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5.19 움오름 주일 설교 -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 16:5-6)

2019년 5월 21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5-6

5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설교문

1. 공포의 문화


오늘날 우리사회는 공포의 박물관 같습니다. 조현병, 메르스, 사스 등 잊을 만하면 미디어 매체를 타고 우리를 겁주는 공포의 대상들이 등장합니다. 아침, 또는 저녁 뉴스 앞에 앉으면 왜 그리도 끔찍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온갖 두려움과 잔혹함으로 무장한 공포의 박물관을 연상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이 예전엔 없었거나,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렇다”라고 대답해 주는 근거 있는 통계나 연구사례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캘리포니아대학의 사회학 교수 배리 글래스너( (Barry Glassner)의 책 <공포의 문화>는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누구나 느꼈을 법한 공포, 특별히 ‘허구적’ 공포를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공포의 문화>라는 책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거짓공포’투성입니다. 미국은 풍요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공포의 왕국입니다. 걸핏하면 학교에서 총질을 해대는 10대들, 마약에 찌든 중독자들, 이들이 벌이는 각종 범죄와 테러 등등. 저자는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공포의 뉴스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았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공포는 근거가 빈약하거나, 터무니없이 과장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일례로, 1998년 LA타임스는 도로상에서 운전자끼리 싸우는 ‘도로분노’를 살벌하게 묘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복운전과 유사한 것입니다. 총격으로까지 이어지는 그같은 싸움을 피해 수백만명의 운전자들이 차를 돌려 달아나고 있다고 LA타임스는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미국 북서태평양 지대에서 ‘도로분노’로 죽은 사람은 1년에 1명꼴에 불과했습니다.


배리 글래스너 교수는 근거 없는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3대 세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 공포행상은 정치인과 기업, 그리고 미디어입니다. 정치인에게 공포는 곧 표입니다. 범죄와 마약에 대한 사회불안이 높을수록 강력한 조치를 공약하면 쉽게 표를 얻을 수 있으며, 소수민족과 유색인종에 대한 공포를 선동하면, 쉽게 편견어린 백인 중산층 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장된 공포를 자아내 보험상품을 팔고, 범죄에 대한 공포를 확산시킴으로써 보안산업이 호황을 누립니다. 새롭고 강력한 공포를 선전함으로써 판매부수와 시청률을 높이는 미디어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른바 ‘공포마케팅’의 주체들입니다.


그래서 배리 글래스너 교수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기 싫다면 ,공포행상인이 지어내는 거짓위험을 정확히 식별하고, 거짓공포에 맞서 싸워라고 권합니다. ‘공포 행상인’이 써먹는 테크닉 중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기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학적 증거 대신 애처로운 일화 동원하기, 개별적인 사건을 시대적 추세로 부풀리기, 날 때부터 위험한 부류의 인간들 비난하기> 등등 입니다.


또한 권위적 전문가인 척하는 사이비 전문가의 말을 인용합니다. 터무니없는 공포일수록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문가와 그들의 조사연구 결과를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검증되지 않은 3류학자일 경우가 많고, 연구방법에도 근본적 결함이 허다합니다(무슨 일이 이슈가 되면 종편에 전문가라고 고정 등장하는 사람들도 유사).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동원하여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고 내 주변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심화시킵니다. 선별적 통계를 인용하여 가능한 한 통계수치를 비틀어 극적 효과를 얻으려 합니다. 마치 마술사가 물건을 감추는 동안 관객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술, 미스디렉션(misdirection)처럼 공포를 왜곡하고 과장하고 조장합니다.


이러한 왜곡과 조작 사태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파동과도 비슷한점이 많습니다. 일례로 먹거리를 고발하던 시사프로그램과 PD를 기억하실 겁니다. 공공의 이익이라고 하는 고발의 취지만 보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론을 이미 내어놓고 과정을 끼워맞추기하는 방송을 가끔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황토팩 관련 사업하던 한 배우는 해당PD의 방송으로 합의이혼, 회사부도에다 췌장암까지 걸려 이른 나이에 별세했습니다.


추후에 중금속은 없다고 밝혀졌지만, 이미 사업은 망했고, 아무도 그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해당 PD는 그리스 요거트 관련하여 제대로 검증도 거치지 않고 국내에는 제대로된 그리스 요거트가 없다고 방송했습니다. 그리스 요커트를 제조 판매하는 분이 촬영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이 없는 틈을 타서 몰래 촬영해서 방송을 해버렸습니다. 가당 제품과 무가당 제품이 있는데도 가당 제품만 갖고 결론에 끼워맞춘 방송을 했습니다.


