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8.18 움오름 주일 설교 -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요 17:1-5)

2019년 8월 24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7:1~5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2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3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4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5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설교문

1. 이효리, 그리고 윤동주


지난 주중 TV 속에 문득 지나가는 장면이 마음에 와서 쿵하고 부딪혔습니다. 그것은 JTBC 예능프로그램 ‘캠핑클럽’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참고로 <캠핑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은 우리나라 아이돌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핑클의 멤버 4명이 캠핑카를 운전해서 여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송입니다.


처음부터 그 프로그램을 쭉 봐온 것도 아니고, 또 그날의 방송분도 모두 지켜본 것이 아니기에 어디를 거쳐서 캠핑을 해온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출연자들이 다음 행선지로 가는 곳이 울진 구산해수욕장임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이효리씨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바닷가에 가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그녀가 꼭 하고 싶다던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연날리기’였습니다. 얼핏보면, 바닷가에 가면 해수욕이 생각이 나지 연날리기는 생뚱맞은 것 같습니다. 그때 그녀는 왜 연날리기를 하고 싶은지 그 이유를 짧게 밝혔습니다. “얼마전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먼저 갔는데, 그 사람에게 연을 날려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 아직 젊은 사람이었는데…”


... (사정상 일정 단락의 부분은 편집함을 양해바랍니다.) ...


저 역시 유년시절 바람부는 겨울날 추수한 뒤 비어있는 논두렁에서 가오리 연을 날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린 동심에 연필로 듬성듬성 적은 쪽지를 연줄에 끼워 하늘로 보내곤 했습니다. 바람을 타고 연 가까이 올라간 종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기까지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던 기억이 새로왔습니다.


누군가는 그리움을 안고 먼 하늘을 쳐다봅니다. 누군가는 먼저 간 이에게 전하고 픈 말이 있어 구름 너무 하늘에 시선을 둡니다. 시인 윤동주도 그의 대표적 시 <서시>에서 그가 왜 하늘을 바라보는지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시인은 그의 생명이 다하고, 그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오라고 부르실 그날까지 조그마한 부끄럼도 없기를 바랬습니다. 시인이 우러러 바라보기를 원했던, 그의 시선을 맞추기를 원했던 하늘은 다름아닌 그 신앙의 대상이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결국 청년 윤동주가 지극히도 소망했던 삶은 단순히 부끄러움없는 삶을 넘어 하나님을 마주보며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마주본다는 것은 그분과 눈을 맞추며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시인 윤동주, 27살, 그의 생애는 짧았습니다. 하지만, 음울하고 가혹한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써내려간 주옥같은 그의 시어들은 밤을 밝히는 별처럼 그 시대를 비추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단순히 그의 시가 아름다워서라기 보다는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과 눈을 맞추며 살아가고자 했던 그의 소망이 맑고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2.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1) 요 17장 -대제사장의 기도

지난 주일을 마지막으로 요 16장을 마치고, 오늘부터 요 17장으로 들어 섰습니다. 요 13장 - 16장은 ‘다락방 강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긴 설교였습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세족식 이후 하셨던 긴 당부의 말씀은 지난주일 부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시작한 요 17장은 성경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기도 중 가장 긴 기도입니다. 일명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라고 불리는 이것은 곧 홀로 남겨질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를 ‘예수님의 헌신의 기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요 17장 전체의 기도가 중보기도의 성경을 띄는 것은 아닙니다. 간략하게 요 17장의 구성을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1절 - 5절)

둘째, 제자들을 위한 기도(6절 - 19절)

셋째,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20절 - 26절)


히브리서가 증거하듯이 예수님은 단번에 자신을 드려 속죄의 제물이 되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께서 죄 없고,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셨던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기도를 하셨을까요? 요 17:1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렀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단순히 먼 하늘, 또는 밤 하늘의 별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을 우러러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나님과 눈을 맞추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매주일 예배와 그 안의 한 부분인 설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것을 여러 각도에서 역할과 효력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 이 본문에 비춰 말씀드린다면 ‘하늘을 향해 눈을 맞추도록 조정하고, 독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하늘의 뜻을 물으며

