에서 빛을 잃어갑니다. 말씀은 번영의 향수를 발라 살쪄있고 넓고 넓은 권력과 영광의 길을 진리의 길이라고 외치고 박수치며 환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우리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고, 불편하게 만들 수 있고,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에녹이 경건하지 않은 자들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찾으며 고독하게 하나님의 경건을 외쳐야 했던 것처럼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내야 하는 일일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의 것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고,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이기에 때로는 연약한 이들과 연대하고 손해와 비난을 감내해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 나의 이웃과 그리고 내가 속한 삶의 현장 속에서 나의 ‘에크제테오’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말씀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현존하시는 하나님, 상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상을 쫓아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가꾸어 가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찾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음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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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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