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7.21 움오름 주일 설교 - "그날에는"(요 16:16-24)

2019년 8월 12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16~24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설교문

1. ‘최초’라는 수식을 얻기까지


일본과의 무역 및 외교분쟁이 매일같이 메인 뉴스가 되던 지난 주중 조용하면서도 의미있던 한 사건이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인류 최초의 달 착륙 5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아직까지 음모론과 반론이 대립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인류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던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1969년 7월 16일 아침, 인류는 마침내 달 착륙선을 쏘아올렸습니다. 그때 우주선에 탑재된 컴퓨터는 당시 최첨단이라고 여겼지만, 실은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쥐고 다니는 스마트폰 보다도 훨씬 처리능력이 떨어지는 컴퓨터였습니다. 우리 핸드폰보다도 못한 장비를 갖고도 그 큰일을 해 냈던 겁니다.


지구 밖으로 나간 우주선은 끊임없이 내리쬐는 태양열에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쉼없이 회전해야 했습니다. 마치 쇠꼬쟁이에 꽂혀 돌아가는 통닭구이처럼… 우주 비행사들은 점점 다가오는 달이 마치 다른 세상에 온듯하게 멋졌지만, 멀리 조그맣게 떠 있는 지구의 모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침내 1969년 7월 20일 닐 암스트롱과 버즈 울드린은 달에 착륙했습니다. 그들은 달에 첫발을 내딛은 후 그 표면에 성조기와 기념판을 설치했습니다. 그 기념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서기 1969년 7월, 지구라는 행성에서 온 인간이 이곳 달에 첫 발을 내디뎠다. 우리는 인류를 대표하여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이후 1969년 7월 24일 지구로 되돌아온 그들은 태평양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전설과 설화 속 존재로만 인식하던 달에 다녀온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흔히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떠올릴 때 탑승자였던 선장 암스트롱, 착륙선 조종사 올드린, 그리고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등을 기억합니다.


그들 모두 달 탐사에 성공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최초’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수고했던 사람은 무려 4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수많은 엔지니어와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무론하고 밀폐우주복을 제작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수고하고 땀 흘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50년전 아폴로 11호는 ‘최초’라는 수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수고했던 무명의 헌신자들 중에는 흑인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지난 3월에 개봉했던 영화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엔 그들, 숨겨진 영웅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영화는 불과 50여년 전인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하지만 그때에도 인종차별은 극심했습니다. 흑인 노예해방을 선언했던 링컨이 서거(1963년)한지 100년이 지났지만, 차별과 탄압은 여전했습니다. 그 속에서 마틴 루터 깅 목사가 인종차별의 철폐와 인종 간의 공존을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깨어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창조되었다는 명백한 이념을 신봉한다'는 미국의 신조 안에 깃든 참뜻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 꿈입니다”


하지만, 킹 목사는 그 꿈을 생전에 볼 수 없었습니다. 1969년 극우파 백인 제임스 얼 레이의 총에 맞아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무거운 인종차별과 폭압의 문화 속에서 그에 만만치 않게 더했던 것은 남녀차별이었습니다. 숨겨진 영웅들이었던 그들은 흑인이면서 여성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인 남성 중심의 나사에서 고군분투해 갔습니다.


근무하는 나사 건물 내에 흑인 전용 여성 화장실이 없어서 볼일을 보러 바쁜 업무 중에 800m를 매번 뛰어갔다 와야 했습니다. 버스 탑승자리가 구분되는 것은 여사였고, 백인 학교, 도서관 등은 아예 출입불가였습니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차별받는 흑인들 또한 대다수가 그것을 당연시 했습니다.


그런 와중 메리 잭슨은 나사에서 엔지니어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부당했습니다. 그녀의 남편마저도 불가능한 일이라며 꿈도 꾸지 말라고 화를 내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서는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의 수업을 수료해야 했는데, 당시 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법원에 재소했고, 재판장에 서서 판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요점은요. 버지니아 주의 어떤 흑인 여성도 백인만 다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이건 전례가 없는 일이죠. 저는 나사의 엔지니어가 되려고 합니다. 하지만 백인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듣지 않으면 엔지니어가 될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제 피부색을 바꿀 수가 없지요. 그래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초’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판사님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판사님, 오늘 당신이 보게 될 모든 재판들 중에서, 어느 판결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 중요한 판결이 될까요? 어느 판결이 당신을 ‘최초’로 만들어 줄까요?”


