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6.09 움오름 주일 설교 -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15)

2019년 6월 1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7~15

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5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설교문

1. Time To Say Goodbye


1990년 10월 3일 다시 한 국가를 이룬 독일은 통일 후에도 동,서간의 갈등과 경제수준의 격차 등으로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동독출신으로서 88올림픽 권투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했던 헨리 마스케(Henry Maske, 1964-)는 통일 독일의 양진영을 화합으로 이끈 국민적 영웅이었습니다.


1993년 독일에서 열린 프로 복싱 경기에서 미국의 칼 윌리엄스를 판정으로 이기며 IBF라이트헤비급 챔피언이 된 헨리 마스케는 10차 방어전까지 성공하며 프로 통산 30전 30승 12KO라는 전승을 기록했습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은퇴 경기라고 공언했던 11차 방어전을 앞두고 사라 브라이트만에게 오프닝 송을 부탁했습니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영국 출신의 뮤지컬 배우로서 ‘오페라의 유령’에서 주인공을 맡으며 스타덤에 오른 디바였습니다.


헨리 마스케의 부탁을 받은 사라 브라이트만이 떠오르지 않는 악상의 새로운 영감을 위해 이탈리아 나폴리 근교로 여행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어느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르는 "콘 테 파르티로(Con Te Partiro: 그대와 함께 떠나리)”란 곡을 듣고서 감동한 그녀는 안드레아 보첼리를 찾아가 함께 노래 불러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런 사연 속에서 사라 브라이트만과 안드레아 보칠리가 헨리 마스케의 은퇴 경기 오프닝곡으로 연습한 곡이 ‘콘 테 브라티로’를 변형한 ‘Time To Say Goodbye’(안녕이라고 말해야 할 때)였습니다.


헨리 마스케의 은퇴 경기 당일, 안드레아 보칠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은 2만 2천 여명의 관중 앞에서 처음으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 헨리 마스케는 은퇴경기에서 판정패를 당했습니다. 그의 프로 첫 패배요, 동시에 프로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에 그가 링 위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때 다시 ‘타임 투 세이 굿바이’가 울려퍼졌습니다. 2만 2천여명의 관중이 약속이라도 한듯이 일제이 일어나 “Time To Say Goodbye”를 합창했습니다. 그것은 상처투성이로 링에서 내려오는 그들의 영웅을 떠나보내는 애정어린 마음의 노래였습니다.

그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안녕이라 말할 시간이에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당신과 함께 하지 못했던 세상, 지금부터 나는 그곳에서 살 거랍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으로 당신과 함께 떠날 거에요. 당신과 함께 그곳에서 살 거에요.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되었어요.”


(Time To Say Goodbye. Places that I've never seen or experienced with you now. I shall I'll sail with you upon ships across the seas. seas that exist no more. It's Time To Say Goodbye.)


사람은 누구라도 삶의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머물던 자리에서 물러나며 “Time To Say Goodbye”(안녕이라고 말할 시간이에요)라는 말로 반드시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지 않는데 있습니다. 동시에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빛나는 전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지 못해서 결국 마지막이 초라하고 슬픈 결과로 덧칠하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자주 목격해 왔습니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뿐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 있어서도 매 한 가지였습니다. 남은 이들을 위한 것이라 말하지만, 실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내려놓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4살 차이의 형제지간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이끌었던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목전인 호르산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20:22-28입니다.


  • 22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 23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르시되

  • 24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 25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 26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 27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 28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자신의 옷을 아들 엘르아살에게 줌으로써 작별을 고할 때 아론의 나이 123세였습니다. 출애굽 제 40년 5월 1일이었습니다(민 33:38). 같은 해 모세 또한 여호수아에게 그 자리를 맡기고 아론처럼 작별을 고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나이 120세였으나 눈은 조금도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습니다(신34:7). 남아서 충분히 더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충분하다”(enough)고 하셨고, 모세는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남아있는 이들을 위한 모세의 마지막 최선의 배려요, 사랑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약 2천여년이 지난 어느날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리할 수 있었습니다.