매주 설교 마친 뒤 집에 가면 맘이 편하지 않은 때가 다반사입니다. 하나님께 눈을 들어 맞추는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책감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어떤 때는 이러한 몸부림이 몇일을 가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괴로움을 줄여볼까 싶어 동기 목사(포천중리교회 송영윤 목사)와 더불어 지난 6월부터 설교원고를 교환해서 서로의 설교를 리뷰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송영윤 목사는 설교원고 뿐 아니라, 설교영상까지도 시청한 뒤 꼼꼼하게 리뷰해 주고 있습니다. 때로 이러한 과정이 아프지만, 매주 제가 말씀을 나누는 분들이 아프시지 않기 위해, 나아가 하나님과 눈을 맞추기를 바라는 맘으로 계속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송영윤 목사가 보내온 그의 설교 원고에 얼마 전에 읽은 <빛의 제국>(김영하 지음)이라는 소설의 한 대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습니다. 주인공이 피시방에 갑니다. 십대 청소년들이 온갖 종류의 컴퓨터 게임에 푹 빠져서 정신이 없습니다. 커다란 모니터 속에는 적들이 몰려오고 총알이 빗발칩니다. 그때 작가가 쓴 이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19인치 LCD 화면 속은 유혈이 낭자하고 상황은 절박하다. 그러나 50센티미터만 떨어져서 보면 코 묻은 돈을 우려내는, 한갓 게임일 뿐이며 그 절실함은 결코 전달되지 않는다.”


살면서 가끔씩이라도 우리 눈이 고착해 있는 50센티미터 앞의 모니터에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병아리가 물 한모금 마시고 하늘 한번 쳐다 보듯이 우리의 삶이, 우리의 기도가 그러해야 합니다.


언젠가 공자께서 가르치신 나이를 일컫는 말 중의 하나인 ‘지천명(智天命)’과 관련해 드린 말씀을 기억하시는지요? 공자는 나이 오십을 가리켜 ‘하늘의 뜻을 안다’고 해서 지천명(智天命)으로 불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기를 20대는 세상이 모두 자신의 뜻대로 되는 줄 아는 나이고, 30대는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안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는 때이고, 40대는 세상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50대가 되면 비로소 세월을 대가로 깨닫는 천명(天命), 하늘의 뜻, 그 명령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50대를 사시는 분들은 아십니다. 이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요. 50대가 되어도 여전히 하늘의 뜻이, 그 명령이 무엇인지 모르고 사는 날이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공자께서 말한 지천명(智天命)이라는 것은 틀린 말입니까? … 아닙니다. 그의 말은 맞습니다. 대신 해석이 틀렸습니다. 50대는 하늘의 뜻을 아는 때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애쓰야 하는 때라는 겁니다. 40대까지 죽어라고 땅만 보고 일하고 달려왔다면, 적어도 50대 부터는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의 뜻을 물으며 살아가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이 고개를 들어 하늘(하나님)을 바라보며 눈을 맞춘다는 것, 그것은 하늘의 뜻, 하나님의 생각을 묻고 마음을 알려하는 기도입니다. 사랑을 나타내는 말 중에 그 어느 나라의 표현에도 없는, 유일하게 한국어 표현에만 있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 맞았다”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생각을 알고, 마음이 통했을 때 우리는 “눈 맞았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녀관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이에서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아기를 키울 때 “오르륵 까꿍”이라고 하며 얼마나 아기와 눈을 맞추었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점점 자라면서 눈을 맞추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눈을 맞출 겨를도 없이 일어나 눈을 비빈 뒤 곧장 일터로 학교로 내달려갑니다. 그리고 밤늦게 졸리는 눈으로 귀가해서는 이내 각자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들곤 합니다.


서로 눈을 맞출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되돌아 보십시오. 가슴 뜨겁게 사랑을 고백하고, 온 맘을 다해 사랑을 표현할 때 얼마나 서로의 눈을 보았습니까! 이것은 사람간의 관계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갓 신앙생활할 때 얼마나 십자가를 한없이 쳐다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생각, 그분의 마음을 알기 위해 얼마나 기도했습니까! 그저 조그마한 것 하나 속에서도 하나님의 눈길,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했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도, 사랑하는 이들과도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한다 하면서도 눈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들 중의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눈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주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주님의 경외와 순종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복음서 곳곳에서 명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 7:34은 주님께서 청각 장애인을 고치실 때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듯이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요 11:41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벌써 냄새가 진동하는 무덤 속 나사로를 살리실 때 먼저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 14:19은 물고기 2마리와 보리빵 5개로 오천명의 군중을 먹이시기 전 먼저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셨다고 증거합니다. 이 모든 일들 속에서 주님은 하나님과 눈을 맞추며 아버지의 뜻을 물으셨고, 그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사건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고, 대상이 다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곳에 선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 보셨던 주님의 시선은, 주님은 손길은 이후 하나같이 아파하는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로 향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변화산 사건(마 19, 막 9, 눅 9)을 기억하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만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셨을 때입니다. 세 제자 앞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그때 눈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말씀하는 것을 본 베드로가 감격에 겨워 주님께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막 9:5, 눅 9:33)