(And I sir, I plan on being an engineer at NASA, but I can't do that without taking them classes at that all-white high school, and I can't change the color of my skin. So I have no choice, but to be the first, which I can't do without you, sir. Your honor, out of all the cases you gon hear today, which one is gon matter hundred years from now? Which one is gon make you the first?)


그녀는 '차별'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최초'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조곤조곤하게 완고한 백인 판사를 설득했습니다. 백인 판사를 향해 당신이 집안 최초의 군인이자 대학생이었고, 연이은 세 명의 주지사에 의해 재임명된 최초의 주립 판사였던 것처럼 오늘의 현명한 판결이 당신으로 하여금 100년 후, 역사에 현명한 판결을 내린 최초의 판사로 기록되게 해 달라는 그녀의 말에 설득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영화는 이렇게 인류 최초로 달 탐사선을 보내기 위해 지구의 중력을 거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흑인 또는 여성 최초로 차별과 폭압이라는 중력을 거슬러 비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최초’라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되고 아픕니다. 치르야 할 대가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가를 치루었던 앞선 이들의 걸음이 있었기에 그 길을 따라 다음 사람들이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눈물겨웠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단치 않았던 그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2. 그날에는


김종록의《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1)》중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우거진 숲 속에서 처음 길을 내며 가는 사람은 먼저 마음속으로 길을 구상한다. 꿈을 꾸는 것이다.


인류를 향한 오랜 하나님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맘 속에 그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 꿈의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유대인들이 꿈꾸고 그려왔던 구원의 방법, 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메시야를 외면했고, 차별했고, 심지어 십자가형으로 이끌어가려 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굳게 믿었던 제자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메시야 왕국을 그리며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서조차 서로의 서열을 매기며 권력투쟁을 일삼았습니다.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조차 오해받고 외면받는 상황에서 구원의 길을 최초로 열어간다는 것은 여간 외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남아있을, 목자잃은 양처럼 유리할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그들의 혼란과 두려움을 달래시며,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하시며, 주님을 대신하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이 제자들을 이끌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어질 날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기쁨이 충만해 질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3절입니다.

  •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되돌아가신 이후의 일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태까지 제자들은 궁금할 때마다 바로 옆에 계신 예수님께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 부재의 시간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주님은 그 변혁의 날을 ‘그 날’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그 날’은 ‘여호와의 날’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양면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날임과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살아가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의미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어떻게 구하고 어떻게 받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오신 후에 어떻게 구하고, 어떻게 받는지를 보게 될 것이랍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구하고, 그 이름으로 받게 되는 새로운 응답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이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응답받는 최초의 사건이자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방식의 대전환이었습니다.




3.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앞선 23절 말씀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2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내 이름으로’라는 말씀이고, 또 다른 부분은 ‘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요 14장에서 일찌기 말씀하셨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번 더 찾아 보시겠습니다. 요 14:14입니다.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주님은 앞선 13절에 이어 14절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님 응답의 근거가 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중에 제 초등학교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 그리고 딸을 함께 만났습니다. 만남의 이유인즉, 제 친구의 친구 딸이 오는 가을에 제네바대학교 교환학생으로 1년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는 이 하나없는 생면부지의 땅에 가게 되었다 보니, 물어볼 곳도 의지할 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딸이 생각해 낸게 교회였습니다. ‘아, 한인교회에 나가면 누군가 도와주겠지!’


한번도 교회란 곳에 가 본적이 없는 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세속적인 방법이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생각을 자기 엄마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엄마가 일찌기 파리에서 유학했던 제 친구에게 혹시 제네바 한인교회에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던 겁니다. 그때 제 친구가 “내 친구가 그 한인교회 담임목사했는데!”라고 해서 만남이 이뤄 졌습니다.


