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6.16 움오름 주일 설교 -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7-15)

2019년 6월 24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7~15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설교문

1. R. A. Torrey와 성령님


1965년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3가지 실험을 위한 공동체가 시작했습니다. 그 3가지 실험이란? ① 하나님과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기도) ②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신자 상호간의 관계(코이노니아) ③ 기독교 공동체와 비기독교적 사회와의 관계(선교)입니다. 이를 실험하고 검증하며 연구해 보는 것을 위해 세워진 공동체는 다름아닌 예수원이고, 그 설립자는 2002년에 선종하신 대천덕 신부(R. A. Torrey III)입니다.


1999년 겨울에 이어 2000년 겨울에 예수원을 2번 방문하여 머물며 대천덕 신부님과 짧게나마 시간을 가졌습니다. 다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지금껏 지켜본 예수원을 한마디로 설명해 보라면, 저는 주저없이 ‘성령 공동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께 의지하고, 의탁하며 가는 기도 공동체, 성령 공동체가 예수원입니다.


예수원이 성령 중심의 기도 공동체였기에, 대천덕 신부님의 사역과 강론의 중심엔 늘 성령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이러한 성령 중심사역은 그에게서부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할아버지 R. 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1세 목사에서부터 이어졌습니다. 할아버지 R. 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목사는 무디와 함께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그분은 성경과 성령에 의한 회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사회 정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전기에 보면 자주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때, 나는 말을 조심한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지 않을 때, 내가 하는 말은 종종 실수일 수 있고 실언일 수 있고, 이웃들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 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때는 중요한 결정을 유보한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 결정을 할 때, 종종 내 결정은 잘못 될 수 있고, 믿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의 이기적인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책망하시는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 목이 타도록 사모한다. 목마른 사슴처럼 사모한다. 성령 충만을 구한다.”


자신이 나태하고 게으를 때마다 토레이 목사는 도리어 성령의 책망하심을 구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굽어진 세상을 걷는 동안 굽어져 망가지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2. 책망하시는 성령님


기독교에 있어서 성령님은 매우, 굉장히, 대단히 중요합니다. 2주에 걸쳐 반복해서 나누었듯이 성령님의 오심으로 인해 교회가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령님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있어서는 어떤 면에서 중요할까요? 성령님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 걸까요?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역할을 3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첫째,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8절), 둘째, 인도하시는 것(13절), 셋째, 알리시는 것(13, 14, 15절)입니다.


오늘은 성령님의 이 3가지 역할 중에서 첫번째인 ‘책망하시는 것’에 대해 함께 나누고, 다른 부분들은 다음 주에 이어 나누겠습니다.


성령님을 일컬어 ‘보혜사’라고 합니다.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상담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보혜사께서 책망하신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우리 일상사로 가져오면 금방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사랑한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들어준다는 것, 보살펴 준다는 것 이외 훈계와 훈육 등 책망의 요소가 필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잠언을 읽다보면 쉽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잠언의 언어, 형식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책망과 경계를 내포한 ‘훈계’이기 때문입니다.


  1. 죄에 대하여 그렇다면,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있어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걸까요? 8절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은 ‘죄, 의, 심판’ 등 이 3가지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책망하다’라고 번역된 원어는 ‘밝히 드러내다, 폭로하다, 죄를 깨닫게 하다, 바로 잡다, 꾸짖다’ 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폭로하시고, 바로 잡아주시고, 꾸짖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이 부분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입니다. 성령님이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이유를 9절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수만가지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령님은 왜 그 수만가지 죄 중에서 유독 한가지 죄,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을 콕 집어서 책망하시는 걸까요? 성경은 죄를 ‘과녘에서 빗나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양궁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기 전에 필히 무엇을 합니까? 과녘에 조준합니다. 그리고 당겼던 시위를 놓으면 활을 떠난 화살이 과녘에 맞아 점수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점수는 화살이 과녘에 맞을 때 드러나지만, 그 결정은 그보다 훨씬 전에 납니다. 바로 조준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점수를 얻는 선수일수록 조준을 잘 하는 사람라는 말이 됩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녘을 벗어난 것이 죄이지만, 실은 그것은 결과일 뿐 죄는 조준할 당시 결정된 것입니다. 당겼던 시위를 놓기 전 이미 죄는 정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수만가지 죄가 있고, 하루에도 수십가지 죄를 짓고 있지만, 그 근본원인은 잘못된 조준,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조준되지 않은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어식 표현엔 이를 구분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조준하지 않은 근본적인 죄를 대문자를 써서 ‘Sin’이라고 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죄를 범죄라는 뜻에서 ‘sins’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9절을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성령님은 인간이 저지르는 수만가지 죄의 원인, 가장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우리 생의 조준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라고 일깨우십니다.

