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오름교회

2019.05.12 움오름 주일 설교 - "실족하지 않게 하려"(요 16:1-4)

2019년 5월 14일 업데이트됨





요한복음 16:1-4

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설교문

1. 폭력이 된 정체성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예수님은 요 15장에서의 말씀과 같이 곧 닥칠 고난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그 고난은 다름아닌 주님을 믿는 제자들이 맞닥뜨릴 핍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주님을 따르며,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제자들은 칭찬과 존경은 차치하고 되려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 16:2이 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출교시켰습니다. 신앙으로 연결되어 있고, 통제되던 유대사회 속에서 출교는 사회적 사망을 의미하는 충격적인 조치였습니다. 나아가 실제 살인까지도 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련의 일들을 자행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여겼기에 그 일들을 버젓이 행했다는 겁니다.


이해되지 이 사람들의 행위는 최종원 교수(밴쿠버 기독교 세계관대학원)의 “정체성이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설명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과 사랑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교리입니다. 이러한 자각과 교리 안에서는 인종, 국가, 또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노예 삼거나 억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국가 안에서 노예해방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독일의 교회와 이탈리아의 카톨릭은 히틀러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지지했습니다. 민족이나, 국가, 인종 등과 같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하나로 묶는데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오용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 또는 신앙의 이데올로기가 독일교회와 카톨릭만의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일명 보수적이라고 하는 한국 교회 속에서 시대에 따라 그 대상은 다르지만 주요하게 영향을 끼쳐 왔습니다. 종교가 가부장제 성격을 띤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반응해 왔습니다. 광장에서 구국을 외치는 교회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흐름을 늘 함께 하며 그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무자비한 차별과 폭력을 감행해 왔습니다.


하버드대 경제학자로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인도출신 아마르티아 센은 《정체성과 폭력》이라는 책에서 과도한 국가, 종교적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제도적, 물리적 폭력과 연결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체성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내적 가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을 통해 효과적으로 내부의 연대와 결속을 견고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결과 공동체 밖의 다른 이들은 악마화시킵니다. 다른 이들을 악마화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배제나 혐오, 처벌에 대한 죄의식은 효과적으로 상쇄됩니다. 나아가 타자의 악마화는 동시에 자신들의 가치와 규범에 대한 신성화를 낳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은 로마제국의 통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신성화의 산물이었습니다. 지난 달 70주년을 맞이했던 제주 4.3 사건에 한국 기독교 우파세력인 서북청년단이 깊숙하게 개입했었던 것 또한 종교가 국가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반응했던 결과였습니다. 도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종교공동체 신성화의 산물이었습니다.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정체성’이란 것 역시 누구를 위한 정체성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금 결이 다르긴 하지만, 2주전 주일 오후에 조문했던 한 교회주관 장례식 역시 이 부분을 생각케 했던 경험이었습니다. 해당 장례식은 이름만 대면 아는 어느 교회 주관 장례예식이었습니다. 상주 중의 한분이 오랫동안 교직에 몸 담아 왔고, 이전에 시부모님의 장례식 중 너무나도 깔끔하게 일해 준 업체에 의뢰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인이 속해 있었던 교회에서는 교회거래 업체에 일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워낙 ‘우리 00교회’ 의식이 강한 교회였기에, 또한 고인이 그 교회의 은퇴 장로님이셨기에 믿고 맡겼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시작부터 깨졌습니다. 조문객을 받아야 하는데도 상복이 2시간이 넘게 약속시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조문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도 위로예배를 집례하는 목사는 40분 이상을 넘겨서 상주들을 좌불안석케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교회는 신대원 재학시절 동기목사가 부임하여 기존 예배순서지 복사업체가 장당 100원이 비싸서 더 저렴한 업체로 바꾸었더니 한 장로님이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는 교회였습니다. “니가 뭔데!!! 바꿔?”


