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8.11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2-33)






요한복음 16:32~33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설교문

1. 무엇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되게 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까요? 동기부여 및 자기개발 부분을 연구한 사람들은 주저없이 ‘태도’(attitude)라고 말합니다. 어떤 일, 또는 상황에 반응하는 태도가 우리의 변화를 좌우한다는 말입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바꾼다는 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그대로 소지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의 소유에 대해 불편함과 문제를 느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나아가 그 다음을 알려 하고,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강한 의지에 의해 앞으로 더 나아갑니다.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가지려는 태도를 갖고 있는 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느냐는 현재에 머무느냐?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느냐에 대한 주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화하는 주체가 견지해야 할 부분이 ‘태도’라면, 그 주체를 둘러싼 다른 이들이 가져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관용(관대함)입니다. 관용은 남의 잘못이나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자세입니다. 그 관용을 자양분 삼아 태도는 빛을 발합니다. SNS로 연결된 한 대학응급센터의 의사가 임신을 걱정하며 응급실로 찾아온 고등학생 커플을 예로 들며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의사는 위기가 찾아온 그들 앞에 무엇인가 결정하는 어른으로 그 자리에 있다. 사회는 그들을 억압할 뿐, 피임 방법조차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병원까지 용기내 찾아올 정도라면,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파악하고 있는 청소년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어른이 외면하면 과연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청소년기의 나도 불완전했다. 일탈하고 싶었고 반항하고 싶었다. 반면 그 행동에 큰 처벌이 떨어지거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어른들은 때로 놀라울 정도로 관대했다. 그 몇 번의 관대함으로 나는 위기를 넘어서 성인이 되었다. 종종 그 관대함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은 영영 틀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불완전한 시기에 몇 번의 이해를 받고 결국은 극복하며 성장하는 일. 그 어른들이 누구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다행히 그 우여곡절을 통과해 이 사회의 성인이 되었다. 기억에 남지 않는, 관대한 어른이 되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주일에 함께 나누었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ἄρτι πιστεύετε, 아르티 피스튜에테)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관용(관대함)’입니다. 속고, 또 속았지만, 그래도 그 속에 있는 작은 변화의 움직임, 그 가능성을 보며 인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그 관대함으로 인해 제자들은 마침내 주님의 참된 제자들로 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그 관대함 덕분에 어제의 심각한 오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오늘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주님의 관대함 안에서 한 걸음씩 내딛음으로써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더 나은 사람, 변화된 존재에 대해 고후 5:17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관대한 사랑으로 오늘도 사람을 품으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오늘도 ‘나’라는 사람의 존재가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2.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곧이은 체포와 십자가형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님은 관대했으며, 줄곧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평소에 너그럽다가도 위기나 어려움에 직면하면 관대함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결과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세속사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관대함을 끝까지 유지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이 현실을 모르거나 망각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되려 누구보다도 당신의 때를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때를 인지하셨기에 어떻게 남은 생애 시간을 보내고, 계절을 겪어야 할지 아셨습니다. 그 결과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할 뿐 아니라, 챙겨야 할 자기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관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처럼 제자들에게 관대한 가운데 십자가의 때는 목전에 다가왔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절 상반절입니다.

  •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이 구절을 원문의 느낌을 살려 다시 번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보아라! 정해진 시간이 오고 있고, 이미 왔구나! 너희들은 모두 뿔뿔이 제 살 곳으로 가고, 나를 혼자 남겨 두겠구나”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 문장 내 2가지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어떻게 한편으로는 “정해진 시간이 오고 있다”는 현재시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왔다”라는 완료시제가 될 수 있습니까?


오고있다는 정해진 그 시간은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현재시제로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왔다’는 그 시간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온 만물이 고대한 ‘메시야의 구속(구원과 속죄)의 때’입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재 속에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셨기에 하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미’와 ‘아직’이 혼재한 그때에 제자들은 ‘이미’와 있는 구속의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오고 있다던 ‘아직’이 현재가 되는 순간 그들은 제 살 곳을 찾아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예수님을 향해 “지금에야”라는 말을 사용해 가며 과거와 달리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확신에 찬 고백을 했던 제자들입니다.


