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5.26 움오름 주일 설교 - "복종"(롬 13:1)

2019년 5월 29일 업데이트됨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치안관들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거든, 좋은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은 여러분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나쁜 일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도 복종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여러분은 또한 조세를 바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바로 이 일을 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다하십시오. 조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이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이는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이는 존경하십시오.(새번역)



설교문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아예. 다른 사람들은 갈차주지도 않는데 우리 역사샘이 이야기해 주면서 같이 가보자 하데예. 우리 동네서도 전쟁이 있었다는 게 실감 나지가 않았는데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이런 현장이 있어서 놀랐어예. 군인들이 그랬다는 것도….” (권영란. 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경남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민간인 학살 위령제에 참석했던 인근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말했습니다. ‘외공리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에서 3월 사이 군인들이 11대의 버스에 타고 온 민간인들을 총살한 사건입니다. 유골을 파악한 결과 어린이와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가족단위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도 추측된다고 합니다. 지난 2014년에는 ‘진주시 명석면’에서 한국전쟁기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700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진 1차 민간인 유해발굴이 있었고, 2017년에는 2차 발굴이 있었습니다.

경남 산청군은 제가 태어난 곳이고, 그곳에서 가까운 ‘시천면’은 늘 그 이름을 들어왔던 지리산 자락의 친근한 지역입니다. 또한 ‘명석면’은 제가 대부분의 학창시절을 보낸 진주시에 편입된 곳으로 가까운 친척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두 지역 다 태어나고 오래 동안 자라고 공부하였던 장소였지만 오랜 동안 그 어디에서도 누구로부터도 이런 이야기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익숙하고 친근한 그곳에 이런 비극의 현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폭력의 참상을 지면으로 접했을 때 더욱 놀람과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국가란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사건들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 속에는 수많은 국가폭력과 그에 따른 희생의 역사가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있습니다. 국사교과서에서 뒷부분 물고기 비늘처럼 슬쩍 붙어있는 근현대사는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대충 훑고 지나간 기억뿐입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사건들은 밑줄을 그어가며 외웠지만 저의 기억 속에 한국 현대사는 오랜 동안 백지상태와 다름없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비로소 어떤 일들이 우리의 부모 세대에, 또 우리들의 세대에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겪고 독재와 권위주의라는 엄혹한 시절을 지나며 국가폭력이 가져왔던 참상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민주적 가치와 질서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정치 사회적 여건들이 보다 성숙되면서 그동안 숨겨졌고 또 숨겨왔던 역사적 진들이 드러나고, 용기있는 증언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 그 모든 것들이 국민들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보다 성숙한 인권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분들의 진상규명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방해받지 않고 중단 됨 없이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최근 폭포수처럼 쏟아져 드러나는 현대사 속에 박혀있던 국가폭력과 인권유린의 참상을 보면서 한국교회 또한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서 이러한 역사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부끄러운 걸음이었다는 사실 또한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경우 교회는 인권과 생명이 유린되는 현실 앞에서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이란 명분으로 동조하고 심지어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일들이 국가와 신앙과의 바른 관계정립에 실패했고, 또 성속 이원론에 갇혀 기독교신앙을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영역으로 축소시켜 공적인 영역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신앙의 허약함은 곧장 폭력적 권력의 속성에 이용되었고 교회 또한 부와 권력의 영향력을 자신의 세력 확장 수단으로 추구하였습니다.

우리부모세대 그리고 우리세대에 이 땅위에서 일어났더 국가권력이 잘못 행사하였던 일들을 보면서 그 아픈 역사는 우리에게 권세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어떻게 오용될 수 있는지 또 보다 바람직한 이해는 어떤 것인지 성찰해야할 할 책임에 대해 질문 더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현상의 중심에 오늘 본문 또한 자리 잡고 있습니다.