이후에 논란이 되자 대충 사과했지만, 해당 업체는 이미 엄청난 타격을 받은 후였습니다. 더 큰 논란이 된것은 해당 PD가 덴마크 요커트 제품 광고 모델이 된겁니다. 그리스 요거트는 가짜라고 방송에 때려놓고, 광고에서는 덴마트 요커트는 진짜라고 한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포를 조장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원인을 조작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공포에 쉽게 반응합니다. 물론 그 공포를 이용하여 이득을 얻는 집단이 있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공포가 만연한 것은 공포를 조장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집단과 그 문화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건강에 대한 끝없는 두려움이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질병에 대해 과하게 근심하거나 걸리지도 않은 병을 미리 걱정하는 것도 모자라, 이미 해가 없다고 판정된 위험까지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언론매체들은 우리의 이런 경향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과장, 왜곡된 정보, 그릇된 통계, 잘못된 편견, 정확하지 않은 근거…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대중’이라 불리는 우리는 불필요하게 혹은 지나치게 모든 것에 대해서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을 느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얼마나 많이 권력의 의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들을 제대로 보질 못하고 오해하고 편견 속에서 지내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 속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고 걷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어떤 권력의 의도에서 비롯된 공포와 불안감 그리고 두려움이 과장되는지를 보고 그에 현혹되어 근심하는데 생의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함입니다.





2.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1) 묻는 자가 없고

오늘 본문, 요 16:5-6도 공포와 그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근심은 외부에 의해 조장되고, 과장된 공포가 아니라, 그들 속에서 과장되고, 왜곡되고, 잘못된 편견에 의해 생긴 공포였습니다. 5절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불과 몇 시간 뒤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체포되실 주님은 수차례에 걸쳐 당신의 떠나심(십자가형)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는 제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 단 한번도 묻는 제자가 없었을까요? 여기서 잠시 해당사항에 대해 펙트체크해 보겠습니다.


요 13:36입니다.

  •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다음으로 요 14:5입니다.

  •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분명,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도마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자가 없다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베드로와 도마가 물었던 ‘어디’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다가올 십자가를 말씀하시는데, 베드로는 주님께서 로마 압제 하의 기존사회를 뒤엎고 혁명을 일으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시는 길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주님이 하실 그 혁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도 버리겠다고 말했던 겁니다.


도마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14:5절에서 도마가 사용한 ‘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ὁδός(호도스)라는 단어로서 ‘도로, 여행’ 등을 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예비하는 곳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했습니다. 도마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님께서 먼 길을 여행하는 줄 착각했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했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장차 주님께서 이루실 일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는 제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차례에 걸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왜 주님이 피 흘리셔야 하는지, 왜 살이 찢기셔야 하는지 알고자 하는 이가 하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16:5절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묻는자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2)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예수님으로부터 제대로 묻지 않고, 제대로 알려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스스로를 공포 속으로 더 밀어넣었습니다. 물론 그 공포는 과장, 왜곡된 정보, 잘못된 편견, 정확하지 않은 근거 등에 기인된 것이었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 조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만든 그 공포에 의해 근심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불안과 두려움은 죽음으로부터 옵니다. 자기존재의 소멸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이상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가 됩니다. 이것들은 잠재의식 속에 가두어 놓는다고 해도 쉽게 넘어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인간의 실존적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의 생명나무 실과처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먹고 영생으로 이르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빵이 되시고, 생명의 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 단순히 죽임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활을 향한 출발점이요, 하나님 나라의 시작점이 됩니다.


이 과정을 잘 알고 계시기에 주님은 요 16:20-22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근심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주님은 한 예를 들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출산을 앞둔 여인의 고통과 그 후의 기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산모가 해산하는 것은 죽을 정도의 고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산달이 가까워지면 해산의 고통을 생각하며 근심하며 긴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희망 때문에 고통을 견뎌냅니다. 그 고통이 지나면 아기를 가슴에 안습니다. 그때 산모는 아기를 낳았을 때의 끔찍했던 고통이 언제였는지 잊고 기뻐하는 겁니다.


