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7.07 움오름 주일 설교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2"(요 16:7-15)

2019년 7월 8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7~15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설교문

1. 기생인간


지난 주중에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본 분이 관람 소회를 전했습니다. 기분전환하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갔다가 완전히 마음 찝찝하게 나왔다며 ‘비추’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 이 분은 영화의 메시지가 아주 심플했다며 좋아했습니다. 매우 대조적인 반응이기에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물었습니다.


대답인즉, 다양한 사업을 하다 망한 후 백수가 된 기택(송강호)집안의 장남이 가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박사장(이선균)네 과외선생이 됩니다. 그 후 여동생을 주인집 아들 그림 선생으로, 아버지를 운전기사로, 어머니를 가정부로 한명, 한명씩 끌어들입니다. 이른바 숙주에 하나씩 점점 더 기생해 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우발적 살인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기생하는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는 영화가 기생충이라는 겁니다.


‘기생’한다는 것은 자신을 먹여살릴 적당한 숙주를 찾아 붙어 사는 것입니다. 숙주의 영양분을 뺏어가는 다른 균이 침입하면 때론 싸우기도 하지만, 숙주가 자신에게 유익하지 못하면 숙주를 죽이고 다른 숙주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바로 기생충(parasite)이라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결코 기생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람이 남을 헤하고, 이용하며 살아가는 기생적 존재로 산다면, 사람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 이 세상의 사람치고 처음부터 누군가에 기생하는 존재로 살려고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서로 의지하고, 서로 힘을 주는 존재가 아닌 일방적으로 타인을 이용하고 붙어사는 존재로 살아가는 걸까요?


어쩌다가 사람이 이처럼 왜곡되게 존재하고, 오염되게 살아가는 걸까요? 어쩌면, 인간 속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욕심 때문아닐까요? 인간 속에 침잠되어 있는 그 욕심을 휘집어 올려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광란케 만드는 죄 때문 아닐까요?


황금손 미다스 왕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매우 탐욕스러웠던 미다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소유했음에도 더 많은 부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박카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손에 닿는 것마다 모두 황금으로 변하니 도무지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기겁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금 조각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미다스 왕은 오열하며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여전히 ‘미다스의 손’에 대한 찬사를 아까지 않으며, 그 능력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미다스 왕처럼 우리의 품은 욕심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죄에 충동당한 욕심은 타인과의 공생을 거부한 채 이용만 추구하는 또 다른 기생의 길을 선택케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타인 뿐 아니라, 자신 역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욕심과 죄와 사망의 연결고리를 끊으라며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말씀에 딱 들어맞는 예가 다윗입니다. 어느날 다윗 속에 통제할 수 없는 욕심이 꿈틀 거렸습니다. 남이야 죽든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신의 욕망만 채우면 된다는 기생충의 심리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죄에 사로 잡혔던 다윗의 욕망은 결국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범했을 뿐 아니라, 전사를 가장한 청부살인을 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타인의 권리를 짓밟고, 타인을 이용함으로 자신이 더 행복해 지고, 더 만족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상대를 숙주로 여기는 한 상대의 죽음과 파멸은 곧 자신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뒤늦게야 절감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 시편 51:10 새번역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다윗의 이 기도는 자신 안에 정한 마음과 견고한 심령을 스스로 새롭게 할 근거와 가능성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자신을 내어 맡기는 항복이요, 위탁의 선언이었습니다.





2.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자신의 존재를 변화시킬 주체로 다윗이 간구했던 하나님의 영을 예수님은 보혜사, 또는 진리의 성령님이라 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그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2가지 역할을 구체적으로 하셔서 내면을 새롭게 해 가실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13절입니다.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2주 전 주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진리의 성령님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때 진리란? 엇나간 조준, 그 죄의 속박을 깨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질주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 위에 서도록 견인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의 촛점을 하나님께 맞추어 가는 사람. 타인을 이용하고, 해하기까지 하던 자신이 변화되도록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어놓는 사람. 바로 그와같은 사람입니다.


둘째, 진리의 성령님은 장래 일을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 무지와 무능이라는 2가지 무(無)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과거는 후회와 아픔으로 점철 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실수와 오류의 연속입니다. 미래는 어떻습니까? 그 미래는 과거와 현재에 바탕해 생각하기에 불안으로 덧칠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안한 미래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 창고를 짓고 쌓아두기에 바쁩니다. 주위의 아픔을 돌아보며 보듬고 갈 여력도, 여유도 없습니다. 기생은 아니더라도, 자기와 자기 품 안의 테두리를 넘지 못합니다.


