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8.04 움오름 주일 설교 - "이제는 너희가 아느냐"(요 16:25-31)

2019년 8월 10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25~31

25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26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27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28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29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30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3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설교문

1. 고전, 그리고 성경과의 만남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노벨상 수상자가 내한했는데, 콕 집어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약속이 있어서 안되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매주 본방을 사수하는 드라마가 있어서 갈 수 없다고 통보하시겠습니까?


거절하실 분은 우리 중에 단 한명도 없으실 겁니다.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인데, 되려 그 사람이 나를 만나고자 하니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분명 열일 다 제쳐두고 만나러 갈 겁니다.


지난 7월, 비록 약속이 연기되어 아직 두 사람이 만나지 못했지만, '투자의 귀재' 워런버핏과의 점심식사를 위해 중국인 사업가가 457만달러(약 54억원)를 지불했습니다. 점심 한끼에 엄청난 비용지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비용을 내고서라도 자신이 존경하고 흠모하는 사람과 몇 마디라도 이야기 나누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2011년도에 별세한 스티브 잡스 또한 흠모하며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소크라테스, 기원전 5세기 사람이었습니다.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식사라도 하며 그에게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의 전 재산을 다 바쳐도 좋다고 할 정도로 소크라테스를 흠모했습니다.


요즘 저는 지나간 고전들을 찾아 하나씩 읽어가고 있습니다. 교육학을 전공하면서도 책 겉표지만 보고 지나쳤던 쟝 자크 루소의 에밀을 비롯해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있습니다. 고전책을 읽으며 뒤늦게 든 생각은 단순히 과거의 책을 읽는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에 빛을 던져주었던 천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사상과 생각의 핵심을 들으며, 그분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경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학생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넘어 그의 삶 자체가 변형(transform)됩니다. 고전이 된 책을 읽고, 고전(classic)이 된 악보를 연주한다는 것은 바로 그 스승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그를 통해 그의 생각을 들으며, 나를 다듬어 가고, 바로 세워가는 자기 수련의 시간입니다.


지난 7월 26일(금) - 28일(주일)에 있었던 수련회는 고전에 비하자면, 고전 중의 고전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바울서신과 함께 읽는 사도행전>은 2천년 기독교의 근간을 세웠던 사도 바울과의 만남의 시간이었습니다. 눈으로만 읽는 평면적인 성경통독이 아니라, 백호성 목사의 거칠고 빠른 숨소리와 목소리의 높낮이를 통해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은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조금전 성경을 고전에 비하긴 했지만, 성경은 인간의 생각에 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 행하심을 보고 듣는 경전입니다. 뛰어난 한 인간의 책이 한 사람을 변화의 길로 이끈다면, 1600년간 40명의 사람들을 통해 기록케 하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는 비교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4:12은 성경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무덥고 습한 긴 여름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고전 속 지혜와 만나는 시간을 틈나는 대로 가졌으면 합니다. 나아가 무엇보다도 현재에도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두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2. 구하고, 구하다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 성령께서 오시면 그로 인해 일어날 변화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5절-26절을 보시면 그 변화는 크게 2가지입니다.


첫째는 2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더이상 비유로 말씀하지 않고, 분명한 말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지금껏 비유로 말씀하셨습니까? … 2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하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이 세상에 있는 것을 들어 이해토록 해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진리의 본체를 감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목적으로 인해 주님이 사용하셨던 비유를 이후로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대신 성령님께서 분명한 말로 하나님에 대해 알려주시겠다는 겁니다.


