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7.14 움오름 주일 설교 -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16-24)





요한복음 16:16~24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설교문

1. 감각적 인간


사람은 다섯가지 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지각해 가며 성장해 갑니다. 사람의 뇌는 이러한 감각을 통해 발달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만약 감각이 없다면 뇌는 주변세계를 인식할 수 없고, 발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뇌가 세상을 인식하기 위해 뇌 밖으로 뻗어 나온 촉수가 감각기관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람의 뇌를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감각처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각기관으로부터 정보를 입력받고, 처리(인식, 비교분석, 통합, 기억, 실행계획)해서, 그에 맞는 반응을 출력할 때 신경회로망이 연결되고 강화되는 프로세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우리의 뇌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이다!”는 인지신경학의 아버지 마이클 가자니가(Michael S. Gazzaniga) 박사의 말에 공감이 갑니다. 그의 말처럼 인간의 행동과 생각, 마음의 중심에는 "뇌"가 있기 때문입니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감각을 처리하면서 감각지도가 형성됩니다. 이것을 기반으로 신체운동, 인지운동, 감정조절, 고차원적인 지능에 대한 뇌지도(Brain map)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 감각정보처리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타고난 것이든, 후천적으로 습득된 것이든간에 뇌지도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결국 감각지도를 기반으로 형성되는 Brain map이 왜곡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을 통해 발생하는 감각정보처리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뇌와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일찍 발달하는 것과 가장 늦게 발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빨리 발달하는 것은 촉각입니다. 촉각은 임신 10주차 태아시절부터 작동해서 임신 4개월에 손가락, 입술 감각이 발달해서 5개월에 이르면 손가락을 입으로 빨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촉각이 태아초기부터 발달하는 동안 임신 3개월에 외이, 중이, 내이가 생성되며 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해서 6개월에 이르면 청각기관이 완전 형성됩니다. 그래서 태아가 외부의 소리에 반응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각 중에 가장 늦게 발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 시각입니다. 시각은 인간이 지각할 때 무려 80%를 의존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감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닌 감각 중 가장 늦게 형성되고 발달하는 감각입니다.


인간은 출생한 뒤 2주에 이르면 겨우 명암을 구분하고, 불과 20cm 앞 사물을 구분가능합니다. 생후 1개월에도 모양과 색의 완전한 구분이 어렵습니다. 생후 4-8개월에 색상 구별이 가능해 지고, 11개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어른수준의 시각을 지니게 됩니다.


앞서 인간이 인지할 때 무려 80%를 의존하는 것이 시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시대는 시각, 다시 말해 ‘본다는 것’으로 더더욱 특정 지워진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삐에르 바뱅(pierre babin)의 저서 <시청각 인간(audio-visual man)>에서는 이와 같은 흐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책과 칠판으로 교육을 하였다. 오늘은 텔레비전과 컴퓨터로 교육을 한다. 어제는 글씨와 말로써 의사소통을 하였다. 오늘은 화면을 보면서 말하는 시대다. 어제는 동네의 작은 학교가 배움의 터였다. 오늘은 안방에서 우주중계로 세계를 보고 배우고 있다. 어제는 편지와 전화로 소식을 전하였다. 오늘은 비디오폰으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바뱅의 글은 인간의 인지부분이 얼마나 급진적으로 시각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말대로 오늘의 인간은 시각적 인간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시각을 통해 통해 인격과 성격까지도 형성해 갑니다. 어쩌면 창조론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 수많은 영장류 중에서 탁월한 ‘호모 사피엔스’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사물들을 대충 보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시각능력 때문이었을 겁니다.





2. 보지 못하겠고 … 보리라


오늘 본문 말씀은 인간의 인지감각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시각부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곧 닥칠 환난과 핍박에 대한 예고로 요16장을 시작하셨던 예수님은 환난과 핍박의 시대를 견뎌가고 이겨나갈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요 16:4입니다.

  •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주님이 말씀하신 방법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을 국어사전은 ‘과거의 사물에 대한 것이나 지식 따위를 머릿속에 새겨 두어 보존하거나 되살려 생각해 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감각을 통해 인지한 것은 단기기억 속에 담깁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류를 통해 장기기억장치에 넣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다시 되새깁니다. 일명 ‘주님의 말씀, 주님과의 경험 등을 되새김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지과정과 되새김질을 경험한 사도 요한은 훗날 요일 1:1을 통해 그 경험을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듣고, 보고, 자세히 보고, 또 만져봤던 경험을 통해 저장됩니다. 이미지와 감각과 향기를 빨아들여 모아서 따로 추려 놓았다가 후에 그것들을 분류하고 각각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생각이라는 방법을 통해 다시 인지의 수면 위로 호출됩니다. 이렇게 호출된 주님의 말씀이 환난과 핍박의 시대에서도 견뎌가고 이겨가게 합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존재토록 독려하고 격려합니다.


