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6.30 움오름 주일 설교 - "다시 길을 떠나"(창 35:16-29)

2019년 7월 4일 업데이트됨





창세기 35:16~29

16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설교문

야곱의 생애 중 극적인 절정은 어떤 장면이냐고 만약 질문한다면 저는 얍복나루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허벅지 관절이 무너져 내린 장면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일로 인해 야곱은 찬탈자, 속이는 자라는 ‘야곱’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그만큼 그 장면은 극적인 반전과 함께 야곱을 깊은 존재론적 변화로 이끕니다. 뒤에는 외삼촌 라반, 앞에는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버티고 있어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속에 홀로 남아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씨름을 걸어오시고, 마침내 힘을 쓸 수 있는 중심이 무너져 하나님께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야곱의 모습은 그 어떤 영화의 장면보다 더 극적입니다.


간밤의 씨름이 끝나고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를 때 허벅지관절이 위골되어 절뚝거리며 눈물과 흙먼지가 뒤범벅되어 형 ‘에서’를 만나러 가는 야곱.. 그날 아침의 태양은 이전에 떠올랐던 태양이 아니라 ‘브니엘’ 즉 하나님 얼굴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 탄생한 자리는 야곱의 능력이 증명되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중심이 무너진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는 힘의 증폭으로 강해지는 외적인 성장이 아니라 힘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내적인 성장을 이루는 신앙을 생각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한 야곱은 형 ‘에서’와 감격적인 해후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에서’와 헤어진 후 ‘숙곳’과 ‘세겜’으로 옮겨 상당 기간 머뭅니다. 야곱 여정의 목적지는 아버지 이삭이 거주하고 있는 헤브론이었지만, 이렇게 중도에 머물렀던 이유는 아마도 20여년에 걸친 밧단아람 외삼촌 집에서의 고단했던 삶을 쉬고 재충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또 천사와 씨름할 때 위골된 허벅지 관절로 인해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겜’에 머물 때 세겜의 젊은 추장에게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맙니다. 추장은 ‘디나’와 결혼하겠다고 간청을 하였지만 복수심으로 가득 찬 야곱의 아들들은 거짓말로 속여 원주민들을 할례를 행하게 하게하고, 할례의 상처가 아물기 전 고통이 가장 심할 때 그들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노략합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두 민족 사이에는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증폭하였고, 이로 인해 야곱의 가족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멸족을 당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한 복판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로 올라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 창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위기의 순간이 찾아 왔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은 우왕좌왕한 발걸음을 멈추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초심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그 일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연약했던 그 때, 광야 한복판에서 홀로 차가운 돌베개를 베고 광야의 추위와 이슬을 피해 웅크려 두려움에 떨었던 그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인도하셨는지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다시 새롭게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말씀은 내려갔던 신앙, 주저앉아 있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야곱은 가족들을 모아 놓고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인생길에 함께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집안에 스며있었던 이방 우상을 숭배하는 잔재를 깨끗하게 하는 정결운동을 단행합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2-3)


‘벧엘’에 이른 야곱은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이름 합니다. <엘벧엘> 즉 <벧엘의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환난 날에 응답하시며 함께하신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신앙’은 대부분 우리에게 역설로 제시되고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오해되고 오용되기도 하며 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을 낙담케 하거나 스스로의 걸음에 의문을 가지게 하기도 합니다. 야곱 생애에서 가장 충만했던 때는 큰 부를 축적했던 라반의 집에서가 아니라 홀로 남아 하나님을 대면한 자리인 얍복나루터 였습니다. ‘비운다, 몽땅 털어버린다. 쏟아버린다.’라는 뜻의 ‘얍복’이란 말처럼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그의 능력이 증명되는 현장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능력이 철저히 무너지는 곳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벧엘>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은 생애 최 정점 최고를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장소가 아니라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누추한 광야 한복판 돌베개를 베고 누운 곳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당신 자신을 승리와 누림과 영광의 순간에 칭송되고 찬양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함께하시는 <엘벧엘> 곧 <벧엘의 하나님>으로 인정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엘벧엘'의 사건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야곱이 이스라엘로 재탄생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번성할 것이며 왕들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올 것이라는 언약을 재확증 해 주십니다.


  • 창세기 35:10-12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야곱, 언약의 재확증을 받은 야곱은 잠시 멈추었던 순례의 여정을 다시 시작합니다. 여정의 목적지인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16절)


야곱에게 있어서 <엘벧엘의 새로운 출발>은 이 후 그의 후반의 인생이 어떻게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인가를 충분히 기대하게 합니다. 대적들의 위협이 사라졌습니다. 멸족의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한동안 나태했을 법한 신앙의 긴장도 다잡았고, 희미해졌던 초심도 새롭게 갱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벧엘'로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후반부의 삶의 여정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엘벧엘 이후 새로운 갱신으로 시작했던 야곱의 여정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야곱이 예루살렘 남쪽 8km지점에 위치한 ‘에브랏’ 즉 ‘베들레헴’에 다 달았을 때에 ‘라헬’이 산통을 시작합니다. 산고의 고통은 너무나 컸고, 결국 라헬은 아들을 출산하면서 죽고 맙니다. 야곱은 라헬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무려 14년을 외삼촌을 위해 일할 정도였습니다.