성령님으로 인해 일어날 두 번째 변화는 26절의 말씀과 같이 더 이상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구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유인즉, 우리가 직접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26절 속에 2번 등장하는 ‘구하다’라는 동사의 헬라어 원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2번의 ‘구하다’ 모두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헬라어는 각각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라고 할 때 ‘구하다’ 동사는 αἰτέω(아이테오)를 쓰는 반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내가 계속 너희를 대신해서 아버지께 구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할 때 ‘구하다’ 동사는 ἐρωτάω(에로타오)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말로 동일하게 번역된 ‘구하다’ 동사 αἰτέω(아이테오)와 ἐρωτάω(에로타오)는 별 차이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αἰτέω(아이테오)가 자신의 몫으로 어떤 것을 요구하는 공식적인 의미의 구하다는 동사인데 비해, ἐρωτάω(에로타오)는 당사자들간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구하는 것, 다시 말해 청탁하는 것 같은 동사입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성령님이 오시기 전까지 제자들을 비롯해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주님께서 하나님께 청탁하는 형식으로 받았다면, 오순절 이후부터는 공식적으로 당당히 우리 몫을 구하듯이 하나님께 구하게 된다는 겁니다. 무엇 때문에요? 주님의 이름 때문입니다. 이것이 25절 - 26절에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어 27절은 ‘이는’으로 번역된 이유 접속사를 통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찌기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아벨의 삶으로 드린 그의 예배와 기도)에 대해 응답하신 반면, 가인과 그의 제물(가인의 삶에 바탕한 그의 예배와 기도)에 대해선 듣지 않으셨습니다. 죄와 죄된 삶에 대해 선을 그으셨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인 인간의 기도에 직접적으로 반응하겠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그 이유를 27절에서 2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심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죄인들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인간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신다는 설명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잘 이해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히 4:16을 통해 이 특혜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the message 번역: 그러니 곧장 그분께 나아가, 그분이 기꺼이 주시려는 것을 받으십시오. 자비를 얻고 도움을 받으십시오.)




3.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28절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3가지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8절을 다시 함께 받들어 읽으시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3개의 동사는 ‘나와서’, ‘왔고’, ‘떠나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셔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로 다시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탄생과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모두 28절 한 절 속에 3개의 동사로 함축되어 있는 셈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재학시절 사경회를 하고 있던 양수리로 정한조 목사(100주년기념교회)가 볼일 차 방문해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신대원 2학년에 유경호 압니까?” 그때 한 신학생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아, 족구 잘하는 그 사람요! 저 위에 운동장에서 족구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을 한 학생이 누군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많은 말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유경호라는 사람을 ‘족구 잘 하는 사람’으로 기억했듯이, 우리 삶에 보이는 몇 단어로 우리를 기억할 겁니다.


주님의 삶을 3개의 동사로 요약했듯이, 우리의 한평생도 ‘태어나다, 살다, 떠나다’는 이 3개의 동사로 요약되고 기억할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같이 학교를 다녔지만, 똑같은 학교생활을 한 것이 아니듯, 같은 년수를 산다한 들 같은 품과 격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삶의 출발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 또한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떠나심 또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삶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졌기에 같은 인간의 몸을 갖고서도 다르게 사셨습니다. 사람이되 하나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서 살고, 또한 떠나가야 하는 사람이지만, 우리 생각과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조금 더, 조금 더 맞추어간다면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29절 - 30절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믿는다는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그 말을 제자들은 30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에야… 아나이다…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헬라어 원문은 우리말 순서와 달리 ‘지금’이라는 시간부사가 제일 먼저 나오면서 “지금에야 우리가 아니이다…”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는 시간부사를 힘주어 말하며 자신들은 과거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아가 지금부터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강변합니다.


그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후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쳤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알았다면, 진정 주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또한 믿고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과거와 달리 지금은 믿는다고 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에 다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가짜였을까요? … 이에 대해 주님은 3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지금에야’라는 제자들의 고백에 주님께서 ‘이제는’이라는 시간부사로 화답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어떤 이들은 "이제야 너희가 믿는구나”라는 주님의 선언이라고 봅니다. 그러데,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이제야 너희가 믿는다구?”라는 주님의 책망 섞인 반문으로 봅니다. 가족님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해석이 더 적합한 것 같습니까?




4. 99%라도 가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글에 대해 ff나눔으로써 함께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월간 큐티 <생명의 삶 7.30일자>는 조oo 목사의 '왜 기도하는가?'라는 책의 글을

묵상 에세이로 인용했습니다. 그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우리를 온전히 내어 맡겨 드리는 순도 100%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99%라도 가짜 믿음입니다. 과연 우리 믿음의 순도는 몇 %입니까?"(생명의 삶 7월호, 161쪽)


아틀란타에서 훌륭하게 목회하고 있는 제 동기목사(김종현)는 이 글을 읽으며 마음에 분이 일어나 그 글을 쓴 조ㅇㅇ목사와 하나님께 묻고 싶어진다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1) 하나님은 조ㅇㅇ목사에게 순도 100%의 믿음을 교육시켜 주셨나요?