이 인지과정을 돕기 위해, 구체적으로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주님을 대신해 보냄을 받은 분이 보혜사 성령님입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오셔서 주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생각나게 하며, 장래 일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요 16:13). 그분은 단순히 공지하시는 메신저가 아닙니다. 롬 8:26의 증거와 같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느끼고 인지하는 것처럼 성령님도 우리의 애통하고, 울부짖고, 고통하는 것을 듣고, 느끼고, 아파하시며 공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일찌기 애굽에서 고통하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귀로 직접 들으며, 그들의 고생을 눈으로 직접 보고 아파하신 하나님 말입니다.


주님을 대신할 성령님에 대한 예언을 들으며 제자들은 곧 있을지도 모를 예수님의 부재에 대해 불안했고, 염려했습니다. 그것은 16절의 말씀이 그런 반응의 방점을 찍게 했습니다. 요 16:16입니다.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이란 말씀은 ‘잠시 후에’라는 뜻이고, ‘또 조금 있으면’이란 말씀은 ‘십자가 이후 부활’을 의미합니다. 곧 있을 주님의 부재, 다시 말해 제자들의 시각으로부터 주님이 사라지는 때를 말씀하신 겁니다. 감각의 80%를 차지했던 시각의 부분이 더이상 인지와 지각에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음을 말씀하신 겁니다.


이어지는 17절 - 18절에는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고, 조금 있으면 보리라’는 의미에 대해 제자들 상호간에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감각이 더이상 일하지 못할 때를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선 과거의 인지방식을 넘어서야 했습니다. 이 부분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감각으로 인식했던 모든 세계(알)를 깨고 나오듯이, 새로운 자신, 더 나은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선 기존 인식체계의 틀을 유기해야 합니다.


한 스승이 무화과 열매를 가져와서 학생에게 그 중 하나를 갈라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학생은 “수많은 씨가 보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조그만 씨 하나를 다시 열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너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느냐?” …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스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이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자라났다.”


이것을 두고 철학자들은 ‘없음이 있음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없음이 있음의 원천이 아니라, 볼 수 없음이 있음의 원천’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세계를 깨고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보이지 않음 속에서 볼 수 있음이 필요합니다. 이전에 근무했던 학교 이사장되는 분이 반복해서 하시던 말씀 중에 매우 공감되던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3가지 눈을 갖고 살아갑니다. 육안, 심안, 그리고 영안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눈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안 하나 만으로 감각하고, 인지하고 지각합니다. 예술가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심안을 가지고 현상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표현해 갑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떻습니까? 육안, 심안에다 영안을 더해 인지하고 지각하는 사람입니다. 육안과 심안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에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영안을 열어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과정을 고통의 과정을 거쳐 기쁨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여인이 해산하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해산 이후엔 가슴에 안은 생명으로 인해 근심이 사라지듯 제자들 속에도 근심이 사라질 것이며, 가득한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기억하며, 육안, 심안이라는 감각 속에서 주님이 사라지는 그때에도 영안으로 바라보며 견뎌가라 권하셨습니다.





3.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영안을 열어 세상을 바라보고, 시대를 지켜봤던 사람들을 들라면 구약시대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국운이 다하고, 풍전등화와 같은 암울했던 시대 앞에서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짧게나마 대표적인 두 선지자를 살펴보려 합니다. 그중 한 사람은 예레미야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아모스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왕국 역사에서 가장 극심한 격동기 40년 동안 활동한 남 유다의 예언자입니다. 그는 요시야 왕 13년(BC 627)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BC 586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이후까지 활동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고대 근동 전체가 격변기에 들어선 때였습니다. 200여년 동안 근동지역을 장악했던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BC 612년에 마침내 바벨론(바빌로니아)에게 함락되었습니다.


애굽(이집트)은 힘을 쓰지 못했고,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은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습니다. 그 틈을 타 약소국으로서 앗시리아의 속국이었던 유다는 짧은 기간 동안 독립을 주장했지만, 결국 바벨론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유다의 멸망, 바벨론 유수와 70년 후의 회복 등을 예언한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아모스는 유다 제 10대 왕인 웃시야와 이스라엘 제13대 왕인 여로보암 2세가 치리하던 시기(BC 760 - BC 753)에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시대는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앗시리아가 아람(수리아)의 다메섹을 함락시킴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잠시 평화가 도래하고 끊질겼던 아람의 위협에서 잠시 벗어났던 때입니다.