이토록 확신에 찬 고백을 했지만, 그들은 얼마있지 않아 배신의 길을 갈 겁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제자들의 배신이 주님을 믿지 않거나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보십니다. 그것은 자기를 주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 내재한 연약함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시선은 마지막까지 따사로왔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결단합니다. ‘이렇게 살겠다고, 또는 다시는 그와 같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원상복구됩니다. 놀라운 복원력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속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 연약함 때문에 지난 한 주간도 몸부림 쳤던 거지요. 제자들을 향해 따사로왔던 주님의 시선이 우리를 향해서도 내내 따사로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곧 주님을 버리고 배반할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2절 하반절입니다.

  •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의 배신은 곧 주님의 홀로됨으로 귀결됩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속이고, 버리는 일이 자주 있는 세상 속에서 더더욱 가슴 아픈 배신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당하는 일입니다. 아마도 가까움의 정도가 더할수록 아픔도 증가될 겁니다.


황제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집정관이요, 삼두 정치의 통치자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44년)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벨기에, 서부 독일, 북부 이탈리아 일부)를 정복하고 명실상부한 로마 최고의 권력자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독주에 두려움을 느낀 원로원과 동지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폼페이우스 대극장 회랑을 지날 때 쯤 한 무리의 원로원들이 그를 가로막아 서서는 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무슨짓이냐고 호통치는 카이사르에게 달려든 원로원 무리 중 한명은 칼로 그의 목을 찔렀습니다. 그 후 권력 투쟁에 나선 원로원 14명이 카이사르를 총 23번이나 흉기로 찔러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흉기에 찔려 죽어가던 율리우스는 자신을 죽인 무리 속에 그가 총애하던 양자 브루투스도 있는 것을 보고는 마지막 이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을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또한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둘 모두 불행이고,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과 믿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배신이 상존하는 오늘까지도 배신에 관한 관용구로 이 말을 쓰고 있습니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


그렇다면, 제자들의 배신으로 홀로 남게 될 주님도 “너 마저도!!!”라고 소리치심이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32절 하반절을 통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 사랑해서요? 맞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요한 요건이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믿는다는 것이 주님을 다르게 반응토록 했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나누는 경계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배신 당하지 않습니까? 어려움 겪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더 어려움 겪습니다. 더 아픔 당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하나가 배신으로 홀로 되신 주님을 다르게 했듯이, 수많은 세상의 사건 속에서 우리를 다르게 살도록 합니다.




3.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은 십자가의 때와 제자들의 배신, 그 결과 남겨질 주님의 혼자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연이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배신할 제자들을 향해 “나는 괜찮다, 나는 괜찮다…”라며 되려 그들을 위로하시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제자들의 평안을 준비하셨습니다. 33절 상반절입니다.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짧게는 바로 앞선 32절의 말씀을 하신 이유, 그리고 길게는 요 13장 - 16장에 이르는 이 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바로 제자들이 평안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평안을 누린다’는 말은 평안을 지속적으로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한 때 잠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쭉 평안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나 괜찮다”고 제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환난을 당하게 될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그들이 지속적으로 평안을 누리길 구할 수 있었을까요?


지난 주중 고향집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위한 답시고, 어머니 동네 친구분 두 분을 함께 모시고 당일치기 포항 바닷가를 다녀왔습니다. 마치 소녀시절로 되돌아간듯하게 세 분은 연신 소리내어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던 중 제 어머니께서 ‘고려장’이야기를 꺼내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나이든 부(모)를 지게에 지고 자식이 꼬불꼬불 산길 숲풀을 헤치고 갔잖아요. 부(모)가 다시 찾아오지 못하게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던거지요. 그런데 지게에 업혀있던 부(모)는 그 자식이 되돌아갈 때 혹이나 길 잃을까 염려해서 업힌 채 손을 뻗어 나무줄기 꺾으며 갔다잖아요…”


이 말씀 듣는 순간 마음이 짠했습니다. 자식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부모들은 그러셨을까요? … 한 자식의 부모가 이럴진대, 주님께선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했으면 배신할 제자의 안위를 마지막까지 그토록 생각하셨을까요? … 이어 주님은 제자들이 필연적으로 당하게 될 환난 때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지,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 하반절입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제자들이 환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다르게 살다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길을 따라 산다는 이유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자주 이런 질문하지 않습니까? ‘내가 왜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할수록 왜 어려운 일이 더 많이 생길까?, 왜 하나님은 내게만 자꾸 이러실까?’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려하고, 주님의 말씀을 살아내려 함에도 불구하고 환난을 당한다면, 주님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 하십니다. 그때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셔서 겪는 환난이 아니라, 되려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겪는 환난이라고 하십니다.