‘라헬’은 죽어가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이라고 지었습니다. 나중에 야곱은 그 아들의 이름을 ‘오른손의 아들’이란 의미의 ‘베냐민’으로 바꿉니다. 아마 엄마 잃은 그 막내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를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가에 묻고 비석을 세웁니다. 라헬을 잃은 야곱의 마음의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야곱의 반응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 없이 아내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그의 행동은 마치 슬픔을 속으로 삼켜 깊은 속울음의 통곡을 말하는 듯하여 더욱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베들레헴 어느 길가에 아내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후 야곱은 다시 길을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 창세기 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그런데 얼마 뒤 이번에는 장자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동침하는 폐륜을 저지릅니다. 야곱은 ‘르우벤’의 패륜을 전해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지 야곱이 “이를 들었더라”(22절)라고만 기록하고 더 이상 아무런 언급을 남기지 않습니다. ‘이를 들었더라’는 성경의 행간에서 오히려 더 깊은 상처 입은 야곱의 절규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야곱은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기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가슴속에 묻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아버지가 있는 집 ‘헤브론’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영적 갱신과 하나님의 응답 그리고 은혜가 임하면 우리는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엘벧엘'에서의 은혜와 언약의 재확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대는 그의 삶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롭게 시작한 그의 삶은 출발부터 슬픔과 아픔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속에서 우리는 '길 떠남'의 묵묵한 야곱의 걸음을 봅니다. 이전 같으면 뭔가 잔꾀를 내고, 방법을 찾아 묘수를 두려고 분주했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과 고통을 가슴에 묻은 채 묵묵히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납니다. 묵묵히 자신의 앞에 주어진 순례의 여정을 걸어갈 뿐입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자신의 중심에 두는 삶을 배웠고 또 더 익숙하게 배워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야곱의 묵묵한 걸음이 던지는 무게는 얍복나루에서의 극적인 절정과는 다른 더 깊고 숙연한 영혼의 무게를 느끼게 해줍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에서 화려한 언어가 빛을 잃고, 시선의 주목이 흩어지고, 찬사와 박수가 사라지고, 넘어짐과 연단이 삶 속에서 익숙해 질 때면 자신의 걸음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가던 길을 주저합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 또한 싸늘하게 변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삶에 일어났던 그러한 일들은 그것이 버림받음의 증거가 아니요, 실패가 아니라 우리를 큰바위 얼굴로 조각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브론’을 향해 '길을 떠나고(16)', '다시 길을 떠나(21)'는 야곱의 묵묵한 걸음은 오늘 영원의 길을 걷는 우리를 격려하며 요청합니다. 우리의 ‘영적 발돋움’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얼마 전 ‘아름다운 임종’이라는 페친의 SNS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종합병원 병실 안이다. 97세를 먹은 크리스천이 노안으로 입원을 해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 폐에 문제가 있어서 마지막 숨을 힘겹게 몰아쉬자 이를 지켜보는 가족들과 지인들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때 누군가가 찬송가 384장을 선창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3절까지 찬송가가 끝나자 평소에 크리스천이 즐겨 암송하고 좋아했던 시편 23편을 함께 암송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침대에 누워 있던 크리스천은 찬송가를 함께 따라 부르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편 23편을 암송할 때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약간의 손짓을 통해서 반응을 보인다. 시편 23편 암송이 끝나자 사랑하는 자녀들이 어머니 앞으로 다가와서 마지막 작별의 키스를 하고 “어머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시고 예수님 꼭 잡으세요. 천국에 가서 먼저 가신 아버지 만나세요”라고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마지막으로 “저와 제 남편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우리나라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 하겠습니다” 유언을 남기고 잠을 자듯이 눈을 감았다.“


지난 10일 별세하신 고 이희호 여사의 임종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사의 마지막 모습에는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하는 인권운동가의 모습도,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던 투사의 모습도, 권력의 끝자락인 영부인을 지냈던 권세도 없었고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었던 신앙인의 모습만 있었다고 하며 자신도 이러한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휘호 여사는 생전 당신의 간증을 <CCC편지>라는 잡지에 기고했는데 당신의 삶을 고난의 연속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는 살면서 여러 가지로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난과 크리스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듭된 정치적 역경을 겪으면서입니다. ... 성서적으로 고찰해 보면 우리들의 고난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직결되어 있으며, 고난이 죄의 대가만이 아닌, 오히려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하는 전주곡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의 죽음과 장사로 끝이 납니다. 시간이 지난 후 야곱도 자신의 아버지처럼 죽음으로 이 땅에서의 그의 생을 종결합니다. 그리고 이삭,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외 없이 죽음으로 이 땅에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헤브론’을 향해 슬픔과 고통, 고난과 역경을 끌어안고 묵묵히 <다시 길을 떠나는> 야곱의 걸음이 오늘 우리의 걸음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우리의 삶을 소진시키고 가로막고 짓누르는 고통과 난관이 이 땅에서 생명과 평화, 정의와 진리의 순례의 걸음을 멈추게 할 이유가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걸음이길 소망해 봅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순간 우리의 자녀들, 가까운 이들이 우리의 임종을 지키고 장사하는 그 마지막 시간, 온 생애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분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겼던 신앙인의 모습으로만 고요하고 평온하게 마지막 내어 뱉는 한 호흡까지도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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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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