지난 6월 초 주역 관련 이야기가 몇일 동안 일간지를 장식했습니다. 이유인즉, 주역의 대가로 지칭되는 대산 김석진 옹이 지난 3월 교통사고를 계기로 평생 살아온 대전을 떠나 서울로 이주해 대중을 만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주역에 대해 관심없었지만, 일부러 유투브를 통해 김석진 옹의 강의를 시청해 보았습니다. 2시간여의 강의는 이렇게 열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살고 있습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미래입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오는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 미래를 예측가능합니다. 일기예보를 하듯이 미래 오는 일을 미리 알고 그걸 발표도 하고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나중에 실현되는 것 아닙니까? 미래라는 것은 생활역학입니다. 여기에는 밤이 낮으로 바뀌고, 음이 양으로 바뀌는 이치 속에서 변해서 미래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학으로서 미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김석진 옹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연관성에 대해 말하며 미래를 예측가능하다며 주역을 풀어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역은 한 마디로 ‘미래예측학’이다며, 미래를 내다보고 미리 대처하기 위함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평생을 주역과 함께 살아온 그이지만 '주역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 어느 쪽이 나은가'란 질문에 주저 없이 "모르고 사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미래를 알수록 걱정도 많아지기 때문이라면서, 당신의 자식들(3남1녀)에겐 주역을 안 가르쳤다고 합니다.




3. 속수무책인 미래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주역을 배운다고 하면서도, 미래를 알면 걱정이 더 많아지기에 자식들에겐 주역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 한편으로는 모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사뭇 이해가 됩니다. 미래에 대해 무지하지만, 설혹 일부 안다 할지라도 그 미래의 일을 대처하고 해결해 갈 능력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일명 ‘속수무책’입니다.


김경후 시인은 그와 같은 인간의 무능함과 어쩔 수 없음을 그의 시 ‘속수무책’에 다음과 같이 희화화 했습니다.

내 인생 단 한 권의 책

속수무책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척하고 내밀어 펼쳐줄 책

썩어 허물어진 먹구름 삽화로 뒤덮여도

진흙 참호 속

묵주로 목을 맨 소년 병사의 기도문만 적혀 있어도

단 한 권

속수무책을 나는 읽는다

찌그러진 양철시계엔

바늘 대신

나의 시간, 다 타들어간 꽁초들

언제나 재로 만든 구두를 신고 나는 바다절벽에 가지

대체 무슨 대책을 세우며 사냐 묻는다면

독서중입니다, 속수무책


사람은 이렇게 일어나는 일들 앞에서 속수무책인 존재입니다. 주역 대가의 말을 빌려 정리해 보자면, 인간에게 미래란 알아도 문제, 몰라도 문제로 남는 영역인 셈입니다(*자식에게 알려주지 않은 걸 보면, 알면 더 문제되는 것!). 그렇다면, 성경은 미래와 사람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있을까요? 전 8:7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사람이 아무리 장래 일을 알려해도 가르칠 자(사람)가 없어서 모른다는 것이 첫째 관점입니다. 그런데, 대상 17:17에서 다윗은 장래 일을 들어 알았다며 상반된 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다윗은 장래를 알았습니다. 알려 주는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다윗과 그의 집안의 장래에 대해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 장래의 일이란? 다윗과 그의 집안이 이스라엘의 목자, 다시 말해 왕가를 이룰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삼하 5:1-5은 다윗이 마침내 사무엘을 통해 전해들었던 하나님의 예언이 실현이 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고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왕 통치시절 사무엘로부터 비밀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은 곧바로 왕에 즉위하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의 수없는 모함과 고초를 겪으며 광야에서 동가식 서가숙하며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때론 살기 위해 블레셋에 망명하여 미친척 연기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나이 30살에 왕으로 즉위했을 때는 12지파 중에 겨우 자신의 출신지파인 유다만 지지해서 왕이 되었습니다. 단 1지파의 왕으로서 7년 6개월을 보냈습니다. 약속(예언)과 성취의 간극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런데 이 긴 시간을 다윗은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 예언에 합당한 사람으로 자신을 깎아가고 다음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열해 놓으신 광야가 그를 다듬어 가게 했고, 7년 6개월 동안 11개 지파의 외면과 배척이 그를 진정한, 그리고 겸허한 왕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4. 꿈을 꾸며, 이상을 볼 것이며


그런데, 다윗이 이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고, 어떻게 버텨냈고, 어떻게 자신을 다음어 갔겠습니까? 그에게 말씀해 주신 장래의 그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길의 빛이 되고 이정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장래를 보게 하고, 꿈을 꾸게 합니다. 그 결과 길을 잃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욜 2:28입니다.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성령님을 체험한 어린 자녀들이 예언합니다. 그 예언은 점을 치듯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길 없고, 길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길을 찾아가게 하는 비전입니다. 한 사회와 공동체가 함께 바라보고 나아갈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표류하지 않게 하고, 방황하지 않게 하고, 방자히 행하지 않도록 붙들어 줍니다.