  •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말씀을 국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토 달지 말고 복종하는 것이 보다 신실한 신앙의 모습이라고 자연스럽게 내면화 하였습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할 때, 당시 조선 선교사 협의회 대표인 해리슨 감독은 로마서 13장에 근거하여,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일본 정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만약 독립운동이나 저항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조선 기독교인들은 일본정부에 순종하되 단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3.1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3장은 국가폭력과 찬탈 앞에 침묵하라는 메시지로 읽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면밀히 살핀다면, 오히려 본문은 권력에 신적 기원이라는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권세자들을 향한 복종과 순종만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절대적 복종이 아니라 본문은 오히려 <권력의 바른 의미>를 알려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모든 권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아래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쓰인 시대는 로마황제가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던 사회였습니다. 황제는 인간 왕의 의미를 넘어서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로마의 제국신학에서 황제는 이탈리아나 지중해 지역이 아니라 ‘온 세상’ 주인이었습니다. 황제에 대한 칭호는 여러 가지로 쓰였습니다. ‘신적인 존재’(아우구스투스), ‘예배를 받으실 분’(세바스토스), ‘주’(퀴리오스), ‘구원자’(소테르), ‘하나님의 아들’ 등으로 불렸습니다, 실은 ‘복음’(유앙겔리온)이라는 말 또한 황제의 탄생이나 즉위로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축하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권력은 당연히 황제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로마제국 신학에 강력한 균열을 냅니다. 모든 권력은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는 바울의 이 진술은 어떻게 보면 당시 로마 세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황제에게서 제거하고 그것을 하나님께로 되돌려 놓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황제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합니다(4절).

  • 4절a 권세를 행사하는 사람은 <여러분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고>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새번역)

<일꾼>이라는 단어 <디아코노스>는 <시중드는 사람>, <심부름꾼>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권력.권세는 군림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이 되게 하기 위한 것, 즉 하나님의 뜻, 선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어놓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표현은 당시로서는 황제에게는 반역적이요 치욕스러운 표현입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이 말은 권세에 대한 신적인 기원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모든 권세는 그 기원이 되시는 하나님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 말씀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권력을 세우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권력자를 세우시는 것은 <각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위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권력이 그것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하는 <공적 유익>을 위해서 수여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세계와 같은 고대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생각입니다. 로마의 세계관에서는 권력자의 유익을 위해 백성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로마뿐만 아니라 전제군주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로마적인 세계관을 정반대로 뒤집어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권력자들이 존재한다>는 새로운 가치로 바꾸어 놓은 놀라운진술입니다.

따라서 공권력을 가진 이들은 자신이 권력자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허락된 권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권력자는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국민들의 공적인 이익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복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권세자가 칼을 가진 유일한 이유입니다

  • 4b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새번역)

대대로 전제적인 왕과 권력자들은 로마서 13장을 악용하여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또 사람들을 억누르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악용은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로 하여금 독재와 국가폭력이 자행되는 곳에서 침묵하게 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독재에 부역하는 것을 정당화하게 하였습니다.

여기 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가 일찍이 군문에 헌신해서 훌륭한 지휘관으로 나라를 방위하는데 충성을 다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최근에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운동에 앞장설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민주화가 이 땅 위에 완전히 실현되는데 큰 공헌을 해서 그의 업적이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물려지게 해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제 간절히 원하옵는 것은 그에게 건강을 허락해 주시고, 또 인간의 차원을 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용기를 그에게 허락해 주시고, 그의 신변을 보호해 주시며, 그리고 그 가정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하셔서 그 부인과 모든 자녀들이 다 같이 하나님을 신실되이 경외하는 신앙의 가정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기를 원하옵고...“