이처럼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됩니다. 근심이 기쁨이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아이를 안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이를 낳을 때의 고통을 잊어버리듯이, 십자가로 인해 근심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곧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빼앗을자가 없는 충만한 기쁨이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기독교가 말하는 역설의 진리입니다. 고난과 십자가를 지나면 빼앗을 자가 없을 정도의 충만한 기쁨이 있다는 말은 곧 현재 겪는 근심과 아픔 속에 다가올 기쁨과 영광이 들어 있다는 역설입니다. 이것은 근심이 곧 기쁨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고로 근심이 없는 기쁨, 근심의 지난한 아픔을 거치지 않은 기쁨은 참 기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22)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이라고 하는 현재는 근심을 하지만 미래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다가올 날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현재를 견디라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근심 속에 다가올 미래의 영광이 있음을 믿으며 이겨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당신 또한 현재의 고난 너머에 부활의 기쁨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그 이후의 부활과 그 부활로 인한 제자들의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3. 행복을 위한 근심


2016년도 가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무한도전에서 직장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무한상사가 방영되었습니다. 부제목이 '위기의 회사원'이었습니다. 그 첫 장면은 이런 멘트로 시작했습니다.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보내는 연 평균 노동시간 2113시간, 회사에서 소외감을 느낀다고 대답한 직장인 73%, 내가 돈 버는 기계처럼 느껴진 적이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직장인 53%,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직장인들의 대답은 행복이었다.”


첫 장면을 보면 행복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하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할 겨를이 없는 직장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왜 행복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시간을 일하고, 그렇게 많은 노력을 하고, 많은 것을 참으면서, 왜 우리는 행복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트리나 포올러스 (Trina Paulus)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한 부분에서 유추해 봅니다.


애벌레는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

"날기를 간절히 원하면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그럼, 죽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있단다. 삶의 모습은 바뀌지만, 목숨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나비가 되어보지도 못하고 죽는 애벌레들하고는 다르단다"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태하는 과정에서 나비는 살이 찢어질 것만 같은 극한의 고통을 겪습니다. 통통한 번데기의 몸집에서 바늘구멍만 한 곳으로 비집고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안쓰러운 나비를 위해 가위로 구멍을 잘라 구멍을 크게 내주면, 불행하게도 그 나비들은 평생을 날지 못합니다. 거세당한 고통과 근심으로 인해 힘없이 바닥에서 뒹굴 뿐입니다. 나비가 작은 구멍을 힘겹게 빠져 나오려고 애쓰는 동안 그 몸통에서 나온 액체가 날개를 적시고, 그렇게 단련되고 훈련된 날개라야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시간은 길지만 아름다운 비행을 꿈꾸며 때론 밤을 새우며 근심하며, 이를 악물고 인내하는 나비의 길이 어쩜 우리의 길이 아닐까요? 그 길이 싫어, 그 고통이 버겁다고 회피하기에 그 많은 시간을 행복을 위해 바치면서도 정작 행복을 얻지도 행복하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4. 시대와 사회를 위한 근심


사도바울은 빌 4:6을 통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잠언15:13 통해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며 근심의 해악에 대해 경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다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곧 신령한 근심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근심'으로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Moffatt, New Translation(MNT)은 이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이 근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한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한 근심으로서 회개를 낳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근심을 통해 우리 속에 거하시며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것을 시작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는 세속 근심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온통 그 관심사가 인간 본능에만 쏠려있어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는 근심과 영원한 곳, 진정한 행복을 위해 몸부림치는 근심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루동안 사람은 ‘5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지요. 그 5만 가지 생각은 혹 근심으로 둘러 싸여 있지 않은지요? 그런데, 그 근심은 어떤 종류의 근심인지 이 시간 우리 각자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기 위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위한 근심인가요? 아니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한 근심입니까?


39년전 광주에선 동광원을 비롯한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국가의 폭력 앞에서 이 나라를, 이 사회를 위해 근심했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흐르는 산하를 꿈꾸며 당신들의 생명조차 총탄과 군화발 아래 짓밟혀 갔습니다. 그 결과 광주 518은 이 땅 민주화의 나침반이 되어 이 나라를, 이 사회를 인도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바턴을 이어받은 우리는 어떤 근심으로, 어떤 몸부림으로 우리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요?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근심하던 선배들을 허락하심을 감사합니다. 자신의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며 아파하고 근심하던 그분들의 고통을 통해 오늘 우리 시대를 새롭게 하심을 압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근심과 아픔으로 우리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사회는 아직도 권력을 놓지 않고 지속적으로 군림하려는 이들에 의해 공포가 조작되고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실지에 대한 기본적이고도 세속적인 근심에 포로가 되곤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하셔서 우리 시대를 분별하게 하시고, 우리 사회의 병리를 제대로 진단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문제를 품고 근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의 그 근심으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 그늘진 곳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39년전 이 땅의 정의와 공의를 위해 근심의 재물로 가족을 바치고 아직도 그리움과 슬픔으로, 또 극우세력의 오해로 아파하는 518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옵소서. 하나님의 평화가 그분들에게 임하게 하시고, 우리들은 빚진 마음으로 우리 시대를 위해 근심의 재물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근심을 영원한 기쁨으로 만들어 주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회 13회

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logo_color.png

©2019 by 움오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