청년들은 이상을 봅니다. 이상은 비전입니다. 한 사회 속에서 청년들이 내일의 비전으로 사회를 밝게 그려갑니다. 그때 나이든 전 세대가 꿈을 꾸게 됩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하고 주저앉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함께 그려가고,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가 함께 손 잡고 걸어가게 합니다. 이걸 누가 하신다고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거북한 세대 속에서 거룩한 뜻을 품고 일구어 가게 하십니다.


몇달 전 이제 갓 30대에 접어든 청년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세대에게 ‘꿈’이라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고문입니다. 얼마나 삶이 고되었으면, 얼마나 지쳤으면 ‘꿈은 고문이다’라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우리의 역사를 보십시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무론하고 청년들이 살기에 쉬웠던 때가 있었습니까? 편했던 때가 있었습니까? 만화 <광수생각>으로 우리를 웃게 하고, 때로 생각케 했던 박광수씨가 『살면서 쉬웠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물려줘서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고 또 어떤 염병할 놈들은 짐짓 슬픈 눈으로 젊은이들에게 되지도 않는 위로를 건네곤 하지만, 짱구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위로인지 놀리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중략)지금보다도 더 살기 어려운 그 어떤 시대에도 잘 살아 내던 사람들은 늘 존재했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어렵다고 이제 그만 징징대기를 바란다. 진짜 치열했던 사람들은 아픈 것, 힘든 것, 어려운 것을 느낄 사이마저 없었다.(155쪽~157쪽)


강력한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주변 강대국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있다고 느끼는 서글픈 시대입니다. 일본의 경제보복조치와 중국의 노골적 차별, 이란 핵 관련 긴장 등 쉬운 것 하나 없습니다. 청년실업을 비롯해 실업자는 늘어나는 것 같고, 만나는 이들마다 경기가 이처럼 어려웠던 적은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암울한 시대를 탓하고, 그렇게 만드는 주변국들을 원망하며 우리의 시간을 소진해 가야 할까요? … 아닙니다!!! 이 땅의 자녀들이 눈 앞의 현실에 고정해 있던 시선을 들어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이상을 보며 내일을 준비토록 도와야 합니다. 다시 또 ‘꿈 고문’이냐고 자조할 지 모르나, 그들이 이 시대와 사회가 나아갈 길을 예언토록 해야 합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그들의 손을 맞잡고 꿈을 꾸며 함께 내일을 그려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기생’이 이 시대의 가장 안전하고도 살아갈 생존방법이다고 인식되는 사회 속에서 다른 방법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세워주고, 서로 살려주는 생명의 역사, 그 꿈을 일구어 갈 수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포스터를 봤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눈이 흰색과 검은색 띠로 가려져 있습니다. 집주인 박사장 부부(이선균, 조여정)은 흰색 띠, 기생하는 기택네 가족 (송강호 가족)은 검은색 띠로 눈이 가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이 두 집단이 구분된 계급이라는 점은 확실히 보여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영혼을 가리고 산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눈을 일컬어선 ‘영혼의 창’이라고 합니다. 창을 통해 밖과 안을 보듯이, 눈이라는 창을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눈은 하늘을 보고, 옆의 사람을 보는 영혼의 창입니다. 그런데, 그 눈을 가렸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영혼을 가리고 동물적으로만 살아간다는 겁니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사회, 기생사회를 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런 사회 속에서도 우리 눈을 뜨게 하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선 가려진 우리 눈을 열게 하십니다. 아무리 기생이 가장 안전한 생존법이라고, 그것이 대세라고 할지라도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현실에 갇힌 우리 눈을 들어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꿈 꾸게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과거에 아파하고, 현재에 묶여있는 우리에게 장래 일을 알려 주십니다. 내일을 보며 오늘 꿈꾸게 하십니다. 이제 이 성령님과 함께 꿈꾸며, 춤추며, 노래하며 남은인생 신나게 살아보지 않으시렵니까?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 성령님~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일해 주옵소서. 눅눅하고 울울한 이 시대에 고착된 자녀들의 눈을 열어주옵소서.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의 눈을 열어 주심과 같이 우리 눈을 환히 열어 주셔서.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암울하고 어두운 현실 너머에서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옵소서.


나이든 우리들이 꿈을 꾸게 하옵소서. ‘이 나이에 무얼…’이라며 안정만을 추구하며 앉아있는 우리 다리에 힘을 주옵소서. 속수무책이라고 자조하는 젊은 세대 속에 꿈의 씨앗을 심고, 내일을 노래케 하는 사람으로 존재케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각자도생, 나아가 기생이 안전대책이라고 인식하는 시대의 가려진 눈들이 벗겨져 하늘을 보게 하시고, 서로가 손잡고 일구어가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져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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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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