‘우리 00교회’ … 이게 허울좋은 그들만의 공동체 아닙니까? 서로 권력과 이권을 나누며 공생하는 공동체, 그것을 위해 그들만의 정체성을 강조해 왔던 것 아닙니까?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공동체, 그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을 가진 교회라면 당연 그 힘이 외부의 필요로 하는 곳, 약하고 가려져 있는 이들을 향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00교회’라고 하는 교회 이외도 수많은 교회들이 ‘자기들만의 천국’을 위해 끊임없이 정체성과 자기들만의 독특성을 강조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런 교회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입니다.

  •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2. 기억나게 하려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잘 믿기에 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의 대표적인 사람이 핍박자 사울이었다가 사도가 된 바울입니다. 빌 3:6에서 고백했듯이 그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면서도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였습니다.


이렇게 대적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고, 같은 믿음의 진영으로부터 핍박을 받다보면 어느 누군들 견디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면, 기운 빠지고 흔들리게 됩니다. 이럴 때의 해결책을 주님은 당신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4절입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동안엔 별 문제 없었습니다. 그때 그때마다 시의적절하고도 필요적절한 말씀을 친히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불과 얼마있지 않으면 주님은 십자가형을 받으셔야 합니다. 바로 이때, 주님의 부재의 시기에 핍박을 견디고 이겨내기 위해 필요로 한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핍박에 함몰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을 기억하실 겁니다.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어릴 때부터 광야에서 메뚜기와 야생꿀을 먹으며 메시야의 때를 준비하며 기다렸던 선지자입니다. 그가 헤롯 안티파스 왕(Herod Antipas A.D.4-39)의 죄를 지적했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점점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엄습해 올 때, 세례 요한은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 마 11:3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요한의 질문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맞는지를 물은 것입니다. 요한은 일찌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을 뿐 아니라 성령님이 예수님의 머리에 임하시는 것을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하늘의 소리를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며 백성들에게 소개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때까지 세례요한 만큼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믿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옥에 갇히고, 죽음이 눈 앞에 다가오니 예수님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진짜 메시야가 맞는지를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질문은 그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은 죽었다”고 고백되는 무신론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순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시간, 주님의 부재가 절감되는 차가운 밤, 우리 삶이 불확실로 가득 차는 어스름한 순간에 필요한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이때의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준다기 보다는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때 또한 꺼져가는 신앙의 불씨를 살려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숨어계신 부재하신 하나님을 참고 기다리게 만듭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과거의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라면, 소망은 미래의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이 바로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의 시대를 믿음, 소망, 사랑을 갖고 숨어 계신 하나님을 체험해 가는 법을 훈련해 갑니다.




3. 실족하지 않게 하려


다시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먼저 알아보았지만, 메시야 구원의 본질과 범위에 대한 영적 안목이 부족했습니다. 그 결과 메시야가 공의의 심판을 행하사 유대 사회의 온갖 부조리와 불의를 바로 잡고 일거에 악한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기대와는 완전 다르게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그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마 11:5입니다.

  •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강력한 왕권과 통치권을 갖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메시야를 기대하던 세례요한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시각장애인을 비롯한 못 걷는 사람, 나병환자, 청각장애인, 죽은 사람, 가난한 사람 등은 아무런 관심꺼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 사회 속에서 철저히 외면받던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라고 굳게 믿었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인 자기들과 식민지로 전락한 이스라엘을 회복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족 할 수밖에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사람들의 기대와 소망과 달리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실족하다'는 헬라어는 ‘σκανδαλίζω(스칸달리조)’입니다. 이에서부터 오늘날 유명인사들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스캔들(scandal)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스캔들, 걸려 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내 경험과 테두리 안에 주님을 가둬두다 보면 걸려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이러한 체험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유한 진리라는 것이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협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가 스스로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주님의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의 테두리를 넘어서게 해 주실 뿐 아니라, 걸림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 발의 등불이요, 길의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 없는 세상


