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6.23 움오름 주일 설교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요 16:7-15)

2019년 6월 25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7~15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설교문

1. 책망과 진리의 성령님



  1. 책망하시는 성령님 지난시간 우리는 책망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성령님은 죄, 의, 심판이라는 3가지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성령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또 인간으로서 범하는 수만가지의 죄 중에서도 유독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해 책망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조준되지 않은 그 죄가 가장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책망하심으로써 하나님을 향해 우리 마음이 조준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성령님께서 의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것은 ‘의’,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람으로 오셨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준삼아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기준되시는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할수 있는 대로 우리 생각에 옳은 대로,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와는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부르시기 위해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의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던 이 세상의 왕들이 심판을 받았듯이, 우리 또한 심판(하나님의 결산의 날)이 있음을 기억케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의 평가를 바라며 이 땅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 믿음의 삶을 가능케 하기 위해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2. 진리의 성령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신 주님은 이어 1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부모님들이 하루 이틀 집을 비우시더라도 남아있는 자녀에게 하실 당부의 말씀이 많으실 겁니다. 하물며 불과 몇 시간 후면 영어의 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주님의 입장에선 얼마나 하실 말씀이 많았겠습니까? 제자들이 알아 듣던, 못 알아듣든지 간에 하실 말씀은 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주님은 요 16장을 끝으로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를 주님은 요 16:12을 통해 제자들이 감당치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감당하다’라는 동사 βαστάζω(바스타조)는 기본적으로 ‘들어올리다, 운반하다, 가지고 다니다’ 등의 뜻을 지닙니다. 여기서는 정신적인 부분에서 ‘견디다, 감당하다, 참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트럭이 자기 힘에 부치는 많은 짐을 적재하고 운행하면 필히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도로 곳곳마다 과적을 단속하는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선 짐을 지고 가는 인생은 반드시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감당케 하고, 질 수 없는 부분을 짐 지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가까운 이들에게 짐을 지우고 있습니까! 폭력을 행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수준을 알고 계셨고,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셨기에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사랑하는 이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12절 하반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지금은 감당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말씀은 이후엔 감당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지금은 감당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중엔 그것을 짊어지고, 견디고, 참을 수 있습니까? 주님은 그 이유를 13절에 이어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면 그것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실 성령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성령님을 ‘진리의 성령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에 앞서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란 무엇일까요? 요 8:32을 찾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가 무엇이길래 ‘진리’와 ‘자유’가 한 쌍을 이루는 걸까요?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현장에서 직접 들었던 유대인들도 이 부분이 이해가 잘 안되었던 것은 매한가지였나 봅니다. 그들은 '자유'라는 말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유'를 단순히 속박이 없는 상태로만 해석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음과 같이 따지며 되물었습니다. 요 8:33입니다 -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의 질책성 되물음에 예수님은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요한 8:34)”고 답하심으로써 묶여있다는 것의 뜻이 다른 사람에게 받는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넘어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압박인 죄의 압박이었습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심코 행하는 인간의 습관, 인간의 본성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그 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죄에 대해 진리는 어떤 역할과 작용을 하기에 그 죄에서 자유케 한다는 걸까요? 지난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죄는 잘못된 조준에 의해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눈여겨 볼 것은 율법, 성경(구약성경)이라고 번역된 토라(תּוֹרָה)의 어원 또한 ‘활을 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성경)는 과녁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질주하는 화살이라는 의미입니다. 토라라는 그 화살이 철저히 과녁되시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듯이, 그 말씀이 과녁을 향해 엇나가게 조준되어 있는 우리를 하나님을 향하게 합니다. 엇나간 조준, 그 죄의 속박을 깨고 하나님을 향해 질주하게 하는 진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은 곧 진리의 영이 되시어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위에 서도록 하십니다.




2.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진리의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하시는 가장 우선적인 그 일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13절 상반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과녁되시는 하나님께로 우리를 향하게 하시는 진리는 어떤 의미에서 명사이되 명사가 아닙니다. 우리를 이끄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동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는 그것을 살아내는 삶의 태도가 됩니다. 무언가를 새롭게 살아내기 위해선 생각과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을 살아냄으로써 바꾸고, 개혁하고, 변화한다는 것은 내적인 결심과 더불어 그 결심을 인내하며 지켜가려는 삶의 태도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래서 진리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갖는 마음가짐이 됩니다. 이 마음가짐에서 출발해 자신의 삶을 서서히 바꾸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들어서고,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 그것을 지키려 하는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개입해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 과정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당신을 진리라고 지칭하신 것(요 14:6)은 예수님도 온힘과 정성과 뜻을 다해 진리를 살아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라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커다란 나무가 되도록 몸부림치며 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해서 무지했던 빌라도 총독은 자신이 알고 있던 보편적인 진리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아는 진리란? ‘언제, 누구에게나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 또는 그 인식 내용’이었습니다. 이 통속화된 명사적 진리관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삶의 변화와 변혁을 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본디 진리란, 원석 속에 숨어 있는 고운 결을 힘겹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갈아내고, 다듬어 감으로써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진리의 결을 갈아내고 다듬어 가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삶이, 아니 주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동사로서 역사하는 진리가 되실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 또한 진리의 결을 갈아내고 다듬어 가도록 만드시는 동력이 되셨습니다.