그 만남 전에 전화 메시지로 그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이 9월에 제네바로 가기 전 제네바에 계신 몇몇 분들에게 그에 대해 말씀드리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물론 그 분들은 기꺼이 그 학생의 제네바 안착과 교회생활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그 학생이 1년 동안 비싼 물가로 유명한 스위스에서 생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과외학생까지 알아봐 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일면식도 없는 학생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그 학생에 대해 하나같이 나서서 도와주시려고 작정하셨을까요? … 죄송한 말씀이지만… 먼저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살았던 저 때문입니다. 제 이름을 보고 그분들이 자신의 일처럼 도와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한 사람의 이름을 봐서 이토록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신다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허물많고, 실수 많았던 한낱 사람의 이름을 봐서라도 이토록 도와준다면, 하늘의 하나님은 말할 필요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비교 자체가 되려 불경스럽지 않겠습니까!


저는 생전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그 학생이 제네바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의 사랑과 친절을 듬뿍 받았으면 합니다. 그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없이 누렸으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꿈을 이루어갈 뿐 아니라, 자기 집안 최초의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류에 공헌하고 기여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요 16장 23절로 되돌아 가서,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주시리라’는 부분입니다. 이 동사의 시제는 당연 ‘미래’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미래 언젠가 주실 것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계속해서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지혜를 주시고(약 1:5), 능력을 주시며(빌 4:13), 일용할 양식(마 6:11)을 비롯하여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로 한 것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누구의 이름 때문에요? 예수 그리스도 바로 우리의 주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면 다 받아?’ … 저는 이 물음 이전에 우리 스스로가 이 질문 앞에 답할 수 있다면 된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주인)이십니까?”


학교에는 말로는 “선생님, 선생님”하면서도 선생님으로 대하지 않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있습니다. 말로는 “제자”라고 하지만, 전혀 제자로 대하지 않는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관계성과 존중이 결여한 관계요, 호칭이요, 수사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호칭을 넘어선 관계를 말하는 겁니다. 친밀한 관계와 존중에 바탕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다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관계가 되면, 예수님을 존중하면 정말 기도를 들어주십니까?” … 여러분들이시라면,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해 보시면 압니다. 그런 관계가 되어 보시면 압니다. 예수님을 정말 주인으로 대우해 보시면 압니다. 한번 맛보시면 ‘아, 이런 거구나’ 아십니다. 그래서 예전 시골장터에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던 약장수가 이렇게 말했지 않습니까? “한번, 잡숴봐~~~”





4.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드디어 이번 주 금요일(26일)부터 오는 주일(28일)까지 여름수련회가 열립니다. 이번 수련회는 몇년 째 해오던 것과 달리 사도행전을 읽어가며 그와 관련한 바울서신을 읽어갈 것입니다. 사도행전이란 어떤 성경입니까?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의사 누가가 보낸 두 번째 서신입니다. 그럼, 첫 번째 서신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입니다. 우리 잠깐 찾아보시겠습니다. 눅 1:1-4입니다.

  •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그러니까, 누가복음은 ’각하’로 불리는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을 위해 예수님에 관련한 모든 일을 차례대로 써 보낸 24장의 1차 편지입니다. 목적은 눅 1:4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데오빌로가 알고 있는 것을 더 확실하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럼, 데오빌로를 위한 2차 편지인 사도행전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은 이름대로 풀이하자면, ‘사도들이 행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인 것 같지만, 실질적 주어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다다르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지, 증인의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진술하는 책이 사도행전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령행전’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영어로는 Acts 행동들, 실천기록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제목은 사도행전을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라고 합니다. 영어식으로 표현하자면, Practice입니다. 프랙티스란? 이론을 다 배운 사람들이 현장에서 실습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사도행전이 그렇다는 겁니다. 복음서를 통해 복음을 알고 배웠던 사람들이 더이상 복음을 이론으로만 살지 않고, 사람을 찾아가 만나며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프랙티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실천적 삶을 그린 것이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 사도행전이라는 성경입니다.