그때 북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위축된 탓에 기를 펴고 살면서 상업으로 축적한 부를 자랑하며 가난한 동족을 괴롭히는 불의를 자행하며, 자만과 향락 속에 빠져 안일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았기에 아무 일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환상을 갖고 자기식의 예배행위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눈 앞의 보이는 현상에 전도되어 그 뒤에 따라올 미래의 환난을 생각지도 못했던 미련하고 태평한 사람들에게 아모스는 무서울 정도로 엄하고 가혹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남 유다 사람이었지만, 북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사마리아와 벧엘로 가서 신변의 위협과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을 선포하며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아모스는 활동시대 뿐 아니라, 예언의 대상도 차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뚜렷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선지자 모두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과 하나님께 동일한 질문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질문은 다름아닌 “네가 무엇을 보느냐?(렘 1:11, 렘 1:13, 렘 24:3, 암 7:8, 암 8:2)”라는 하나님의 물음이었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하나님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사는가?”라는 물음으로 다가 옵니다. 선지자들은 좋은 것, 희망이 되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암울한 일들, 슬픈 것들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보았던 것을 토대로 조국을 향해, 동포를 향해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경고의 외침은 차마 피하고 싶던 일이기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은 외쳐야 합니다. 깨어 있기에 소리쳐야 합니다. 온 세상이 혼곤히 잠든 밤 어둠을 지키며 새벽을 깨우는 누군가 있어야 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밤에>라는 시를 통해 그가 누구여야할지 이렇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밤에 흠뻑 잠겨. 이따금 골똘히 생각하기 위하여 고개를 떨구듯 그렇게 흠뻑 밤에 잠겨 있음. 사방에는 사람들이 잠자고 있다. 그들이 집 안에서, 탄탄한 침대 속에서, 탄탄한 지붕 아래서, 요 위에서 몸을 쭉 뻗치거나 오그린 채, 홑청 속에서, 이불 밑에서 잠자고 있다는 조그만 연극 놀음, 순진무구한 자기기만. 사실은 그들이 언젠가 그때처럼 그리고 후일 황야에서처럼 함께 있는 것이다, 벌판의 막사, 헤아릴 수 없는 수효의 사람들, 하나의 큰 무리, 한 민족이 차가운 하늘 밑 차가운 땅 위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이전에 서 있었던 곳에 이마는 팔에 박고 얼굴은 땅바닥을 향한 채 조용히 숨쉬며. 그런데 네가 깨어 있구나, 파수꾼이구나,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찾자고 곁의 섶나무더미에서 꺼낸 불타고 있는 장작을 휘두르는구나. 왜 너는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




4.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카프카가 말한 그 한 사람이 예레미야였고, 아모스였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깨어있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깨어있는 그 한 사람은 누구여야 할까요? 또한 그 사람은 어떤 것을 지켜보는 사람이어야 할까요?


예레미야가 보았던 환상 중에 ‘좋은 무화과, 나쁜 무화과’(예레미야 24:1-10)가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포로로 끌려가지 않는 것이 훨씬 좋아보이는데도 하나님은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포로로 끌려 가는 것이 훨씬 불행한 일인데도 하나님은 그것이 좋은 무화과가 되는 과정이라 하셨습니다.


인생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사는 삶에 길흉화복의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100% 좋은 일 없고, 100% 불행한 일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그 아픔이, 그 환난이 비록 고통이었지만, 오히려 그 슬픔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100% 안좋은 일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비록 타인의 권력에, 타국의 겁박과 침탈에 휘둘리는 상황이지만 그를 통해 좋은 무화과로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마냥 슬피 앉아있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후반부인 요 16:20-24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재를 들으며 불안해 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그 속에 감춰진 기쁨, 세상이 뺏을 수 없는 기쁨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짧은 5절 속에 6번이나 반복해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존재여야 합니다. 혼곤히 잠든 시대 속에서 깨어 지켜보는 파수꾼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일지라도 그 속에서 소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선지자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 시대에 줄 수 있는 소망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레미야는 망해가는 유다를 향해 70년이 지나면 풀려나 이 땅으로 돌아 올 것이란 예언이었습니다. 현실은 암울했고, 그 결과마저 비참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며,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그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의 환상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히 12:2은 무거운 눈꺼풀을 달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할 수 있을까요? 눈 앞에 펼쳐진 현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분별하고, 판단하며 인생의 걸음을 걷고 있습니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찾고자 불타는 장작을 휘두르며 불을 비추는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지요?


보지 못했기에 무지했고, 눈을 감았기에 외면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부르심에 무책임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 슬픔 속에, 아픔 속에 미래의 소망이 있는데도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기에 불평했고, 수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그 안에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우리가 육안과 심안 만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영안을 열어 감춰진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이게 하옵소서. 모두가 혼곤히 잠든 시대 속에서도 깨어지키는 사람이게 하셔서 우리로 인해 동시대의 사람들이 꿈을 꾸게 하시고, 소망을 노래케 하옵소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회 23회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logo_color.png

©2019 by 움오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