진리를 살아내신, 진리이신 주님을 생각하다 보니 떠오르는 한 수필이 있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중학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만났던 작품인데, 몇몇 문장들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기억을 소환해 보시겠습니다.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1974년에 출판된 윤오영 선생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 중의 부분들이었습니다. 수필 속에서 노인은 무뚝뚝한 모습을 보이며 방망이를 깎습니다. 그것도 한나절의 시간을 보니며 겨우 한 벌을 만들어 냅니다. 손님의 채근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말없이 자기 일을 해갑니다. 한 벌을 완성한 후 굽은 허리를 펴고 무심히 동대문의 추녀를 바라봅니다. 마치 세속을 살아가면서도 전혀 세속스럽지 않은 모습입니다.


더디다고, 느리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누가 핀잔을 주더라도 감내하며,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간에 상관없이 묵묵히 심혈을 기울여 갑니다. 그렇게 방망이를 깎아가는 그 어른처럼 어쩌면 신앙생활이라는 과정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만져 가시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 우리를 깎아가고, 다듬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구요. 비록 깎고, 자르고, 문지르는 과정이 아프고 쓰릴지라도 끝내 겪어가고 포기하지 않음으로 마침내 이루어가는 그 과정 말입니다.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 속엔 숙지황을 예를 들며 어떤 맘으로 생의 일상 앞에 서야 할지를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습니다.


약재만 해도 그렇다. 옛날에는 숙지황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온 정성을 다해 공예품을 만들었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 같은 제품이 아니라, 한땀, 한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내는 예술작품처럼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물론 이 과정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애씀과 노력도 당연 필요로 합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최선과 인간의 최선이 만나 이루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3. 어긋남에서 어울림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디로, 또한 어떤 모습으로 깎여가고, 다듬어 가야 하는 것일까요?


인도 첸나이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아주 훌륭하게 섬겨오던 동기가 안식년을 맞아 북미를 방문 중입니다. 때마침 영적허기를 달래기 위해 한 사내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그 사내는 수많은 사람들이 묻힌 공동묘지 한 구석에 아주 평범하다 못해 수수한 모습으로 있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안내가 없으면 쉽게 찾을수 없는 공동묘지 구석에 그렇게 묻혀 있었습니다.


그의 무덤가 낡은 벤치엔 그가 섬기고, 함께 살았던 장애우들이 그려넣은 비뚤비뚤한 그림들이 그를 추모하고 있었습니다. 세상 교회는 더 화려한 이력을 가진 목회자를 찾고, 목회자들은 더 영광스런 조건을 가진 교회를 살피는 시대가 되었지만, 공동묘지 한켠에 육신을 누인 그처럼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사랑과 헌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헨리 나우웬, 그가 남긴 책 중에 어떤 방향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가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영적 발돋움」이 바로 그 책입니다. 「영적 발돋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과 더불어 3가지 영역에서의 발돋움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아를 향한 발돋움, 동료 인간을 향한 발돋움,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입니다.


자아를 향한 발돋움이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의 발돋움을 말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집요하게 비집고 들어오는 본질적인 외로움을 ‘자발적인 외로움’,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을 생산성 있는 고독으로 바꾸어 가는 움직임이야말로 모든 영적인 삶의 시작이라고 그는 역설합니다.


‘동료 인간을 향한 발돋움’이란?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의 발돋움’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공포를 조장하며 자신을 방어하려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로 점점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서로 이어주고 평안의 공동체를 이루게 해야 할 교회가 정신적인 전투장으로 전락했습니다. 극우와 혐오의 발원지가 되어 있습니다.


환대란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들에게 내어주는 곳입니다. 낯선 사람들을 우리 삶 속으로 맞아들인다는 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입니다. 남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환대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낯선 사람은커녕 함께 거주하며 살지 않는 가족들조차도 내 집에 맞아들이고 기꺼이 문을 열고 환대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개인주의가 대세인 오늘날에는 타인의 방문은 곧 침해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방을 향한 발돋움을 위해서는 두 가지 형태의 가난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생각의 가난과 마음의 가난이 그것입니다. 사상과 개념과 견해와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은 환대의 주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생각의 가난이란 우리가 인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마음의 가난이란 선입견과 걱정, 시기심이 비워진 상태입니다. 따뜻한 환대는 배타적이지 않고, 포용하며, 다채로운 인간 경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은 ‘환상에서 기도’에로의 발돋움입니다. 환상에서 기도로 향하는 발돋움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향하는 발돋움과 또 적대감에서 따뜻한 환대로 향하는 발돋움을 뒷받침하고, 그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며 또 우리를 영적인 삶의 핵심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발돋움으로써의 기도를 말하면서 나우웬은 동방정교회의 ἡσυχία(헤시카주의, Hesychasm)자들의 묵상기도에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기도에 대한 세 가지 규율”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읽는 것,

둘째, 하나님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

셋째, 신뢰하는 마음으로 영적인 인도자에게 순종하는 규율입니다.

정리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에 인도되어 가는 ‘영적 발돋음의 삶’이란? ‘어긋남에서 어울림’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어긋남에서, 관계의 어울림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어울림은 다음의 3가지입니다.


어긋난 나와 어울리기 위한 고독,

어긋난 그와 어울리기 위한 환대,

어긋난 하나님과 어울리기 위한 기도.


이렇게 어긋난 자리에서, 어긋난 관계에서 어울림의 관계로 진리의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진리의 성령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진리라는 것이 통속화된 명사가 아니라, 이 시간도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견인케 하는 동사임을 기억케 하옵소서. 방망이를 깎던 노인처럼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간에 우리 안에 있는 불필요한 부분을 가감없이, 과감하게 깎아가고, 다듬어가는 그 길을 순명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월이 더 해질수록 어긋난 우리 자신과 어울리게 하시고, 어긋난 그들과 어울리게 하시고, 어긋난 하나님과 어울리는 우리로 변화되어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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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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