  2. 의에 대하여 주님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2번째를 ‘의에 대해서’라고 하시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10절입니다.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죄에 대해서 성령님이 책망하신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의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면서 그 이유를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하시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성령님께서 우리를 향해 책망하실 이유가 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마 1:22, 마 4:14, 마 21:4, 요 12:38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입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시기 수백년 전부터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며 예언케 하셨던 바로 그 말씀을 따라 이 땅에 오시고, 그 말씀을 이루며 이 땅에서 사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땅을 떠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 부합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의(옳음)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에 저항합니다. 반항합니다. 자기 뜻대로, 원대로 살아갑니다. 성령님께서 의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에덴을 실낙원한 이래 사람이 타락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속에서 가장 타락한 시대를 들라면 주저없이 ‘사사시대’를 말합니다. 그 사사시대를 규정짓는 단 한문장을 사사기는 책의 맨마지막 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며 그 시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삿 21:25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출애굽 이후 가나안에 안착한 이래 이스라엘은 초대왕 사울 이전까지 표면상 왕이 존재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눈에 보이는 왕이 다스리는 시대가 아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신정시대였습니다. 하지만, 패역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채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각자의 소견이 법이었고, 각자의 생각이 규칙인 시대였습니다. 그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 시작할 때 사사시대는 가장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시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공동번역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실 것이고 왜 성령님은 예수님의 모습을 들어 ‘의’에 대해 우리를 책망하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오셨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셨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돌아가신 예수님과는 달리 우리는 할수 있는 대로 우리 생각에 옳은 대로, 우리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와는 멀어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부르시기 위해 성령님은 오늘도 우리를 의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3. 심판에 대하여 주님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3번째를 ‘심판에 대해서’라고 하시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셨습니다. 11절입니다.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부분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이것이 왜 책망의 이유인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선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면서 이유로 드신 것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책망의 이유가 됩니까?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11절의 공동번역성경의 표현을 보겠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실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돈은 아래서 위로 흐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 물과는 달리 돈은 아래에서 위로 흐릅니까? 돈은 권력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왜 돈은 권력이 있는 곳을 향합니까? 세속적 권력은 힘으로 무엇이든지 바꾸고, 무엇이든지 되게 하고, 무엇이든지 은폐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권력으로 누구든지 부릴 수 있고, 맘대로 살 수 있다고 믿기에 거기에 기생(또는 공생)하기 위해 돈은 위로 향합니다. 그렇기에, 세속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는 왕이요, 신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이용해 죄를 짓고도 죄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심판의 이유라는 겁니다. 하나님 위에 자신이 자리한 사람들, 스스로가 신이라고 여겼던 자들, 바로 그들의 행위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겼던 이집트의 바로를 폐하시고, 입법, 사법, 행정 뿐 아니라, 제사장의 권한인 신권까지도 장악했던 세상의 왕들을 여지없이 심판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 지난 역사 속에서 절대권력을 가졌던 왕들이 하루 아침에 사라져 갔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역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성령님께서 깨우치시고, 책망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이야기하는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히 11:6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며 이 땅의 삶을 살아가게 한다는 겁니다. 이 믿음의 삶을 가능케 하기 위해 성령님께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3. 성령님과 함께 하는 길


보혜사(保惠師)로 번역된 헬라어 παράκλητος(파라클레토스)는 접두어 ‘παρά 파라’(곁에서)와 동사 ‘καλέω 칼레오’(부르다)의 합성어로서 신약시대에 법정 변호인을 뜻했습니다. 이를 영어 성경은 the Advocate, Helper, Comforter, Counselor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번역된 이 단어들처럼 보혜사 성령님은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 곁에서 격려와 위로를 주십니다. 그래서 지난 날의 실패를 딛고 아침마다 새로이 시작케 하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R. 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 목사의 전기 속엔 이런 성령님과의 동행을 그가 얼마나 추구했는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 기도를 한다. ‘하나님, 오늘도 나를 성령 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성령 충만 없이 하루 길을 걷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침마다 우린 어떤 기도를 드리나요? 어떤 인도하심을 구하며 성령님께 우리를 맡기나요? 오늘 본문에 비춰보면 어떤 사람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성령님께 민감한 사람입니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그 책망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대로 주어진 하루의 빈칸들을 채워가는 사람입니다.


외국에서 살다 한국에 다시 들어와 생활하는 많은 가정들의 최대 고민은 단연 자녀교육일 겁니다. 그 중에서도 늘 첫번째는 한국어 성적이 차지 할 겁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 1학년 국어시험에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문제1: 어른이 선물을 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5글자로 쓰시오.

ㅁㅁㅁㅁㅁ


문제 아래엔 5개의 ㅁ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답은 ‘고맙습니다.’ 또는 ‘감사합니다’와 같은 말을 쓰라는 것이었는데, 해외에서 살다왔던 아이는 이렇게 그 5개의 네모칸에 한 글자씩 맞추어 넣었습니다. “뭘 이런걸 다”


기가막힌 조합입니다. 어쩜 그 조합은 평소 그들 부모가 즐겨쓰는 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답은 선생님이 요구하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칸을 맞추고 글자를 모두 채워넣는다고 그것이 답이 되는 것은 아니듯, 하나님께서 매일매일의 우리 인생의 빈칸에 요구하시는 답이 있습니다. 그 답을 찾아 채워넣어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 답을 알아가고, 빈칸에 그 답을 채워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꾸짖음에 귀를 기울이는 겁니다. 그때 우리는 ‘뭘 이런걸 다’가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답을 채워갈 수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넘어지지 않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우리를 권면하시고, 책망하시고, 깨우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누리게 되실 겁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님~

우리로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 마음이 조준할 수 있도록 일깨워주옵소서.


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님~

우리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 그 뜻에 따라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어 가도록 날마다 일깨워 주옵소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하나님~

우리 인생이 우리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가 왕이 되고, 하나님이 된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날마다 우리를 일깨워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노래하는 우리 인생 속에서도 신속히 가버리는 허무가 아니라, 날마다 하늘의 기쁨이 이 땅에 쌓여가는 보람된 인생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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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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