2. 너희를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셨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셨고, 들을 수 있게 하셨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떠남 역시 사람을 위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요 16:7 상반절입니다.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어째서 주님의 떠나심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유익이 됩니까? 계속 주님이 계시고, 보여주시면 그것 자체로도 말이 필요없는 확실한 증거가 될텐데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대부분 우리의 보편적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께서 계속해서 가시적 존재로 머무시는 한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수 없기에 떠나신다고 하셨습니다. 7절 하반절입니다.

  •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우리의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고착되는 한, 그것을 떠나지 않는한 우리의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눈을 감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보이는 주님이 떠나셔야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솔로몬의 삶은 성전을 짓기 전과 지은 후로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성전건축 이전은 신실했다면, 건축 이후는 타락의 일로였습니다. 이것 이상하지 않습니까? 되려 반대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눈에 보이는 것에 고착되고, 그것에 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작 보이는 성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와 더불어 머무실 마음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제자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실제 역사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느껴지는 사람의 몸으로 존재하시는 동안 주님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조차 오해했고 심지어 믿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떠나신 후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이후는 어떻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바로 믿고, 제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있던 때에는 주님을 배반했던 제자들도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없던 때에 그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이요,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눈에 역설일 뿐 하나님 보시기엔 이것이 순리요, 진리입니다. 참된 진리, 영원한 진리는 가시적인 것을 넘어설 때에 비로소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고 현상을 통해 이상을 그려가는 동안 우리는 이것을 지속적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이 출발이 주님의 떠나심에 있었듯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떠날 수 있는 용기와 배려가 있어야 함을 되새겨야 합니다.


요즘 유치원에 가보면 세 부류의 아이들로 분류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활동을 주도하는 여자아이들, 언제든 장난만 치려고 하는 통제 불능의 일부 남자아이들, 그리고 얌전해 보이기는 하지만 산만하고 쭈뼛대는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입니다.


이런 남자아이들의 경우, 밖에서는 얌전하다가도 집에 들어오거나 엄마 앞에서만 서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약한 남자아이의 전형적인 특성인데, 밖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다가 자신의 요구는 무엇이든 받아주는 엄마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약…한 아들’에 대한 우려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엄마는 아들을 너무 모른다》라는 책의 저자 창랑(滄浪)과 위안샤오메이(袁小梅)는 이 부분을 다르게 풀어 이야기 합니다.


저자들은 남자아이들이 자라는 현장, 즉 여러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다양한 엄마들과 전문가들을 만나 취재하고 인터뷰한 결과 그 원인을 남자아이의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 사랑을 주기만 하는 엄마에게서 찾았습니다. 이는 엄마의 사랑 자체가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과도한 표현과 보호, 어떤 어려움이나 실패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조바심이 문제라는 겁니다.


이처럼 아들의 불편이나 부족을 해소해주거나 어려움으로부터 보듬어 안는 엄마의 방식이 남자아이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일방적으로 전달될 경우, 아들의 자기중심성을 심화시키고 유약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 책은 “때로는 게으른 엄마가 위대하다”는 역설같은 진리를 말합니다. 아들을 위한다며 부지런히 챙겨주고 헌신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도록 조금은 게을러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챙겨주려 하기보다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게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경험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오늘 본문에 비춰본다면, 자녀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챙겨주려는 부모의 자리에서 떠날 수 있는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 자녀를 위한 배려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떠남, 변화의 시작


성경의 이야기는 이와같은 떠남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에덴에서 실낙원하면서부터 시작된 인간 타락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떠남을 통해 회복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1세기경, 수메르 도시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르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으로는 티그리스강 사이의 비옥한 삼각주 메소포타미아(두 강 사이)에 위치한 최고의 국제도시였습니다.