2) 도대체 순도 100%의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요?

3) 정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순도 100%의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4) 정말 99%라도 가짜 믿음입니까?

5) 과연 우리 믿음의 순도는 몇 % 입니까?

6)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끝으로 동기목사는 순도 100% 믿음이 뭔지 아는 사람, 순도 100%의 믿음에 도달한 사람이 있었다면 알려달라는 말로 마무리했습니다. … 어떻습니까? 100%가 아니면 다 가짜입니까? 바닷물과 민물은 염도의 차이에 따라 분류합니다. 염도 3%의 물은 바닷물이고, 염도 0.05% 이하는 민물이라고 합니다. 100% 중에 97%가 없이 불과 3%만 있어도 짠맛나는 바닷물이 되어 식용이 불가해 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독 믿음이라는 것은 99%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는 1%로 인해 거짓믿음이 됩니까? 저로서도 도저히 이해불가입니다.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교회에서 신앙을 배우고,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만났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책을 통해 만났던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100% 순도를 지닌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온전함을 사모하며, 또한 자신 속에 부재함에 대해 절망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더더욱 하나님 께로 기울어져 갔던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사람으로 히 11장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성경엔 ‘믿음이 크다. 있다, 없다’의 표현은 나오는데, ‘순도가 몇 %냐?’ 라는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을 향해 귀신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순도 몇 %를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 없음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도와달라고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제 동기목사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습니다.


“우리 신앙의 순도가 100%를 향해서 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 아니다. 성숙은 내 신앙의 순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때, 순도가 아니라, 탁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0.0001%도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믿음으로는 정말 구원받지 못하겠다는 것을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겸손해지는 것이 신앙의 성숙이다.”




5. “ἄρτι πιστεύετε”(아르티 피스튜에테)


앞선 31절의 질문으로 되돌아 갑니다.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주님의 책망일까요? 주님의 격려요, 인정일까요? 31절을 헬라어 원문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짧은 문장입니다. 저를 따라 한번 소리 내어 보시겠습니까?


“ἄρτι πιστεύετε”(아르티 피스튜에테)


πιστεύετε(피스튜에테)라는 말은 “너희가 믿느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앞선 ἄρτι(아르티)라는 말은 과거와 반대되는 현재 상황을 나타낼 때 쓰는 시간부사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지금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제부터’라는 말로도 번역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엔 믿지 않더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나를 믿느냐?”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주님이 저 말씀을 하실 때도, 그리고 이후 한동안도 제자들은 진정 주님을 믿는 사람이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 속에 있는 그 조그마한 변화를 믿음의 시작이라고, 그것 또한 믿음이라고 격려해 주신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 속에 부재한 많은 것을 보며 “가짜”라고 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 속에 내재한 그 작은 것으로 인해 “진짜”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1%의 없는 것을 단죄하지만, 주님은 1% 가능성을 믿음이라 격려해 주십니다. 주님의 그 지지와 격려에 힘입어 훗날 제자들은 점점 더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기울어져 갔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생명까지 걸며 증거하는 사람으로 서 갔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에게 실망합니까? 우리 안에 있지도 않는 99%의 순도가 아니라, 넘쳐나는 99%의 탁도에 절망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마십시다.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절망하는 우리를 보시며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ἄρτι πιστεύετε”(아르티 피스튜에테)

“이제는 너희가 나를 믿느냐?”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99%의 순도는 커녕 99%의 탁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1% 순도도 내세울 수 없는 지극히 세속적 사람입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은 오늘도 끌어 안으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힘입어, 그 주님의 격려에 기대어 일어서는 8월 첫주 성찬주일입니다. 주님, 우리의 믿음없음을 도와 주소서.


“이제는 너희가 나를 믿느냐?”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여전히 부끄러움을 감출 수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 더 1%, 1% 주님께 기울어져 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서 우리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께 온전히 기울어진 믿음의 사람’으로 대면케 하옵소서.


부재한 99%가 아니라, 내재한 1%라도 믿음이라고 격려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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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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