중동의 시골 동네 베들레헴 우릿간에서 나신 분이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분이 되었습니까? 나사렛 산골 촌동네의 가난한 목수로부터 시작되었던 그 사건이 어떻게 해서 2천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아시아 한쪽에 있는 우리와 관계있는 사건이 되었습니까? 제자들 속에 권능으로 역사하셨던 성령님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 이론으로만 살지않고,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땅끝까지 증인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증인으로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하는 전체적인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행 1:8입니다. 함께 찾아보시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이 주어집니다. 그 권능을 헬라어는 δύναμις(뒤나미스)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δύναμις(뒤나미스)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권능이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적인 힘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힘이 왜 주어졌습니까?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도록 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증인’이라는 μάρτυς(마르튀스)에서 martyr(순교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자신이 믿고, 신뢰하고, 따라가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으며 증거케 하셨다는 겁니다. 누가요? 성령님이요. 그 성령님은 같은 동족들로부터는 차별과 탄압을, 지배국 로마로부터는 핍박을 받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생명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놓는 ‘최초의 순교자’들이 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날’은 우리에게 유익한 날입니까? … 아닙니다.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망하는 길입니다. 멀쩡한 사람 망치는 길입니다. 그 성령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던 멀쩡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 성령님 때문에 당시 가말리엘의 뒤를 이을 최고의 석학 청년 사울을 망치게 했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고,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는 속(고후 11:23-27)에서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μάρτυς(마르튀스)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멀쩡했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님으로 인해 망가지고, μάρτυς(마르튀스)되어 망했던 그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생명의 길이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실행 덕분에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배턴(Barton)은 우리 시대, 우리 손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를 살아가야 할까요? 무기력한 이론에 밝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성령님과 더불어 권능있는 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μάρτυς(마르튀스)로 실행해 가시렵니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가 결정하고 실행할 일들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하게 기억되겠습니까? 어떤 결정이 우리를 최초요,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 실행하는 증인되게 하겠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차별과 폭압 아래서 그것을 운명으로 당연시하지 않았던 사람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무겁게 짓누르는 중력과도 같은 그것들을 뚫고 앞으로, 또 위로 뻗어갔던 그분들의 희생과 땀흘림으로 인해 오늘 훨씬 자유로운 출발선에서 인류가 경주토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마땅한 존엄과 책임에 대한 감각으로 자신의 시대를 일구어갔던 그분들처럼 이제 우리도 우리의 시대를 기경해 가게 하옵소서.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망하는 길이고, 망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꿈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았던 분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말로만 떠드는 ‘입진보’라는 말처럼 이론으로만 무장한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자신의 생을 걸고 증인의 삶을 살았던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의 길을 이제 우리도 걸어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날, 그날에 임하셨던 성령님~ 우리 속에서도 역사해 주옵소서.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자랑할만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우리 시대를, 우리 사회를 아름답게 기경해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인간욕망의 중력을 거스르며 주님의 증인, Πράξεις(프락세이스)의 우주선을 날리는 사람되게 하옵소서. 우리시대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간 히든 피겨스로 하나님 앞에 기억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주님이시요, 주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9.07.21 봉헌기도 - 윤성천

주님을 대신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뜻에 이끌리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최초의 실천적 삶을 담대하게 살았던 사도들을 비롯하여 인종 차별, 성 차별 등 인류사에 뿌리 깊은 차별의 벽을 먼저 넘은 선구자들의 희생적인 삶을 통해 우리의 나아갈 길을 밝혀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독교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가는 현실에 안타까워하기만 할뿐 당당히 나서서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이 넘쳐나는데도 나약하고 두려움이 많아서 그냥 안주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반성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타성에 젖은 그저 그런 무기력한 인생이 되지 않도록 성령 하나님이 도와주시옵소서.


낡은 관행과 고정된 틀을 깨고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데 우리가 앞장설 수 있도록 주님의 권능을 베풀어 주옵소서.


모든 순간을 우리의 뜻대로가 아닌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이 이끌어 주옵소서.


기도에 더 집중하고 말씀을 더 사모함으로써 주님의 마음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우리들의 본분에 힘쓸때 이를 기억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믿고 의지하며  오늘도 우리들의 정성을 담은 예물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드리는 마음을 축복하셔서 영육의 강건함을 더하게 해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예물이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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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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