아버지 데라는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인지 명확히는 모르겠으나 전 가족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했습니다. 하란은 현재 터키와 시리아 국경지대에 있는 산우르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우르에서의 삶 못지않은 부유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심각한 영적인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거했던 아브라함은 그의 아버지 테라가 죽으면서 남긴 유산으로 막대한 부를 소유했지만, 그는 공허했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어떠한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집과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누리고 있던 현재로부터 나오라고 촉구하신 겁니다. 새로운 세계와 삶에 대한 비전이 없다면, 죽은 사람과 별 차이없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한 바램과 그에 대한 불확실한 두려움 사이엔 늘 긴장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을 접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말들은 아브라함이 가진 안정적인 기득권을 의미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러한 것들을 떠나는 일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인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내리는 형벌이 바로 그 사회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런 엄청난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신 걸까요? 그이유를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 12:1입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히브리어 본문을 해석하면서 생략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걸으라”는 לֶךְ(레크) 다음에 연이어 적혀있는 “너를 위해서”라는 לְךָ֛(르카)입니다. 이를 잘 살려서 다시 번역해 보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너 자신을 위해 걸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일생을 통해 일궈놓은 우리의 이익사회(Gesellschaft)와 공동사회(Gemeinschaf)의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런데 그 요청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이익을 추구하는 것 때문에,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쉽게 상실하기 쉽상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익에 대한 떠남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전에 진정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며, 우리 자신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는 출발이 됩니다.




4. 성령님과 떠남의 여정


SNS로 알게 된 한분이 예전 포럼에 참석했을때 받았던 충격적인 통찰(깨달음)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나는 화를 멈추고 싶습니다. 자녀나 배우자에게 엄청나게 화를 내는데, 그치고 싶은데 안됩니다.”


그때 그 포럼의 리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 당신이 화를 그치지 않을까요? 그건 당신이 화를 내는데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득이라뇨? 화를 내서 저는 맘만 아프고 미안하기만 한데요. 제가 무슨 이득이 있어서 화를 내겠어요?"


리더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화를 내는데 큰 이득이 있어요. 그 이득이 뭔지 생각해보세요."


결국 질문자는 이득을 발견했습니다. 화를 냄으로써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했고,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했습니다. 이득이 있기 때문에 그 행동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를 냄으로써 얻는 것, 자신의 옳음과 지배력의 이득을 포기할수 있습니까? 그것을 포기할수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그 '화'와 같이 사는 수 밖에 없습니다. 수치심, 불안, 무기력, 우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은데 왜 그렇게 안될까요?


잘 되돌아 보면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반복된 행동을 하는데에 '자신의 이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득으로 인해 말로는 해결하고 싶다고 하지만, 실제 해결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득으로 인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변화, 진정한 변화를 바란다면, 이익으로부터 떠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이든, 교인이 아니든 간에 오늘날 우리 사회 속의 교회를 하나같이 “타락했다, 교회다움을 상실했다”라고 진단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난 수십년간 타락을 거듭해 오고 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교회의 이익됨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기득권을 누리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이익사회(Gesellschaft)와 공동사회(Gemeinschaft)라는 이익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기총의 전아무개를 비롯한 변종들이 극우세력과 야합해 ‘능력있게(?)’ 활동하는 생태계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오늘은 부활절 후 7주일을 보내고 맞이하는 오순절, 성령강림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 박동현 목사님을 통해 미리 성령강림절의 의미에 대해 살펴본 바와 같이 보혜사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오신 성령님과의 올바른 동행은 교회의 교회됨에 있습니다. 그 교회의 교회됨은 <몸.지체.상호존중.약자존중.동고동락> 열다섯 글자로 표현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 <몸.지체.상호존중.약자존중.동고동락>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무엇이 그 출발점이 될까요? 오늘 본문에 비춰볼 때, 그것은 교회가 그 스스로를 위한 사사로운 이익의 자리에서부터 떠남을 의미합니다. 그때 움오름교회를 포함한 이 땅의 교회가 현상을 좇고, 현상에 고착된 화석화된 종교인에서 벗어나 성령님과 더불어 주님의 참된 진리를 살아내는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교회는 더이상 이 땅의 이익사회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암담한 기생사회조차 서로를 위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일구어가는 성령님의 동행체가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하나님과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이상 솔로몬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안주함으로써 타락하지 않게 하셔서 참된 진리, 영원한 진리를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이 출발이 주님의 떠나심에 있었듯이, 우리 또한 본토, 친적, 아비 집이라는 이익됨의 자리를 떠날 수 있는 용기와 배려를 견지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보혜사 성령님과 더불어 <몸.지체.상호존중.약자존중.동고동락>이라는 교회의 교회됨을 살아가는 주님의 몸 공동체로 살아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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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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