일반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강조하는 것이 말씀과 더불어 기도입니다. 진리를 좇아 의를 따라 살면서 핍박을 받을 때에 마음 속에 들끓는 수많은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일어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으로 반응하며 일어서는 것, 견디는 것은 과히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넘어지지 않습니까? 흔들리지 않습니까? … 우리 앞서 이 길을 걸었던 많은 신앙의 거장, 선배들은 하나같이 아니라고 합니다. 되려 ‘신의 죽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를 이겨가는 다른 길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신비주의 전통 안에서 더 풍성합니다. 특히 ‘하나님 없는 세상’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딱딱한 껍질을 깨고서 계란의 속을 맛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부재라는 체험을 자기 안에 녹여 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신앙의 종교적 진리가 편협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내가 경험하고 믿고 싶은 것에서만 머물지 않고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신비에 대해 개방성을 갖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바닥까지 지쳐 죽고 싶다는 말을 되뇌이던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가던 중 천사가 전하던 말을 받아들여듯이 우리 또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 왕상 19:7 일어나 먹어라.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손자를 잃고, 딸 마저 먼저 보내며 하나님의 부재의 시간을 뼈저리게 보냈던 한 분의 고백을 나눕니다. 그는 이어령 교수입니다. 딸의 죽음 이후 사람들이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딸이 실명위기에서 건짐을 받고 눈을 뜨게 되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딸을 암으로 잃고 난 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때 이어령 교수님은 “하나님이 고쳐주신 분들도 모두 다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열두 제자도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행하고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오히려 그 죽음이 기독교의 새 복음이 된 것을 압니다.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병을 못 고쳤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지 못했지만 그 일로 인해서 기독교는 더 융성해진 것을 잘 압니다. 나도 인간이라 믿음이 깊지 못하여 하나님을 원망도 했습니다. 손자를 잃었을 때, 딸을 잃었을 때 세속적인 말로 왜 삐치지 않았겠습니까? 실족할 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나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누구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딸이 눈을 떴으니 예수님을 믿고, 딸이 세상을 떠났으니 예수님을 버리는 것은 시장의 거래지. 믿음은 아닙니다. 남대문시장에 가서 값이 싸면 사고, 값이 비싸면 사지 않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세상이 부패했어도 교회는 시장이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 취하거나 버리거나 하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를 시장으로 만들지 맙시다. 교회를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믿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위대한 신앙, 흔들림 없는 믿음은 우리의 바램일 뿐 우리의 실제와는 참 거리가 많은 수식어입니다. 때로 우리에겐 ‘작은 믿음’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믿음의 부재를 겪기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없는 세상, 하나님의 침묵의 때를 겪어가기엔 한 없이 모자란 실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망이 있음은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테두리 밖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재 밖에서도 존재하시며, 하나님의 침묵 안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넘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실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설혹 지금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고 체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내 기대대로, 기도대로 일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거래하는 사람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편협하고 막혀있는 불완전한 우리 믿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신비 앞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믿음으로 서게 하옵소서.


우리를 실족 가운데서 건지실 뿐 아니라, 말씀으로, 신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9.05.12 봉헌기도 - 윤성천

오늘도 말씀을 통해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었던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느낄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극히 일부분만을 보았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우기고 다른 것을 본 사람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폭력적인 본능이 우리 안에도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주님의 침묵이나 의도적인 부재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주님을 원망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해서 걸려 넘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간단한 시각장애인 체험을 해보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져진 것의 실체를 잘못 알기 일쑤입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발을 옮기면 될 것을 혼자 가겠다고 맘대로 나섰다가 부딪히고 깨지는 봉변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으로 깨우쳐주듯이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완전하게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기에도 아직 갈길이 멀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주님께 매달려 있을 수 있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며, 덜 깨지고 또 다른 이들에게 덜 상처를 주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늘 동행하며 우리를 살펴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우리들의 정성을 담은 예물을 하나님께 올립니다. 드리는 마음을 축복하셔서 영육의 강건함을 더하게 해 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봉헌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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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간:

일요일: 11:30am - 1: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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