지난 여름수련회 첫날 저녁 양장로님 & 이권사님 내외분을 제 차에 모시고 가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긴 고통이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고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셔서 생기는 고통이 아니라, 어쩌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겪는 아픔일지 모릅니다. 괜히 하나님 알아서 겪는 환난말입니다. 그런데, 장로님과 권사님 내외분은 그 누구보다도 그 긴 고통을 잘 견뎌오셨고, 잘 버텨오셨습니다.”


이어 제가 권사님께 장난스레 이렇게 말씀드려 권사님을 웃겨드렸습니다. “아, 권사님~ 괜히 하나님 알아서 이 고생 해오셨습니다.”


주님을 따름으로 인한 환난 앞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라”(33절), ‘담대하라’는 단어 θαρσέω(다르세오)는 현재시제 명령으로 “계속해서 용기를 내라”, “계속해서 안심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앞으로 쫄지마라”는 뜻입니다. 국을 계속 끓이면 국물이 쫄아듭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계속 어려움을 당하고, 겁을 먹으면 쫄게 됩니다. 점점 작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겁 먹어 쫄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담대하라”는 말씀의 뒷부분에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더이상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 이겨놓으신 전쟁 뒤에 잔당처리하는 국지전 치르는 것이니 무서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당당하라는 말씀입니다.




4. 담대하라


지금부터 1950여년 전, 사도바울은 네로 황제 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다 로마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와 왔음을 직감한 그는 아들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디모데후서입니다. 그 편지의 마지막 부분인 딤후 4장에 당시 그의 형편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딤후 4:10-11입니다.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지난 수련회 때 읽었던 이 부분이 기억 나시지요? 바울이 복음을 가르치고, 병자를 치료하는 등 선교활동을 왕성히 할 때 사람들은 사도를 위해 자신의 눈이라도 빼서 주려고 할 정도로 그를 좋아했고, 또 따랐습니다. 하지만, 로마 지하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즈음 그의 주변엔 의사 누가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사람들은 바울을 외면했고, 각자 제 살 길 찾아 그를 떠났습니다. 믿었던 사람들로 인해 배신당하고, 외면당하는 그 참담한 때에 사도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딤후 4:16(쉬운성경)입니다.

  • 내가 처음 재판관 앞에 끌려갔을 때, 나를 도와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들이 비난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습니까? 되려 그들이 비난받지 않기를 구할 수 있었습니까? 곧이은 딤후 4:17-18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 주님께서는 그 순간에 나와 함께 하셔서 이방인들에게 용기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이방인들까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또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내게 해를 입히려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를 구해 주시고, 하늘 나라에 안전히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영원토록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차갑고 어두운 그 지하감옥 속에서도 자신과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 상황에서도 사도는 힘을 내고, 용기를 내어(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 주님은 이 세상에서 바울의 달려갈 길의 마지막 부분까지 함께 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안전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귀하신 움오름 가족님들~

우리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해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까운 이들마저 등을 돌리고, 믿었던 이들이 배신했던 때에도 끝까지 바울과 함께 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곧 배반할 제자들이었지만, 주님은 제자들 안의 변화의 가능성을 보며 되려 격려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담대하십시다. 용기를 갖고 일어서십시다. 다시 힘을 내십시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굳세게 하시며, 도우시며, 붙드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미 이기신 주님의 승리에 힘입어 매일매일 우리의 영적전투에서, 인생싸움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담대히, 용기를 내어, 주님의 평안으로 일어서 가는 주님의 사람되게 하옵소서.


늘, 이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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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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