이 기도는 1980년 8월, 당시 한경직, 정진경, 김준곤 목사 등 한국기독교계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 서울의 유명호텔에서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모셔놓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를 열어 그를 축복한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불과 3개월 뒤인, 광주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그 학살의 주범을 향해 축복하며 드려진 기도였습니다. 기도 내용 그대로를 놓고 본다면, 불과 몇 개월 전에 벌어진 광주에서 벌인 참상이 모든 사회악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운동에 앞장 선 것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 참상이 민주화가 이땅 위에 실현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고 또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 이러한 일이 앞으로 계승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의미란 말입니까. 광주의 비극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할 인물을 개신교 목회자들이 모셔놓고 기도회를 열었다는 것은 교회가 사실상 손에 피를 묻히고 권력을 움켜 쥔 권력자와 손을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과거입니다. 사과를 촉구하는 목소리들도 있었지만 당시의 주역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바울은 권세에 복종하는 문제에 있어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무엇에 따라 복종하는가에 대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권세자가 가진 칼 때문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복종’애햐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공권력에 대한 공포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양심의 판단>에 따른 행동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 5절 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도 복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복종해야 할 이유이면서 동시에 저항할 수 있는 이유를 드러냅니다. 통치자가 양심에 반하는 것을 요구할 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에 부합하는 바른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해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저항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영국에서 ‘피의 여왕 메리’에게 저항했던 청교도들은 롬13장5절을 저항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17세기 영국 독립파 목회자인 윌리엄 브리지는 “관원들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런데 그들이 불법적인 것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을 명령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롬 13:5에 근거하여 양심에 따라 불순종하고 저항해야 한다.” 라고 선언합니다.

UCLA 한국기독교학 옥성득 교수는 로마서 13장은 ‘복종’이라고 쓰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책임적 참여함’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통찰합니다.

“1901년 고종의 대한제국 후기와 일제 강점기(1910~1945년)부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까지 집권자와 소위 보수적인 선교사와 목사들은 한결 같이 로마서 13장 1~7절을 내세워 불의한 정권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니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그 구절과 함께 오용한 구절은 딤전 2:1~2, 벧후 2:13~17, 마태 17:24~27, 요한 18:36 등이었다. 곧 권력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에게 순종하고, 세금도 잘 내라는 말만 뽑아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보다는 '신민'이나 '국민'으로서 정부에 복종할 의무만 강조했다. 특히 요한 18장 36절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를 차단했다. 그러나 마침내 1960년 4.19 때 한국교회는 사도행전 4장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당국자.종교지도자)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불의한 정권과 지도자에 항거했다. 교회가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어린 청년들의 값진 희생의 피가 뿌려져 결국 한국 민주주의가 꽃피었다. 로마서 13장은 '복종'이라고 쓰고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책임적으로 참여함'으로 읽어야 한다.”(옥성득, 한국교회사 산책, 4.19혁명과 사도행전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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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할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사회에서 그 권세의 참된 주인은 우리, 바로 시민이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법을 잘 지키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워 우리 스스로를 성숙하게 가꾸어 나가는 일입니다. 민주사회의 가치와 질서를 배우고, 그 속에 심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를 숙고하며 실천하는 일입니다. 강고한 원칙이라고 알고 있는 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치주의’는 국민들이 법을 지켜야한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에 더 방점이 가있습니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민주국가에서의 ‘법치주의’는 권력자가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이 법에 의거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국가에서는 시민이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실행합니다. 입법, 행정, 사법부는 시민의 뜻을 대의하는 기관일 뿐입니다. 법을 결정하는 주체는 시민이며, 시민이 법을 통해 권력을 견제합니다. 물론 시민들의 준법은 중요합니다만, 법에 대한 시민의 역할과 권리는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빠지기 쉬운 함정을 살펴봅니다. 그것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여 <국가우상주의>에 함몰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가권세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국가가 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뿐입니다. 애국이란 이름으로 국가를 절대시하는 국가우상주의는 경계해야할 말씀의 오용과 악용의 열매입니다. C.S.루이스는 “악한 통치자들은 자신의 악을 묵인받기 위해 여러 선전을 통해 악마적 상태의 애국심을 부추길 것”(네가지 사랑, 홍성사)이라고 경고합니다.

숭고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띠기 쉬운 것일수록 신(神)이 되기를 욕망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것은 악마적이 됩니다. 많은 경우 오늘 우리 사회에서 애국과 종교를 구실로 자신의 이익, 정파적 이익을 챙기려는 구호가 얼마나 난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깨어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또한 그 범주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늘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좋은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법을 잘 지켜 모범적인 시민이 되는 것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것은 서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모순이 아닙니다.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목적은 정의와 공의가 살아 숨 쉬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항은 주권자로서 정의롭고 공의로운 법을 제정하고 운용하는 일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최종지는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시며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임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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