이 부분에 베드로의 말을 단순하게 전하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막9:6) 누가복음(눅 9:33)은 베드로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한 말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변화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그곳에만 고착되어 산 아래 그들이 돌보고 섬겨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자신도 모르는 말을 했던 겁니다.


오늘 날 열심있다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부터 늦은 밤 철야기도에 이르기 까지 얼마나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을 바라보되 시선을 하나님과 맞추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그 시선을 따라가지 않는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지난 8월 15일, 74주년 광복절을 전후하여 목사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연일 심각하고도 심란한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도무지 신앙의 냄새도, 역사의식도 느껴지지 않는 쾌쾌한 하수구 냄새를 풍기는 말이었습니다.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극우와 토착왜구의 이미지를 달고 살아가는지 슬프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봈던 느헤미야 기독연구원의 김근주 교수는 소회를 다음과 같은 글로 밝혔습니다.


요즘 연일 정말 심란한 말을 마구 하시는 목사님들을 보면, 큐티나 평생의 목회가 세상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수 있다.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역사를 보는 눈은 그와 대체로 별개이다. …(중략)…


기도 많이 한다고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지 않으며, 24시간 주님만 본다 해도 강제징용된 노동자들과 원치 않게 끌려간 위안부, 그리고 혹 자원해서 갔으나 무참히 착취당하고 이용당하고 버려진 이들을 보는 눈은 생기지 않는 것 같다. 평생을 목회하였다는 이들 목사님들에게 경제개발은 그렇게 도드라져 보이되, 노동자가 기계가 아니라 외친 전태일은 보이지 않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치며 고문 당하고 죽임 당한 무수한 희생자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 폭압의 시대를 '태평성대' 쯤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그래서 70-80년대를 중심으로 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 폭발적 성장과 더불어 이른바 '대형교회'를 이룬 이들의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하다. 그 성장이야말로 오늘날 세습한 명성교회, 공공 도로 무단 점유하고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랑의교회, 그리고 24시간 주님만 보자며 참담한 소리를 이어가는 교회, 역사를 분간하지 못하고 가짜 뉴스를 팩트체크라며 내어놓는 큐티하는 교회를 낳은 것. 사실 유신독재, 광주민주화운동, 87년 민주화 싸움과 같은 격변의 시기에 교회 홀로 대형화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 성장과 하나님의 역사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님과 눈을 마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면 볼 수록 주변의 사람들이 보여야 합니다. 교회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본다는 것은 산 위의 주님이 아니라, 산 아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산 위의 황홀한 영적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에게로 다가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던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앉아 계신 것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곳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이 향하고 있는 사람들, 바로 자신을 돌로 내리치는 사람들을 향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하나님께 올려드렸던 바로 그 기도였습니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눈을 들어 우러러 하나님과 시선을 맞추는 그리스도인(그리스도를 꼭 닮은 사람)이었기에 스데반 또한 자신을 돌로 내리치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그리스도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난 한 주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했습니까? 어디에 머물러 있었습니까? 새로이 오는 이 한 주 어디에 우리의 시선을 맞추며 살아 가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담아 우리 눈이 하나님을 향하기를 원합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의미없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몇 마디라도 하나님과 눈을 맞추며 생각을 알고, 마음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선이 하늘에 고정되지 않고 땅으로 향하게 하시고, 우리 마음이 산 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산 아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이끌어 주옵소서.


극우와 친일로 내닫는 목소리 큰 일부 목사들과 교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이 민족과 역사 앞에서 어떤 과오와 해를 끼치는 지도 모르고 하는 일들에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더불어 ‘우리교회인데 왜 참견하느냐?’며 교회의 공공성을 짓밟으며 세습과 불법을 감행하는 교회가 교회 밖의 교회,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생각하며 걸어가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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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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